<국가> 1권 초반부의 드라마 구성에 관하여

<국가> 1권 초반부의 드라마 구성에 관하여.

<국가>라는 책이 가진 시공간적 배경과 그 속에서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사람들 등은 모두 플라톤이 의도적으로 구성한 장치이다. <국가>는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어저께 나는 아리스톤의 아들 글라우콘과 함께 피레우스로 내려갔었네. 그 여신께 축원도 할 겸, 이번에 처음으로 개최하는 축제 행사이기도 해서, 그걸 어떤 식으로 거행하는지도 볼 생각에서였네. 내가 생각하기엔 실로 본바닥 사람들의 행렬도 훌륭한 것 같았지만, 트라케인들이 지어 보인 행렬도 그것에 못지 않게 근사해 보였네. 우리는 축원과 구경을 마치고 시내로 돌아오고 있었네. 한데, 집으로 둘러서 돌아오고 있는 우리를 케팔로스의 아들 폴레마르코스가 멀리서 보고서는, 시동을 우리한테로 뛰게 해서 저를 기다려주도록 시켰더군. … 그리고 조금 뒤에 폴레마르코스도 왔지만, 또한 글라우콘과 형제간인 아데이만토스와 니키아스의 아들 니케라토스, 그리고 또 그 밖에 몇 사람도 왔는데, 모두 축제의 행렬을 떠나오는 길인 것 같았네. (327a~c)

1. <국가>의 시간적 배경에 관하여 (1)

<국가>의 내용은 대략 기원전 432년 정도를 배경으로 한다. 등장인물인 케팔로스가 대략 기원전 430년 정도에 사망했기 때문이다. 이에 더해, <국가>는 밴디스 여신의 축제가 한창 열리고 있으며, 이 축제의 행렬을 구경할 정도로 여유가 있다는 것은 등장인물에게 여유가 있음을 암시한다. 따라서 <국가>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시작된 기원전 431년 전이자 아테네 국력이 융성하던 어느 시기를 배경으로 한다.

2. <국가>의 등장인물에 관하여

처음부터 등장하는 사람인 글라우콘과 아데이만토스는 <국가>에서 소크라테스와 계속 이야기를 나눌 사람인데, 이들은 피레우스에서 사는 케팔로스의 아들인 폴레마르코스의 집에 가자고 말한다.

a. 케팔로스: 케팔로스는 아테네인이 아니라 거주하고 상업하도록 허락받은 외국인으로, 거대한 방패 공장을 운영했던 사람이다. 전쟁이 나면 엄청난 돈을 많이 버는 직업 중 하나가 무기상이다. 그렇다면 ‘정의’라는 주제에 대해 논하는 <국가>라는 대화편은 끔찍한 전쟁이 시작되기 직전에 전쟁을 이용해 돈을 버는 케팔로스라는 무기상의 집에서 이야기하는 아이러니한 작품이다.

b. 폴레마르코스와 뤼시아스: 둘은 케팔로스의 아들이자 아테네의 격변을 겪은 비극적인 인물들이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스파르타의 승리로 끝난 후, 아테네는 크리티아스 등을 비롯한 30인 참주들에 의해 통치된다. 참주들은 이때 그간 아테네를 이끈 참주정 반대파를 숙청하는데, 그 숙청 첫 번째 대상이 이 두 형제다. 두 형제 중 폴레마르코스는 ‘정의’를 다룬 자신 집에서 체포되었을 것인데, 소크라테스와 마찬가지로 독배를 마시고 죽었다. 뤼시아스는 도망쳐 있다가 망명해 있던 민주 세력을 도왔고, 아테네 민주정의 회복에 일조한다.

두 인물이 민주정의 지지자임을 암시하는 구절이 있다. <국가> 첫 부분에서 폴레마르코스가 소크라테스에게 자신 집에 머물러달라고 강권할 때, 그는 자신들이 다수이니 소크라테스는 말을 들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게다가 <국가>는 이미 이 장면에서 민주정의 강압적 모습을 암시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폴레마르코스는 소크라테스를 붙잡을 때 (1) 잡는 사람을 이겨내거나 (2) 피레우스에 머무르는 두 가지 가능성만 있다면서 소크라테스는 자신에게 져서 두 번째 선택지를 택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가 보기에 자신은 아데이만토스, 니케라토스 등 여러 사람과 함께 가고 있었기에, 즉 다수였기 때문에 소크라테스는 자신 생각에 따라야만 한다. 후술하겠지만, 이 장면을 보는 <국가>의 첫 독자는 민주정의 강압, 다수의 횡포, 그로 인한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떠올리게 된다.

c. 아데이만토스: 아데이만토스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많이 없으나, 기원전 424년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한창이던 시기에 메가라 전투에서 수훈을 세웠다고 한다.

d. 등장하지 않은 인물들: 위에서 언급한 30인 참주정의 지도자들, 특히 크리티아스와 카르미데스는 소크라테스와 원래 매우 가까운 사이였다. 이후 재건된 아테네 민주정은 펠로폰네소스 전쟁 과정에서 아테네 몰락의 원인 중 하나가 된 소크라테스의 제자인 알키비아데스와 30인 참주정을 이끈 크리티아스의 스승인 소크라테스에게 사형을 선고한다.

3. <국가>의 시간적 배경에 관해 (2)

플라톤은 등장인물이나 시공간적 배경에 대한 정보를 상세히 제공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국가>가 목표로 했던 독자들은 위에서 언급한 정보 대부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포함한 역사적 사건들을 이미 알고 있으며, 등장인물이 어떤 방식으로 비극적으로 죽었는지 알고 있다.

자신 정치 공동체의 과거 영광은 사라지고 나라는 약해졌으나 민주정을 회복시키고 다시 성장하고자 하는 꿈을 가진 그런 독자가 볼 때, 이 작품은 자기 공동체의 가장 빛나던 시기를 그리고 있다. 그래서 독자는 이 작품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된다.

4. <국가>의 공간적 배경에 관해

피레우스 항구라는 요소는 중요하다. 피레우스는 아테네 해군력의 본거지였고, 이를 통해 아테네는 타국에 대한 권력을 쥐고 있었다. 그리고 이곳은 30인 참주 통치에 대항한 민주파의 첫 본거지이다. 이런 역사적 배경을 알고 있는 독자들은 피레우스라는 장소를 보면 감회가 남다를 것이다. 게다가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시작 전, 즉 아테네에서 민주정이 가장 융성하던 시기에서 민주정에 대해 비판하는 이 <국가>라는 작품 속 대화 모임은 일종의 반역이다.

이에 더해, <국가>의 첫 독자들은 이 작품을 보고 정의에 관한 추상적 논의를 진행하는 탁상공론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이 작품은 실존 인물이 등장해 자신 시대에 관해 다루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독자는 이 작품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된다.

5. <국가>의 첫 단어: kataben

<국가> 전체에서 다루는 여러 주제에 대한 단서가 <국가>의 시작 단어에 함축되어 있다. 그리스어는 어순이 자유롭기에 저자는 강조하고 싶은 단어를 문장 가장 처음에 둔다. 예컨대, 아킬레우스의 개인적 분노가 전쟁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다루는 서사시 <일리아스>의 첫 단어는 ‘분노’다. <국가>도 마찬가지다. <국가>는 다음 문장으로 시작한다: “어저께 나는 아리스톤의 아들 글라우콘과 함께 피레우스로 내려갔었네.” 하지만 사실 그리스어 원전 문장은 ‘내려가다’라는 뜻의 ‘katabainein’의 1인칭 과거형인 ‘kataben’으로 시작한다. 그렇다면 플라톤은 ‘내려감’이라는 단어를 통해 무엇을 전달하고 싶었는가?

입문서는 플라톤의 철학을 초월적 세계인 이데아를 중심으로 설명하곤 한다. <국가> 7권에서 등장하는 유명한 동굴의 비유에서도 플라톤은 초월적 세계로의 상승을 강조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플라톤이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상승만이 아니다. 사실 <국가>에서는 현실로 내려오는 과정을 강조한다. 동굴에서 벗어나 형상의 세계를 본 철학자는 반드시 앎을 갖고 현실로 내려와야 한다. 그는 이데아를 관조하면서 사는 삶을 행복해하지만, 정의로운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앎을 가지고 내려와야만 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그래서 ‘정의’를 다루는 <국가>에서 중요한 주제는 ‘올라감’이 아니라 ‘내려옴’이다.

이 ‘내려감’이라는 주제에 집중해서 초반부 문장을 다시 읽어보면, 다음과 같은 그림이 그려진다. 소크라테스는 피레우스보다 지리상 위에 있는 아테네로 가려고 한다. 즉, 그는 ‘내려감’보다는 ‘올라감’에 마음을 쓰고 있다. 하지만 그는 피레우스에 머무른다. 아테네로 가고 싶었으나 피레우스에서 정의에 대해 논의하는 소크라테스의 모습은 마치 동굴의 비유에서 등장한 철학자처럼 원치 않아도 통치해야만 하는 철학자의 운명을 암시한다.


제가 추후에 쓰려는 논문 주제가 <국가>의 드라마적 구성과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어서 오랜만에 다시 공부했습니다. 플라톤의 작품은 참 보면 볼수록 대단합니다. 더 자세한 내용은 제가 참고한 <플라톤 국가 강의>에 더해 <플라톤 국가편의 드라마적 도입부에 대한 한 가지 해석>을 참고하시면 많은 도움이 되시리라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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