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전체집합을 포함하는 전체집합이잖아요. 그렇다면 예시로 '나는 생각한다' 는 실제적으로 '나는 생각한다를 생각하는 나' 이고, 이에 대해 다시금, ' 나는 생각한다를 생각하는 나를 생각하는 나' 가 되게되고 이는 무한히 반복될 수 있잖아요.
근데 실제적으로 나는 무한반복되지 않고 어느지점인 나=나가되는 지점에서 멈추게되는데, 이 멈추는 지점이란 무엇인가는 철학적인 질문이 될 수 있나요? 어떤 사상가와 연결될 수 있을까요?
나는 전체집합을 포함하는 전체집합이잖아요. 그렇다면 예시로 '나는 생각한다' 는 실제적으로 '나는 생각한다를 생각하는 나' 이고, 이에 대해 다시금, ' 나는 생각한다를 생각하는 나를 생각하는 나' 가 되게되고 이는 무한히 반복될 수 있잖아요.
근데 실제적으로 나는 무한반복되지 않고 어느지점인 나=나가되는 지점에서 멈추게되는데, 이 멈추는 지점이란 무엇인가는 철학적인 질문이 될 수 있나요? 어떤 사상가와 연결될 수 있을까요?
독일 냄새가 나는 질문인데, 아직 제 내공이 부족하여 답을 제대로 못 달아드리겠네요. 유의미한 질문인 건 확실한 것 같습니다.
이게 무슨 말씀인지 잘 모르겠어요.
철학사에서 그러한 물음이 있었는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제 나름대로 답변을 드려볼게요.
물음이 올바르게 바뀌려면 생각하는 나, 생각하는 나를 생각하는 나, .... 식으로 바뀌어야 할 것 같습니다. 물음에 달아주신 퇴행에서는 같은 반복이 일어나지 않는 것 같아요. 이런 식으로 물음을 바꾸었을 때, '나'가 반복적으로 나타나는데, 여기에서 '나'의 의미가 문제가 되는 것이겠죠.
1. 나는 생각한다 -> 생각하는 나를 생각하는 나의 과정이 자연스레 이루어지는가?
첫번째 퇴행이 자연스럽게 일어날 이유는 딱히 있어보이지 않습니다. 예컨대 내가 사과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고 해서, 내가 생각하는 나를 꼭 다시 대상으로 삼을 이유는 없죠. 따라서 이 퇴행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퇴행은 아닌 것 같습니다.
2. 우리가 인위적으로 반복을 진행한다면, 멈추는 지점은 어디인가?
말씀해주신 반복은 따라서 처음에 의식적으로 내가 '생각하는 나'를 생각해야만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두번째부터는 다른 현상이 일어날 듯 보입니다. '나'가 생각의 대상으로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2가지의 분기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생각하는 나'를 의식적으로 계속해서 떠올리는 경우, 즉 '생각하는 나를 생각한다'가 그러한 행위를 하고 있는 나를 명시적으로 떠올리는 경우를 의미할 때 발생하는 경우입니다. 이경우 큰 문제가 없습니다. 내가 이 의식적인 생각을 중단하는 시점이 순환이 끊기는 지점입니다.
두번째 경우는 생각하는 나를 직접 떠올리는 것이 아니라 나를 떠올릴 때 생각하는 행위가 자연히 나의 속성으로 자리하고 있는 경우입니다. '(생각하는) 나를 생각하는 나'에서 앞에 있는 '나'가 외견상 무한한 생각을 반복하는 나처럼 보일 수 있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지만, 실제로 그렇지 않습니다. 첫번째로 다룬 케이스, 즉 의식적인 생각 행위가 없다면 여기서 떠올린 나는 생각하는 나를 생각하는 나가 아닙니다. 그래서 반복 자체가 실제로는 유한한 작업으로서 만들어질 것 같습니다.
안녕하세요!
"생각하는 나"의 계층적 구조를 재귀적으로 정의하면:
𝑆𝑛={𝑆𝑛+1}, 𝑛∈𝑁
여기서:
𝑆0 = "초기 생각하는 나".
𝑆𝑛= 𝑆𝑛+1 를 포함하는 "생각하는 나의 다음 단계". ?? 로 설명되지 않을까요..?
저도 보면서 피히테가 문득 생각이 났습니다. 러셀의 역설과는 직접적으로 연결되지는 않는 것 같지만, 형식적으로 유사성이 있을 수(?)도 있는 듯 하고요.
"여러분, 저 벽을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 그 벽을 생각하고 있는 사람을 생각해 보십시오"
분명 우리는 한없이 계속할 수 있다.
피히테의 유명한 저 강의가 생각 났었습니다. 관심 있으시다면 피히테, 셸링의 논의를 찾아 보시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답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의식이 나에 대한 메타적 기술을 멈추는 역할을 하게된다는 거군요.. 그치만 의식은 나라는 주체행위잖아요? 이는 내가 나에 대한 메타적 기술을 멈추게된다는 것인데, 이 나가 어떻게 구성하는지, 이 나가 이러한 메타적 기술들을 포함할 수 있는 내구성은 어디서 오는지에 대해 의문점이 남아요.
'생각하는 나'를 왜 그렇게 정의해야 되는지 좀 더 자세히 설명해 주실 수 있나요?
안녕하세요!
생각하는 나를 수학기호로 표현한 건 그래야 자기참조적 구조가 명확하지 않을까해서였어요
아!
생각하는 나가 아니라 나를 생각하는 나를 정의한 게 맞겠네요
질문자님의 맥락과는 완전 다르지만 라캉이 러셀의 역설을 참조해 주체의 형성에 대해 논하는 부분이 있는 것으로 알고있습니다.
음, 약간은 알 듯하지만 여전히 @star_11 님의 정의에 관한 의문이 완전히 해소되지는 않았어요. '나를 생각하는 나'를 집합으로 나타내고, 그 집합에 원소가 있을 때, 그 원소는 어떻게 이해해야 되나요?
만약 제가 "차불휘"라는 사람을 비어 있지 않은 집합으로 정의한다면, 그 집합의 원소는 무슨 의미인지 다른 사람이 궁금해할 법합니다. @star_11 님도 자신이 정의한 '나를 생각하는 나'의 원소를 더 자세히 해설해 주시면 좋겠어요.
아니에요!
도움만으로 감사합니다
나를 생각하는 나의 원소는 나에요
나를 생각하는 나를 생각하는 나의 원소는 나를 생각하는 나에요
음.. 수학적 원소란 개념이 제 질문에 적합한지 스스로 돌아봤는데, 제 생각에는 그것보단 자기참조적 구조가 제 질문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star_11 님의 정의를 다음과 같이 고쳐 볼게요.
me_0
은 '나'를 나타낸다.ThinksAbout x y
는 "x
가 y
를 생각한다."라는 뜻이다.n
과 m
에 대해, me_n
과 me_m
은 동일한 유형에 속하는 항이다.n
에 대해, ThinksAbout me_(n + 1) me_n
이다.이 정의에는 자기 참조가 없는 듯한데요?
-- this code is written in Lean 4 (v4.14.0)
class ThinkingMe (Being : Type) where
me : Nat → Being
ThinksAbout : Being → Being → Prop
thinksAbout_me_succ_me : ∀ (n : Nat), ThinksAbout (me (n + 1)) (me n)
어어어어어 그렇네요!
제 질문에 오류가 있었네요.. 새로이 고치자면, 제 질문의 예시란 다음과 같아요. 실재적으로 '나는 생각한다'를 생각하는 나가 있고, 이러한 실재를 나는 생각한다를 생각하는 나를 표현하는 과정에서 실재적으로 다시금, '나는 생각한다를 생각하는 나'를 생각하는 나가 되게되고 실재->기술->실재 의 반복으로는 나에 대한 기술이 무한히 연기되게 되지만, 하지만 우리는 나가 누군지, 이러한 나가 진행되지 못하는 한계로서의 나를 가지고 살게되잖아요? 그렇다면 이 지점에 그 한계로서의 나, 나를 모두 포괄하는 나에 대해 무엇이 권위를 주는가? 이러한 한계로서의 나를 지탱하게해주는 것은 무엇인가? 에 대한 질문이었어요
음, 저는 @star_11 님이 새로 작성하신 질문의 내용이 이해가 잘 가지 않네요. 다른 분이 이미 올리셨거나 새로 올리실 답변으로 그 의문이 해결되면 좋겠습니다.
시간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ㅡㅡ)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