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년도 2학기 대학교 학부과목 페이퍼로 제출한 글임을 밝힙니다.
1. 서론
아리스토텔레스와 그의 후계자들인 소요 학파는 헬레니즘 시대에 에피쿠로스 학파, 스토아 학파와 치열한 지적 경쟁을 벌였다. 이들 중 스토아 학파의 경우, 얼핏 보기에는 큰 틀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들과 대부분의 경우 차이를 보이지 않는 것 같기도 하다. 『최고선악론』에서 키케로가 카토에게 제기하는 주요한 혐의 중 하나는 스토아주의가 교묘히 용어만 바꾼 아리스토텔레스주의가 아니냐는 것이기도 하니 말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남아 있는 스토아주의자들의 단편을 살펴본다면 금세 스토아주의가 아리스토텔레스주의에 대해 갖는 차별성은 물론이며, 그 자체로도 뛰어나고 독창적인 사상 체계임을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스토아주의와 아리스토텔레스주의를 비교해 보는 일은 두 지적 흐름이 헬레니즘 시대 전반에 미친 영향력을 고려해 볼 때에, 그 자체로 의미가 적지 않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필자는 본고에서 아리스토텔레스와 스토아주의자들의 영혼에 대한 이론을 중심으로 이러한 비교를 수행하고자 한다. 우선, 필자는 2장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혼론에 대해서 살펴본 후, 그것이 가지고 있는 두 한계를 지적할 것이다. 필자가 제기하고자 하는 두 난점이란 첫째로, 자연학적인 측면에서 지성의 발생을 설명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둘째로, 실천적인 측면에서 우리가 지적 덕(arete)을 획득하는 과정을 설명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그 후, 3장에서는 스토아주의자들이 제시하는 유물론적 영혼론이 어떻게 아리스토텔레스 영혼론의 두 난점을 해결하는지에 대해 검토하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4장에서는 자주 간과되곤 하는 영혼론을 중심으로 한 스토아주의자들의 분석이 스토아 체계 전체와 가질 수 있는 연관성에 대한 고찰과 함께 본고를 끝맺고자 한다.
2.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적 생물학
2.1. 아리스토텔레스 생물학의 개관
대부분의 고대철학자와 다르지 않게, 아리스토텔레스는 ‘생을 지님’과 ‘영혼이 있음’을 동의어에 가깝게 사용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영혼에 관하여』 2권 1장에서 영혼은 생을 지니는 물체의 형상이라고 규정하며, ‘가능태로 생을 지니는 자연적 물체의 첫 번째 현실태’라고 정의한다. 이어서, 같은 책의 4장에서 영혼은 ‘살고 있는 몸의 원인이자 원리’이며, 생명 활동의 작용인이자 목적인, 그리고 형상인이라는 언급이 등장한다. 그러므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의 신체와는 존재론적으로 다른 층위에 영혼을 설정하였으며, 이에 따라 어떻게 영혼이 신체와 상호작용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해 해명해야 하는 과제를 떠안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영혼(psyche)과 신체 사이에 프네우마(pneuma)를 위치시킴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동물의 운동에 대하여』 10장에서 동물은 ‘중간적인 것’인 욕구(orexis)의 운동을 통해 운동하며, ‘타고난 프네우마’(symphyton pneuma)를 통해 힘을 발휘한다고 기술한다. 이어, 프네우마와 영혼의 관계는 관저에서 ‘운동을 일으키면서 운동하는 것’과 ‘운동하지 않는 것’ 사이의 관계에 비유된다. 관절의 비유와 마찬가지로, 프네우마와 영혼은 구분되지만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저작에서 프네우마는 욕구와 더불어 동물 운동의 중간자의 위치를 차지한다.
한편으로 프네우마는 생식과 생물학적 발생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기도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액이 운동을 전달해 질료를 분화하고 유기적 신체를 생겨나게 한다고 보았다. 『동물의 생성에 대하여』 2권 1장에 따르면, 살이나 뼈는 정액이 제공하는 로고스 없이는 있을 수 없으니, 동물의 몸을 발생하게 하는 것은 정액의 운동이다. 이 대목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발생을 연장을 만드는 대장장이에게 비유한다. 쇳덩이를 부드럽게 만드는 것은 뜨거움이지만, 그것이 칼이 되도록 하는 것은 로고스를 갖춘 도구들의 운동이기 때문이다. 이때 정자가 이러한 운동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정자 안에 든 열기인 프네우마다. 정액은 피가 열처리된 것이기 때문에 피와 동등한 잠재성(dynamis)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개별화는 질료(hyle)에 의한 것이 아니라, 정액, 혹은 정액 속에 있는 프네우마의 작용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한편으로 아리스토텔레스는 같은 책에서 영혼의 발생 과정에 대해서도 상세하게 논의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액이 영혼을 갖되 잠재적인 상태에 있다고 보았다. 즉, 정액은 영혼의 잠재태이며, 그것이 질료에 가하는 작용을 통하여 단계적으로 신체와 영혼의 여러 부분이 생긴다. 인간은 태아의 수준일 때에는 영양 섭취의 영혼만 가지고 있으나, 태어난 이후에는 순차적으로 감각적인 영혼(그리고 운동과 욕구의 영혼), 그리고 지성의 영혼이 생겨난다. 이렇게 발생과정이 일련의 순서를 따라 진행됨에 따라, 각 개체에 고유한 것(to idiom to hekastou), 즉 발생과정의 목적이 가장 끝에서 실현된다. 그러므로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인간의 발생적 운동은 고정된 지향을 갖는 운동이며, 생물의 종적, 개체적 본질은 결정되어 있다.
한편으로, 우리는 종적인 한계를 가지고 있다. 『동물의 생성에 대하여』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가 개별적으로는 유한하지만, 형상적(eidos)으로는 영원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 대목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생물들 사이의 뚜렷한 종적인 차이를 인정하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동물지』에서는 어린아이의 영혼이 짐승들의 영혼과 거의 차이가 없지만. 어린아이들에게서는 나중에 생겨날 상태들의 자취와 씨앗을 볼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뿐만 아니라, 『영혼에 대하여』에서는 식물에는 영양 능력만 있으며, 동물에게는 영양 능력, 감각 능력, 욕구 능력, 그리고 운동 능력이 있는 반면, 인간에게는 거기에 더해 지적 능력까지 있다고 이야기한다. 이런 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종 사이의 뚜렷하고 절대적인 차이를 인정했던 것으로 보인다.
다른 한편으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가 개체적인 한계를 가지고 있다고 보았던 것 같다. 예컨대 『정치학』 1권 5장에서는 노예제를 옹호하기 위해, 다른 사람에 속할 수 있는 사람, 그리고 이성을 갖지 못하고 이성을 감지할 정도로만 이성에 참여하는 사람은 본성상 노예라는 대목이 등장한다. 같은 대목에서, 본성상 수컷은 암컷보다 우월하며, 자연적으로 수컷은 지배자이고 암컷은 피지배자라는 주장이 등장하기도 한다. 따라서 남편과 아내, 주인과 노예는 이성과 욕망, 영혼과 신체와 마찬가지로 ‘이질적인 요소’로 규정된다. 또한, 『동물의 생성에 대하여』의 4권 전체는 태생적인 속성을 설명하는 데에 할애된다. 이로부터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의 영혼에 대해 종적인 한계와 개체적인 한계를 모두 인정하였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2.2. 아리스토텔레스 생물학이 갖는 자연학적 난점
아리스토텔레스 생물학이 갖는 첫 번째 난점은 영혼의 지성적 부분의 발생을 해명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2장 1절에서 언급하였듯, 정액은 영혼을 갖되 잠재적인 상태에 있다. 영혼의 부분들 중 영양혼과 감각혼의 발생을 해명하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문제는 아닐 것 같다. 왜냐하면, 영혼의 영양 능력과 감각 능력은 신체의 능력과 직접적인 연관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반면, 지성혼을 해명하는 것은 전혀 다른 층위의 문제인데, 왜냐하면 지성혼은 몸의 활동과 전혀 뒤섞이지 않기 때문이다. 몸과 전혀 뒤섞이지 않는 지성이, 어떻게 무로부터 창조될(creatio ex nihilo) 수 있을까?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이 문제가 ‘막대한 수수께끼’라는 점을 인정하나, 『동물의 생성에 대하여』에서는 물론이며 현재 보존된 저작 중 그 어떤 곳에서도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2.3. 아리스토텔레스 생물학이 갖는 윤리적 난점
아리스토텔레스 생물학이 갖는 두 번째 난점은, 지적 덕의 취득을 해명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는 덕이 지적 덕과 성격적 덕으로 구분된다. 지적 덕과 성격적 덕 사이의 가장 큰 차이는 그 기원과 성장에 있는데, 지적(dianoia) 덕은 가르침으로부터 나오지만, 성격적 덕은 습관의 결과로 생겨나기 때문이다. 영혼의 이성적 부분은 학문적 인식의 부분(epistemonikon)과 이성적으로 헤아리는 부분(logistikon)으로 나뉘는데, 지적 덕은 각각의 부분이 그것의 기능에 따라 참을 가장 잘 인식할 수 있도록 하는 최선의 품성 상태를 가짐을 의미한다.
영혼의 이성적 부분은 기예(tekhne), 학문적 인식(episteme), 실천적 지혜(phronesis), 철학적 지혜(sophia), 지성(nous)에 의해 참을 인식한다. 이때,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학문적 인식은 귀납에 의해 가르치거나 배울 수 있음을 언급하지만, 기예, 실천적 지혜, 철학적 지혜, 지성이 어떻게 가르침에 의해 생겨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별다른 언급을 하지 않는다. 본고의 2장 2절에서는 영혼의 지적 부분 자체가 어떻게 생겨나는지가 문제의 쟁점이 되었다면, 이번에는 지적 부분이 어떻게 개선되는지에 대한 부분이 쟁점이 된다. 어떻게 우리는 영혼의 지성적 부분의 품성 상태를 개선할 수 있는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질문에 대해서도 답을 내리지 못한다.
3. 스토아주의의 발생적 생물학
3.1. 스토아주의 생물학의 개관
스토아주의 영혼론의 독창성은 프네우마 개념의 사용에서 나온다. 2장 1절에서 언급하였듯, 아리스토텔레스에게 프네우마는 영혼의 활동과 신체의 활동 사이의 매개자에 불과하였다. 반면, 스토아주의자들에게 프네우마는 영혼과 거의 동의어에 가깝게 사용된다. 스토아주의자들이 프네우마와 영혼을 동일시한 것은 일원론적 입장을 채택하지 않는 이상, 영혼과 신체의 상호작용을 해명하기 어려웠기 때문으로 보인다. 스토아주의자들이 영혼의 물질성을 증명할 때에는, 영혼은 일종의 프네우마이므로 따라서 물질적이라는 식의 논증을 펴기도 하지만, 영혼과 신체는 서로 상호작용하므로 따라서 물질적이라는 논증을 펼치기도 한다.
스토아주의자들은 프네우마 개념을 단순히 영혼에 국한해 사용하지 않고, 아리스토텔레스 자연학에서 질료를 현실태로 만들었던 형상의 역할을 부여하기까지 한다. 갈레노스의 보고에 따르면, 스토아주의자들은 프네우마를 자연적 프네우마(to physikon), 영혼적 프네우마(to psychikon), 그리고 응집적 프네우마(to hektikon)으로 구분한다. 이때 ‘자연적 프네우마’는 동물들과 식물들을 양육하는 역할을 하며, ‘영혼적 프네우마’는 감각, 운동, 사유 등 통상적으로 영혼이 갖고 있는 능력들을 갖는다. 마지막으로, 스토아주의자들이 새롭게 도입한 ‘응집적 프네우마’는 돌들이나 장기, 뼈 등을 결속시키는 역할을 한다. 그런데, 필론은 프네우마는 영혼적 힘(psychike), 자연적 힘(physike), 응집적 힘(hektike), 이성적 힘(logike), 사고적 힘(dianoedike) 등을 갖는데, 이때 ‘응집’은 영혼 없는 물체들에도 공유되지만, ‘자연’은 식물이나 손톱, 머리카락과 같이 식물과 유사한 것들이 갖는 운동을 갖는 응집이며, ‘영혼’은 인상과 충동을 갖는 자연이라고 보고한다. 마지막으로,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는 지성이 퍼져 있는 정도에 따라 프네우마가 달리 불린다고 보고한다. 따라서, 응집, 자연, 영혼, 이성 등은 프네우마의 부분이 아니라 프네우마의 상태가 되며, ‘이성적 프네우마’란 단지 더 큰 밀도를 갖고 퍼져 있는 프네우마를 나타내는 말에 불과하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와 마찬가지로, 프네우마는 생식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히에로클레스의 보고에 따르면, 정액은 자궁 속으로 적절한 시기에 떨어진 이후 활동을 시작하며 임산부로부터 질료를 끌어당긴다. 착상 이후 출생에 이르기까지 정액은 프네우마의 형식으로 변화하지만, 출생에 가까워질수록 점점 정제된다. 그리고 출생 시 접촉하는 공기의 냉각에 의해 밀도가 높아짐으로써 프네우마는 영혼의 상태가 된다. 이는 우리가 바로 위에서 살펴보았던 프네우마에 대한 자연학 이론에 전적으로 기반을 두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3.2. 아리스토텔레스주의 생물학의 자연학적 난점의 해결
2장 2절에서 살펴보았듯, 아리스토텔레스 생물학은 영혼의 지성적 부분이 어떻게 발생하는지 해명하지 못한다는 자연학적 난점을 가진다. 그러나 스토아주의자들은 영혼과 영혼이 신체에 작용하도록 하는 매개인 프네우마를 따로 구분하지 않고, ‘프네우마 일원론’의 체계를 세움으로써 이를 해결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영혼의 상이한 부분들에 할당하였던 영혼의 상이한 기능들은 스토아 철학 체계에서는 영혼의 상이한 응집 정도에 대응하여 할당된다. 프네우마는 충분히 응집할 경우 짐승들을 통해 구현되는 이성 없는 영혼의 프네우마의 상태가 되며, 이때 프네우마는 응집, 운동, 감각, 인상, 충동의 기능을 갖는다. 이때, 프네우마는 이보다 더 응집될 경우 이성적인 영혼의 프네우마의 상태가 되며, 이는 성숙한 인간을 통해 구현된다. 이때 프네우마는 이성 없는 영혼의 프네우마가 갖는 기능과 더불어, 이성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기능을 갖는 것이다.
스토아주의자들도 물론 사람과 동물, 혹은 성인이나 현자와 어린아이 사이의 질적인 차이를 인정하지만, 그 차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체계에서 그리하였듯 영혼의 특정 부분의 존재 여부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 즉 프네우마가 갖는 상태의 밀도 차이로 환원된다. 따라서, 이성이 없는 어린아이에서 이성이 있는 성숙한 성인, 혹은 현자가 되는 과정은 영혼의 이성적 부분이 무로부터 창조되는(creatio ex nihilo) 일 없이, 프네우마가 집중되며 영혼의 밀도가 높아지는 과정만을 통해 해명될 수 있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 원리는 전문적인 스토아주의 철학자들뿐만 아니라 헬레니즘 시대의 수련 문화에도 영향을 끼쳤다는 점이다. 푸코는 『주체의 해석학』에서 유동적인 프네우마가 산개하는 것을 피하고, 프네우마를 집중하고 압축하여 실존의 구체성을 부여하는 헬레니즘 시대의 수련 방법을 보고한다.
3.3. 아리스토텔레스주의 생물학의 윤리적 난점의 해결
3장 2절에서 보였듯, 스토아 체계의 프네우마 이론을 통해 아리스토텔레스의 체계에서 미처 해명되지 못하였던 지성혼의 발생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면, 『최고선악론』 3권 16절에서 22절 사이에서 전개되는 스토아주의자들의 개체화 이론은 영혼의 질적 변화에 대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지적 덕과 성격적 덕을 별개의 것으로 엄격하게 구분하고 있지만, 스토아 철학에서는 여기에 정확하게 대응하는 구분은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 대신, 스토아주의자들은 옳은 이성과 덕에 따르는 행위인 ‘옳은 행위(katorthoma)’와 자연에 따르는 행위인 ‘적합한 행위(kathekon)’를 구분한다.
적합한 행위는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사는 동식물들에게도 확장되는 개념이며, 따라서 그 자체로는 도덕적으로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adiaphora) 것이다. 그렇지만, 인간의 경우에는 이성에 따르는 삶이 가장 적합한 삶이므로, 적합한 삶은 우리를 덕스러운 삶으로 이끌며, 따라서 적합한 행위는 옳은 행위로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카토는 적합한 행위와 옳은 행위 사이의 관계를 빌린 것을 돌려주는 행위를 예시로 들어 설명한다. 빌려준 것을 돌려주는 행위는 적합한 행위이지만, 만일 우리가 지나가는 행인의 물건을 강탈해서 돌려준다면 그것은 올바른 행위이기는커녕 오히려 거부할 만한 행위일 것이다. 따라서, 카토는 적합한 행위가 옳은 행위가 되기 위해서는 ‘정당히’라는 말이 덧붙여져야 한다고 지적한다.
카토는 목적으로서 주어지는 것은 창이나 화살을 적중시키는 것이 아니라, 창이나 화살을 적중시키기 위해 모든 것을 다하는 작정이라는 비유를 든다. 즉, 어떤 행위가 옳은 것이 되기 위해서는 결과가 아니라 의도와 화살을 적중시키기 위한 노력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창대(2003)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제시한 덕스러운 행위의 세 가지 조건인 (1) 행위자의 덕스러움에 대한 인식, (2) 행위 자체에 따른 행위자의 자발적인 선택, (3) 행위자의 확고하고 부동의 상태와 스토아 윤리학에서 옳은 행위의 조건을 비교한다. 첫째로, 스토아주의자들에게 행위자의 덕스러움에 대한 인식은 자연의 운행 원리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을 수반한다. 둘째로, 스토아주의자들에게도 옳은 행위는 올바른 의도나 지향성을 갖는 행위이다. 셋째로, 옳은 행위는 이성에 의한 냉철한 판단을 필요로 한다. 이에 더해, 이창대는 스토아주의자들에게 어떤 행위가 올바르기 위해서는 (4) 행위자의 우주 전체의 법칙에 대한 이해, (5) 구체적인 상황에 대한 숙고된 판단, (6) 주어진 상황에 대한 실재로의 환원이 추가되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그렇다면,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요구되었으나, 해결되지 못했던 과제인 ‘지적 덕의 취득의 해명’은 스토아 체계에서는 ‘올바른 행위의 발생 과정의 해명’으로 전환된다. 앞서 언급하였듯, 키케로의 『최고선악론』은 이 과제의 해결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해 준다.
키케로의 『최고선악론』 3권은 인간이 갓 태어난 이후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의 개체화 과정에 대한 스토아주의자들의 이론을 상세히 보고하고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카토는 동물이나 사람은 자신의 구성상태와 그것을 보존해 주는 것들을 사랑하고자 하는 충동을 갖는다고 말한다. 그런데, 자기 자신에 대한 지각이나 사랑 없이는 그런 충동이 생겨날 수 없다. 따라서, 카토는 스토아 윤리학의 출발점으로 자기애의 원리를 설정한다. 그런데, 자기애의 원리에 쾌락을 놓아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쓸모가 같다면 보잘것없거나 기형적인 것보다는 딱 맞고 멀쩡한 것을 선호하는데, 최초의 충동이 쾌락을 향한다면 많은 추한 것들이 뒤따라올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 우리는 인식(cognitio)은 그 자체로 우리 것이 되기를 바란다.
스토아 체계에서 최초의 가치 척도는 자연에 따르는 정도에 따른다. 즉, 자연에 따르는 것은 그 자체로 선택되어야 하고, 자연에 반대되는 것은 그 자체로 거부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선 우리를 자연 상태로 보존해야 하며, 다음으로 자연에 따르는 것들을 선택해야 한다는 의무를 갖는다. 우리가 의무에 따라 선택한다면, 우리는 자연에 따르는 것들에 친숙하게 되며, 이해(intelligentia)를 얻고, 마지막으로 사물이 운행되는 조화(concordia)를 인식하게 된다. 우리가 자연의 조화를 인식하게 된다면, 우리는 최고선을 거기에 놓게 되고, 따라서 항상적으로 덕스러운 행동을 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스토아 철학 체계에서는 우리 자신의 상태를 보존하고자 하는 최초의 동물적 충동으로부터 자연에 따르는 것을 선택하고자 하는 의무, 의무를 따르는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자연과의 친숙화, 자연에 대한 이해를 거쳐 사물이 운행되는 조화에 이르는 심리적 과정이 해명된다. 이로부터 적합한 행위는 올바른 행위로 나아갈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되며, 따라서 인간은 누구나 적절한 선택과 노력을 통해 덕스러워질 수 있게 된다.
4. 결론
스토아 철학은 오늘날에도 많은 이들에게 공감을 받고 있다. 이는 많은 스토아 철학자가 여타 고대철학자들에 비해서도 어떻게 좋은 삶을 살 것인지에 대한 고민을 하였고, 우리에게 좋은 삶을 살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스토아 철학의 흥미로운 점은 논리학 – 자연학 – 윤리학이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이 그 영역이 명확히 구분되는 분과 학문을 이루지 않고, 단일한 철학 체계를 지탱하였다는 점에 있다. 그러므로, 더 나은 삶을 살고 더 나은 주체가 되기 위한 방법을 고민하고 추구하였던 자들이 한 개인이 더 탁월한 주체가 될 수 있는 자연학적 가능성을 정당화하는 철학 체계를 선호하였다는 점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본고에서 필자는 아리스토텔레스 체계에서 해명되지 않는 지성혼과 관련된 두 가지 문제를 제시하고, 스토아 체계에서 이것들이 어떻게 해명되는지 살펴보고자 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 체계에 비해 스토아 체계가 갖는 이 같은 장점은 스토아 철학자들이 주체화의 문제에 가장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는 점뿐만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체화의 문제에 고대철학자로서는 이례적으로 거의 신경을 쓰지 않았다는 점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즉, 주체화의 문제에 대한 철학자들의 태도가 그들이 정초한 자연학의 특징과도 모종의 상관관계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필자는 스토아주의자들의 자연학이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반작용이었다거나, 스토아주의자들이 의식적으로 본고에서 논의된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하고자 시도하였다는 주장을 개진할 생각은 전혀 없다. 필자는 단지 충분한 논의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는 스토아 영혼론과 자연학을 중심으로 한 분석을 통하여, 스토아 철학 체계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체계가 안고 있는 지성혼과 관련된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사실이 본고를 통해 충분히 밝혀졌다는 점에서 만족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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