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그렇다고 해서 논리실증주의자가 시나 윤리학의 명제들을 전부 제거하자고 주장한 건 아니지 않나요?
논리실증주의 내에서 약간의 세부적 차이는 있지만, 기본적으로 이 입장을 지지하는 철학자들은 시나 윤리학의 명제들을 무의미한 것으로 치부하고 '적극적으로' 제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스티븐 P. 슈워츠는 『분석철학의 역사』에서 논리실증주의의 테제를 이렇게 요약하기도 하죠.
형이상학자, 윤리학자, 미학자, 신학자의 발언들 대부분은 이 기준[검증가능성 유의미성 기준verifiability criterion of meaningfulness]을 충족시키지 못하며, 그래서 무의미하다. 또는 논리 실증주의자들은 그렇다고 주장하였다.
이것은 논리 실증주의 프로그램의 첫 번째 주된 부분이다.
검증가능성 유의미성 기준에 의거한 형이상학, 윤리학, 미학, 신학의 제거
형이상학의 제거는 뻔한 난문제를 남긴다. 만일 형이상학자(윤리학자, 신학자 등)의 발언이 글자 그대로 무의미하다면, 이 "학문 분야들"의 거대 역사는 어떻게 설명될 수 있는가? 우리는 그것들, 즉 무의미한 헛소리의 추구에 대대로 이어져 내려오는 지성들이 바친 헌신적 노력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논리 실증주의자들이 제시한 답은 형이상학자들이 언어에 의해 홀렸다는 것인데, 이 답은 또 다시 『논리철학론』에 기초를 두고 있다.
스티븐 P. 슈워츠, 『분석철학의 역사』, 한상기 옮김, 서광사, 2017, 103-104쪽.
물론, 몇몇 부분에서는 이렇게 단순화하기가 어렵기도 합니다. 가령, 에이어의 경우에는 시와 형이상학을 구분하면서, 시는 의도적으로 창조된 무의미이기 때문에 '사이비 명제'로 구성되었다고 보기 어려운 반면, 형이상학은 의도하지 않은 무의미이기 때문에 비판받아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일반적인 경향을 말하자면, 논리실증주의가 형이상학을 포함하여 시와 윤리학의 명제들까지도 제거하려고 했다고 보아도 큰 문제는 없습니다.
2. '가벼운 사자 나는' 이런 대놓고 이상한 명제들은 해소해야 되나요 말아야 되나요?
비트겐슈타인이 실제로 이런 명제들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기는 합니다.
내가 "내게 설탕을 가져와라!"와 "내게 우유를 가져와라!"라는 명령은 의미를 갖지만 "우유 내게 설탕"이라는 조합은 의미를 갖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낱말들의 이런 조합을 말하는 것이 아무런 효과도 없다는 뜻이 아니다. 그리고 이제 그 효과가 다른 사람이 나를 바라보고 어리둥절해 입을 딱 벌리는 것이라면, 나는 그 때문에 그것을 나를 바라보고 입을 딱 벌리라는 명령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설령 그것이 바로 내가 일으키려고 했던 효과라고 해도 말이다. (『탐구』, 498절)
이 구절이 어떤 함의를 담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해석상 다소 논란이 있을 것입니다. 다만, 비트겐슈타인은 "우유 내게 설탕"이라는 조합처럼 주술 구조를 완전히 무시한 발화조차 어떤 '효과'를 가질 수도 있다는 점에 대해서까지 부정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a) 특정한 효과가 발생했다고 해서 그 발화가 반드시 의미가 있다고 보기는 어렵겠지만, (b) 특정한 효과를 위해 그런 발화를 '사용한' 것이라면 그 발화조차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3. '헛소리' '무의미한 명제' '사이비 명제' 이 셋이 같은 개념인가요?
같은 개념으로 보셔도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물론, 위에서 에이어가 '무의미'와 '사이비 명제'를 구분한 것처럼, 종종 세부적인 맥락에 따라 그 개념들을 구분할 필요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일반적으로는 셋이 모두 동일시됩니다. 특별히, '헛소리(nonsense)'와 '무의미한 명제(nonsensical proposition)'는 우리말 번역상에서만 차이가 있을 뿐, 영어 표현에서는 사실상 동일합니다.
4. 유의미한 명제는 일상의 언어놀이, 즉 삶의 형식 안에서 사용되는 언어
'언어놀이'와 '삶의 형식'이 동일한 개념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습니다. 해커 같은 연구자들은 그 둘을 동일시하지만, 뉴턴 가버나 이승종 교수님 같은 연구자들은 그 둘을 엄격하게 구분합니다. '삶의 형식'은 우리를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아주 넓은 틀이고, 그 삶의 형식 속에서 다양한 '언어게임'들이 이루어진다는 것이죠.
이승종 '삶의 방식', '삶의 양식'은 사회와 문화의 지평에서 발견되는 라이프스타일을 지칭합니다. '삶의 형식'은 그러한 가변적 스타일이 아니라 각 생물들마다 고유한 존재 형식을 지칭합니다. 예컨대 우리는 박쥐의 삶의 형식과 고등어의 삶의 형식이 서로 얼마나 다른지 봅니다. '언어게임'은 사람의 자연사를 이루는 중요한 단위개념이며, '문법'은 언어게임의 규칙에 해당합니다.
윤유석 '삶의 형식'은 생명체 각각의 종에 귀속되는 고유한 것이고, '언어게임'은 그 형식을 채우는 개별적인 내용들이고, 그 언어게임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규칙들이고, 그 '규칙'은 '문법'과 동의어라고 봐도 될까요?
이승종 네
이승종 & 윤유석, 『철학의 길: 대화의 해석학을 향하여』, 세창출판사, 2024, 350-351쪽.
5. youn님이 말할 수 있는 것/없는 것 이분법이 후기 비트겐슈타인에는 유지되지 않지만 여전히 유의미/무의미 이분법은 유지된다고 했을 때 살짝 뇌정지가 왔습니다
전기 비트겐슈타인에게서 '말할 수 있는 것/없는 것'이라는 구분은 소위 '논리적 구문론(logical syntax)'에 따라 성립합니다. 언어에는 단일한 문법이 존재하고, 그 문법이 논리적 구문론이며, 논리적 구문론을 준수하는지 그렇지 않은지에 따라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이 구분된다는 것이죠. (물론, 이런 교과서적 해석에 동의하지 않는 코라 다이아몬드나 제임스 코넌트 같은 인물들도 있습니다.)
후기 비트겐슈타인은 언어가 '논리적 구문론'이라는 단일하고 보편적인 문법을 따른다는 생각을 거부합니다. 그래서 '말할 수 있는 것/말할 수 없는 것'이라는 영역이 확정될 수 있다는 주장은 후기 비트겐슈타인에게서 더 이상 지속되지 않습니다. 어떠한 언어게임에 참여하여 어떠한 문법을 따르는지에 따라, 말할 수 없던 것이 말할 수 있는 것으로 변하기도 하고, 말할 수 있던 것이 말할 수 없는 것으로 변하게 되기도 하니까요.
다만, 후기 비트겐슈타인도 여전히 각각의 언어게임에 각각의 '문법'이 존재한다는 생각 자체는 유지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특정한 언어게임에 참여하고 있는 이상, 그 언어게임의 문법을 위반하는 발화들은 '무의미한' 것으로 비트겐슈타인에게 평가받습니다. 해커가 이 점을 드러내주는 구절들을 어느 논문에서 아주 잘 수집해 두고 있습니다.
-
'When philosophers use a word and enquire after its meaning, one must always ask oneself whether the word, in the language for which it is made, is ever actually so used. One will mostly find that it is not so and that the word is being used contrary to its normal grammar. ("Know", "being", "thing")' (MS 1o9, 246 = TS 211, 405 = TS 212, I192 = TS 213, 430)
-
'Incidentally, the only proof that an analysis is false is that it leads to obvious nonsense, i.e., to an expression that obviously transgresses the grammar that corresponds to the given mode of application' (MS 110o, 23 = TS 211, 132).
-
'What is against the rules is a violation of syntax' (WWK, p. o104).
-
'And let's remember: in ordinary life it never occurs to us [that everything flows] - as little as the blurred boundaries of our visual field.... How, on what occasion, do we think that we become aware of it? Isn't it when we want to form sentences contrary to the grammar of time?' (MS 114, 21v = TS 211, 763 = BT 427).
-
'Just as laws only become interesting when there is an inclination to transgress them // when they are transgressed // certain grammatical rules are only interesting when philosophers wanto transgress them' (BT 426).
See P. M. S. Hacker, "Wittgenstein, Carnap and the New American Wittgensteinians", The Philosophical Quarterly, Vol. 53(210), 2003, pp. 13-14.
6. 만약 무의미 판별을 넘어선 어떤 "제거하는 활동"을 말씀하시는 거라면 전 그게 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voiceright님의 댓글이 틀렸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다소 어조가 강하다고는 생각합니다. '치료', '해소', '제거'가 적극적으로 일어나야 하는 활동인지, 아니면 무의미를 판별하는 것만으로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활동인지는 비트겐슈타인 해석상의 논쟁에 개입해야 하는 주제인 것으로 보입니다.
아마도 논리실증주의와 비트겐슈타인 사이의 연속성을 강조하는 연구자라면, 이런 치유나 해소가 적극적으로 일어나야 하는 활동이라고 볼 것 같습니다. 논리실증주의자들이 형이상학을 '적극적으로' 제거하려고 하였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이런 해석에 근거가 약하다고 보기만은 힘듭니다. 적어도, 비트겐슈타인이 '문법의 위반'이라는 표현을 (심지어 더 나아가 '논리적 구문론의 위반'이라는 표현까지도) 여러 곳에서 명시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것을 고려한다면, 후기 비트겐슈타인도 그런 위반을 단속하려는 성향을 지니고 있었다고 주장하는 연구자들이 있다고 해서 그 해석이 완전히 잘못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해커가 실제로 이렇게 해석하는 경향이 있죠.)
반대로, 그 연속성을 부정하는 연구자라면, 반드시 치료나 해소가 특정한 문법적 틀을 가지고서 언어를 단속하는 활동이라고 보지는 않을 것입니다. voiceright님의 주장대로, 특정한 언어적 표현이 헛소리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그 언어적 표현에 대한 치료는 충분히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약간 다른 맥락이지만, 카벨은 "Must We Mean What We Say?"라는 논문에서 규범성이 반드시 "...해야 한다"라는 당위적 진술로 표현될 필요는 없다고 지적하는데, 바로 이런 맥락에서 "문장 S는 헛소리이다."라는 평서문적 진술만으로도 그 문장 S를 발화하지 말아야 하는 규범을 충분히 표현할 수 있겠죠.)
다만, 제가 보기에, 이 두 입장 사이에서 어떤 것이 더 정당하다고 볼 것인지는 학술적으로 논쟁적인 주제입니다. "비트겐슈타인은 반드시 ...와 같은 방식으로 독해되어야 한다."라거나 "...이 비트겐슈타인에 대한 일반적인 독해 방식이다."라고까지는 말하기 어렵다는 점을 염두에 두시면 좋지 않을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