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분석철학에서 모든 무의미가 치료 대상인가요?

논리실증주의/전기 비트겐슈타인과 일상언어학파/후기 비트겐슈타인은 모두 의미와 무의미를 명료하게 구분하고 무의미를 치료하는 역할을 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들이 '모든' 무의미를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했는지 확신이 서지 않아서 질문드립니다.

(1)논리실증주의자와 전기 비트겐슈타인에게 유의미한 명제는 검증가능한 명제, 다시 말해 분석명제와 경험적으로 관찰 가능한 과학의 명제에 한정되고 나머지는 무의미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논리실증주의자가 시나 윤리학의 명제들을 전부 제거하자고 주장한 건 아니지 않나요? 무의미한 명제가 유의미한 척할 때 치료 대상이 되는 건가요? 그럼 유의미한 척하지 않아도 '가벼운 사자 나는' 이런 대놓고 이상한 명제들은 해소해야 되나요 말아야 되나요? 가령 논고에 나오는 '헛소리' '무의미한 명제' '사이비 명제' 이 셋이 같은 개념인가요? 어떤 무의미가 해소 대상이라면 그 기준이 어떻게 될까요?

(2)일상언어학파와 후기 비트겐슈타인에게 유의미한 명제는 일상의 언어놀이, 즉 삶의 형식 안에서 사용되는 언어이고 나머지는 무의미합니다. 동시에 후기 비트겐슈타인은 질병을 일으키는 철학적 문제들을 해소 대상으로 간주합니다. 여기에서 '무의미한 명제'와 '질병을 일으키는 철학적 문제'가 외연이 같은 개념인가요? 철학적 질병을 일으키지 않는데(다시 말해 치료 대상은 아닌) 무의미한 명제는 가능한가요?

이렇게 써놓고 보니 어떤 명제를 치료, 즉 침묵의 대상으로 간주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그 명제가 무의미한 것을 넘어서 추가 조건이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런데 그 기준이 뭔지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모든 무의미한 말들이 정말 다 침묵의 대상이 된다고 봐야 할까요?

+) 분석철학과 비트겐슈타인을 공부하다 보니까 '헛소리' '사이비 명제' '무의미한 명제' '말할 수 없는 것' '철학적 질병' 뭐 이런 용어들이 명확히 정의되지 않고 제 머릿속에서 그냥 뭐 대충 다 똑같은 나쁜 애들 정도로 이해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가령 저번에 youn님이 말할 수 있는 것/없는 것 이분법이 후기 비트겐슈타인에는 유지되지 않지만 여전히 유의미/무의미 이분법은 유지된다고 했을 때 살짝 뇌정지가 왔습니다) 공부하면 할수록 파리통에 빠지는 기분입니다ㅜㅜ

3개의 좋아요

'무의미(한 명제)를 치료한다/해소한다'가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추측컨대 이를 '무의미를 제거한다'와 같은 뜻으로 사용하시는 듯합니다. 근데 무의미를 제거한다는 게 뭔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말씀하신대로 우리는 유의미/무의미를 판별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발화를 무의미한 것으로 판명할 수 있습니다. 무의미한 발화를 무의미한 것으로 판명하기만 하면, 발화의 무의미함 및 발화자의 비합리성(특히, 발화가 무의미한지 몰랐던 경우)이 드러나게 되니, 충분하지 않나요? 만약 무의미 판별을 넘어선 어떤 "제거하는 활동"을 말씀하시는 거라면 전 그게 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명제들을 제거한다는 게 뭔가요? 그런 명제의 형성을 법적으로 금지하고 만약 이를 위반한다면 처벌하거나 언어 공동체에서 추방하자 뭐 이런 말은 아닐 거라 생각합니다. (농담입니다.)

침묵하라는 명령이 크게 중요한지는 모르겠습니다. 만약 헛소리인 것이 명확하게 드러나서 그 사실을 스스로 알게 되었다고 하면, 그런 헛소리를 굳이 말하고 싶으려나요? 어떤 행위가 비도덕적임을 보이는 작업과 나쁜 짓 하지 말고 살아라는 명령 사이의 관계와 비슷해 보입니다. Why be rational, why be moral 같은 것이 쓸데없는 물음은 아닐 수 있으나, 최소한 요지가 다른 물음이기는 해 보입니다.

이들에게 관건은, 어떤 무의미한 발화는 겉보기에 유의미해 보인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그 겉보기-유의미한 발화가 실은 아무 의미가 없는 헛소리임을 드러내 보이는 것이 이들 작업의 목표인 것입니다. 겉과 속이 모두 무의미한 그런 명제들은 굳이 작업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어차피 다들 헛소리인 걸 알잖아요.

철학적 명제들은 겉보기에는 유의미한 발화들입니다. 겉보기부터 무의미했으면 지금껏 그 많은 사람들이 이 판에 뛰어들진 않았겠지요. 철학적 명제들이 실제로는 무의미하다고 판명하는 것이 이들의 과제가 되는 것입니다.

치료의 대상은 질병입니다.
즉각적으로 떠오르는 해설은 이런 겁니다. 무의미한줄도 모르고 헛소리를 쏟아내는 것이 질병이니, 헛소리를 그만하도록, 혹은 최소한 헛소리를 할 거라면 그게 무의미한 줄은 알고서 하도록 하는 것이 치료일 것입니다.

물론 이것도 맞는 설명이지만, 한 가지 측면밖에 보여주지 못하는 설명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측면에서, 철학적 문제에 시달리는 것이 곧 질병입니다. 여기서 사람들이 시달리는 철학적 문제란 것은, 어떤 것이 무엇인지 모르겠다는 혼란과, 있는 줄 알았던/있어어 하는 것 같은 어떤 것이 실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우울입니다. 예컨대 소크라테스나 아우구스티누스가 보여주듯이, 우리는 경건이나 시간이 무엇인지 아는 줄 알았는데, 탐구를 시작하면 실제로는 그게 뭔지 전혀 모른다는 철학적 문제에 도달합니다. 또 다른 예로, 우리는 자연스럽게 원인과 결과에 대해서 말하고, 일견 과학은 인과법칙이 성립해야만 그 타당성을 갖는 것 같은데, 흄에 따르면 인과법칙이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이런 철학적 문제들에 대해서, 명쾌한 답을 제시할 수 있다면 그런 문제들은 해결됩니다. 그러나 그런 방법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문제들이 혼란해 하거나 우울해할 일이 아님을 보이는 것, 문제로 보였던 것들이 문제되지 않음을 깨닫는 것, 길 잃음의 상태에서 벗어나 돌아올 길을 아는 것, 이것이 문제의 해소이자 질병의 치유이고, 비트겐슈타인이 가려던 길이자 이르려던 곳입니다.

13개의 좋아요

비트겐슈타인을 존경하는 입장에서 voiceright님 글을 흥미롭게 잘 읽고있습니다. ^^

1. 그렇다고 해서 논리실증주의자가 시나 윤리학의 명제들을 전부 제거하자고 주장한 건 아니지 않나요?

논리실증주의 내에서 약간의 세부적 차이는 있지만, 기본적으로 이 입장을 지지하는 철학자들은 시나 윤리학의 명제들을 무의미한 것으로 치부하고 '적극적으로' 제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스티븐 P. 슈워츠는 『분석철학의 역사』에서 논리실증주의의 테제를 이렇게 요약하기도 하죠.

형이상학자, 윤리학자, 미학자, 신학자의 발언들 대부분은 이 기준[검증가능성 유의미성 기준verifiability criterion of meaningfulness]을 충족시키지 못하며, 그래서 무의미하다. 또는 논리 실증주의자들은 그렇다고 주장하였다.

이것은 논리 실증주의 프로그램의 첫 번째 주된 부분이다.

검증가능성 유의미성 기준에 의거한 형이상학, 윤리학, 미학, 신학의 제거

형이상학의 제거는 뻔한 난문제를 남긴다. 만일 형이상학자(윤리학자, 신학자 등)의 발언이 글자 그대로 무의미하다면, 이 "학문 분야들"의 거대 역사는 어떻게 설명될 수 있는가? 우리는 그것들, 즉 무의미한 헛소리의 추구에 대대로 이어져 내려오는 지성들이 바친 헌신적 노력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논리 실증주의자들이 제시한 답은 형이상학자들이 언어에 의해 홀렸다는 것인데, 이 답은 또 다시 『논리철학론』에 기초를 두고 있다.

스티븐 P. 슈워츠, 『분석철학의 역사』, 한상기 옮김, 서광사, 2017, 103-104쪽.

물론, 몇몇 부분에서는 이렇게 단순화하기가 어렵기도 합니다. 가령, 에이어의 경우에는 시와 형이상학을 구분하면서, 시는 의도적으로 창조된 무의미이기 때문에 '사이비 명제'로 구성되었다고 보기 어려운 반면, 형이상학은 의도하지 않은 무의미이기 때문에 비판받아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일반적인 경향을 말하자면, 논리실증주의가 형이상학을 포함하여 시와 윤리학의 명제들까지도 제거하려고 했다고 보아도 큰 문제는 없습니다.

2. '가벼운 사자 나는' 이런 대놓고 이상한 명제들은 해소해야 되나요 말아야 되나요?

비트겐슈타인이 실제로 이런 명제들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기는 합니다.

내가 "내게 설탕을 가져와라!"와 "내게 우유를 가져와라!"라는 명령은 의미를 갖지만 "우유 내게 설탕"이라는 조합은 의미를 갖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낱말들의 이런 조합을 말하는 것이 아무런 효과도 없다는 뜻이 아니다. 그리고 이제 그 효과가 다른 사람이 나를 바라보고 어리둥절해 입을 딱 벌리는 것이라면, 나는 그 때문에 그것을 나를 바라보고 입을 딱 벌리라는 명령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설령 그것이 바로 내가 일으키려고 했던 효과라고 해도 말이다. (『탐구』, 498절)

이 구절이 어떤 함의를 담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해석상 다소 논란이 있을 것입니다. 다만, 비트겐슈타인은 "우유 내게 설탕"이라는 조합처럼 주술 구조를 완전히 무시한 발화조차 어떤 '효과'를 가질 수도 있다는 점에 대해서까지 부정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a) 특정한 효과가 발생했다고 해서 그 발화가 반드시 의미가 있다고 보기는 어렵겠지만, (b) 특정한 효과를 위해 그런 발화를 '사용한' 것이라면 그 발화조차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3. '헛소리' '무의미한 명제' '사이비 명제' 이 셋이 같은 개념인가요?

같은 개념으로 보셔도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물론, 위에서 에이어가 '무의미'와 '사이비 명제'를 구분한 것처럼, 종종 세부적인 맥락에 따라 그 개념들을 구분할 필요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일반적으로는 셋이 모두 동일시됩니다. 특별히, '헛소리(nonsense)'와 '무의미한 명제(nonsensical proposition)'는 우리말 번역상에서만 차이가 있을 뿐, 영어 표현에서는 사실상 동일합니다.

4. 유의미한 명제는 일상의 언어놀이, 즉 삶의 형식 안에서 사용되는 언어

'언어놀이'와 '삶의 형식'이 동일한 개념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습니다. 해커 같은 연구자들은 그 둘을 동일시하지만, 뉴턴 가버나 이승종 교수님 같은 연구자들은 그 둘을 엄격하게 구분합니다. '삶의 형식'은 우리를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아주 넓은 틀이고, 그 삶의 형식 속에서 다양한 '언어게임'들이 이루어진다는 것이죠.

이승종 '삶의 방식', '삶의 양식'은 사회와 문화의 지평에서 발견되는 라이프스타일을 지칭합니다. '삶의 형식'은 그러한 가변적 스타일이 아니라 각 생물들마다 고유한 존재 형식을 지칭합니다. 예컨대 우리는 박쥐의 삶의 형식과 고등어의 삶의 형식이 서로 얼마나 다른지 봅니다. '언어게임'은 사람의 자연사를 이루는 중요한 단위개념이며, '문법'은 언어게임의 규칙에 해당합니다.

윤유석 '삶의 형식'은 생명체 각각의 종에 귀속되는 고유한 것이고, '언어게임'은 그 형식을 채우는 개별적인 내용들이고, 그 언어게임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규칙들이고, 그 '규칙'은 '문법'과 동의어라고 봐도 될까요?

이승종

이승종 & 윤유석, 『철학의 길: 대화의 해석학을 향하여』, 세창출판사, 2024, 350-351쪽.

5. youn님이 말할 수 있는 것/없는 것 이분법이 후기 비트겐슈타인에는 유지되지 않지만 여전히 유의미/무의미 이분법은 유지된다고 했을 때 살짝 뇌정지가 왔습니다

전기 비트겐슈타인에게서 '말할 수 있는 것/없는 것'이라는 구분은 소위 '논리적 구문론(logical syntax)'에 따라 성립합니다. 언어에는 단일한 문법이 존재하고, 그 문법이 논리적 구문론이며, 논리적 구문론을 준수하는지 그렇지 않은지에 따라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이 구분된다는 것이죠. (물론, 이런 교과서적 해석에 동의하지 않는 코라 다이아몬드나 제임스 코넌트 같은 인물들도 있습니다.)

후기 비트겐슈타인은 언어가 '논리적 구문론'이라는 단일하고 보편적인 문법을 따른다는 생각을 거부합니다. 그래서 '말할 수 있는 것/말할 수 없는 것'이라는 영역이 확정될 수 있다는 주장은 후기 비트겐슈타인에게서 더 이상 지속되지 않습니다. 어떠한 언어게임에 참여하여 어떠한 문법을 따르는지에 따라, 말할 수 없던 것이 말할 수 있는 것으로 변하기도 하고, 말할 수 있던 것이 말할 수 없는 것으로 변하게 되기도 하니까요.

다만, 후기 비트겐슈타인도 여전히 각각의 언어게임에 각각의 '문법'이 존재한다는 생각 자체는 유지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특정한 언어게임에 참여하고 있는 이상, 그 언어게임의 문법을 위반하는 발화들은 '무의미한' 것으로 비트겐슈타인에게 평가받습니다. 해커가 이 점을 드러내주는 구절들을 어느 논문에서 아주 잘 수집해 두고 있습니다.

  1. 'When philosophers use a word and enquire after its meaning, one must always ask oneself whether the word, in the language for which it is made, is ever actually so used. One will mostly find that it is not so and that the word is being used contrary to its normal grammar. ("Know", "being", "thing")' (MS 1o9, 246 = TS 211, 405 = TS 212, I192 = TS 213, 430)

  2. 'Incidentally, the only proof that an analysis is false is that it leads to obvious nonsense, i.e., to an expression that obviously transgresses the grammar that corresponds to the given mode of application' (MS 110o, 23 = TS 211, 132).

  3. 'What is against the rules is a violation of syntax' (WWK, p. o104).

  4. 'And let's remember: in ordinary life it never occurs to us [that everything flows] - as little as the blurred boundaries of our visual field.... How, on what occasion, do we think that we become aware of it? Isn't it when we want to form sentences contrary to the grammar of time?' (MS 114, 21v = TS 211, 763 = BT 427).

  5. 'Just as laws only become interesting when there is an inclination to transgress them // when they are transgressed // certain grammatical rules are only interesting when philosophers wanto transgress them' (BT 426).

See P. M. S. Hacker, "Wittgenstein, Carnap and the New American Wittgensteinians", The Philosophical Quarterly, Vol. 53(210), 2003, pp. 13-14.

6. 만약 무의미 판별을 넘어선 어떤 "제거하는 활동"을 말씀하시는 거라면 전 그게 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voiceright님의 댓글이 틀렸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다소 어조가 강하다고는 생각합니다. '치료', '해소', '제거'가 적극적으로 일어나야 하는 활동인지, 아니면 무의미를 판별하는 것만으로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활동인지는 비트겐슈타인 해석상의 논쟁에 개입해야 하는 주제인 것으로 보입니다.

아마도 논리실증주의와 비트겐슈타인 사이의 연속성을 강조하는 연구자라면, 이런 치유나 해소가 적극적으로 일어나야 하는 활동이라고 볼 것 같습니다. 논리실증주의자들이 형이상학을 '적극적으로' 제거하려고 하였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이런 해석에 근거가 약하다고 보기만은 힘듭니다. 적어도, 비트겐슈타인이 '문법의 위반'이라는 표현을 (심지어 더 나아가 '논리적 구문론의 위반'이라는 표현까지도) 여러 곳에서 명시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것을 고려한다면, 후기 비트겐슈타인도 그런 위반을 단속하려는 성향을 지니고 있었다고 주장하는 연구자들이 있다고 해서 그 해석이 완전히 잘못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해커가 실제로 이렇게 해석하는 경향이 있죠.)

반대로, 그 연속성을 부정하는 연구자라면, 반드시 치료나 해소가 특정한 문법적 틀을 가지고서 언어를 단속하는 활동이라고 보지는 않을 것입니다. voiceright님의 주장대로, 특정한 언어적 표현이 헛소리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그 언어적 표현에 대한 치료는 충분히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약간 다른 맥락이지만, 카벨은 "Must We Mean What We Say?"라는 논문에서 규범성이 반드시 "...해야 한다"라는 당위적 진술로 표현될 필요는 없다고 지적하는데, 바로 이런 맥락에서 "문장 S는 헛소리이다."라는 평서문적 진술만으로도 그 문장 S를 발화하지 말아야 하는 규범을 충분히 표현할 수 있겠죠.)

다만, 제가 보기에, 이 두 입장 사이에서 어떤 것이 더 정당하다고 볼 것인지는 학술적으로 논쟁적인 주제입니다. "비트겐슈타인은 반드시 ...와 같은 방식으로 독해되어야 한다."라거나 "...이 비트겐슈타인에 대한 일반적인 독해 방식이다."라고까지는 말하기 어렵다는 점을 염두에 두시면 좋지 않을까 합니다.

6개의 좋아요

한 가지 더 사족을 달자면, '치료'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비트겐슈타인을 독해하려는 시도는 사실 연구사적 관점에서 보자면 일반적이지도 않고 그다지 오래되지도 않았습니다. '치료'라는 주제는 비트겐슈타인에 대한 독해에서 핵심 주제로까지는 여겨지지는 않다가, 2000년대 무렵에서야 '새로운 비트겐슈타인'이라는 (역설적이게도, 이제는 '새롭다'고 하기는 다소 어려운) 해석 방식에 대한 논의를 통해 떠오르게 되었죠. 앨리스 크레리가 자신이 편집한 The New Wittgenstein이라는 논문집 서문에서 이 점을 잘 지적하고 있습니다.

This volume contains papers on Wittgenstein which (with one exception which I will mention below) share certain fundamental and—with respect to received views about Wittgenstein’s thought—quite unorthodox assumptions about his conception of the aim of philosophy. This is not to say that the papers form a homogeneous body of work. They are concerned with different periods and regions of his thought, and they diverge from each other to various extents in their emphases and styles, and in the views they attribute to him. Nevertheless, without regard to the period (or periods) of his work with which they are concerned, they agree in suggesting that Wittgenstein’s primary aim in philosophy is—to use a word he himself employs in characterizing his later philosophical procedures—a therapeutic one. These papers have in common an understanding of Wittgenstein as aspiring, not to advance metaphysical theories, but rather to help us work ourselves out of confusions we become entangled in when philosophizing. More specifically, they agree in representing him as tracing the sources of our philosophical confusions to our tendency, in the midst of philosophizing, to think that we need to survey language from an external point of view. They invite us to understand him as wishing to get us to see that our need to grasp the essence of thought and language will be met—not, as we are inclined to think in philosophy, by metaphysical theories expounded from such a point of view, but—by attention to our everyday forms of expression and to the world those forms of expression serve to reveal.

Alice Crary, "Introduction", The New Wittgenstein, A. Crary and R. Read(eds.), London and New York: Routledge, 2000, p. 1 my emphasis.

그래서 비트겐슈타인을 해석하기 위해서는 고려해야 하는 연구사적 맥락이 굉장히 많습니다. 즉, 해커로 대표되는 교과서적인 비트겐슈타인 해석과 '치료'라는 관점을 강조하는 새로운 비트겐슈타인 해석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정당하다고 볼 것인지를 우선 생각해 보아야 하겠죠. 또 소위 '새로운 비트겐슈타인' 해석에서도 카벨, 맥도웰, 핀켈슈타인, 다이아몬드, 코넌트, 퍼트남 같은 개별 인물들이 지니고 있는 공통점과 차이점에 대해서도 따져보아야 할 것이고요. 사실, 말이 좋아 '새로운 비트겐슈타인'이지, 해당 논문집에 수록된 글들조차도 서로 동화되기 어려운 아주 상이한 관점들을 제시합니다. 당연히, 비트겐슈타인 철학의 맥락에서 '치료'나 '해소'가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도 완전히 합의된 견해가 있다고 보기도 어렵죠.

8개의 좋아요

두 분 다 답변 달아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비트겐슈타인에 관해서 애매했던 부분이 거의 말끔하게 정리가 되었어요.
하지만 아직 해소되지 않은 부분이 있어 추가적으로 질문드립니다.

  1. 논리실증주의가 무의미를 판별하는 것을 넘어서 '적극적으로' 제거하고자 했다면, 검증 원리나 <논리철학논고>와 같은 논리실증주의자 자신의 문장에 대해서는 어떤 입장을 가져야 할지 궁금합니다. 가령 검증 원리 자체는 분석명제도 아니고 경험적으로 검증할 수도 없으므로 무의미할 텐데, 무의미=제거라면 자신은 발화하면 안 되는 것을 발화한 셈이잖아요. 오히려 '내 명제는 무의미한데, 그래도 ~~한다는 점에서 이상한 형이상학적 명제랑 달리 좀 남겨둬도 됨.' 이렇게 변호해야 하지 않을까요?

  2. 유의미/무의미 구분에 대해, 후기 비트겐슈타인에게는 각각의 언어게임에 각각의 문법이 존재하고 그것들을 위반하면 무의미하다고 평가받는다고 말씀해주셨습니다. 그렇다면 A라는 문법을 가진 언어놀이에서 무의미한 문장이 B라는 문법을 가진 언어놀이에서는 유의미할수도 있는 걸까요? 그렇다면 유의미/무의미 구분은 언어놀이에 상대적인 것이 됩니다. 만일 이게 맞다면 비트겐슈타인이 말하는 '무의미의 치료' '철학적 질병의 치료'도 언어놀이에 상대적이라고 이해할 수 있나요? 가령 A라는 언어놀이에서는 철학적 질병이었던 문장이 B라는 언어놀이에서는 아닐 수도 있는 거죠. 그렇다면 철학적 질병을 치료하겠다는 비트겐슈타인의 선언도 비트겐슈타인 자신이 속한 특정 언어놀이 하에서만 유효한 개념이고, 다른 언어놀이로 가면 반대로 <탐구>의 문장들이 철학적 질병이 될 수도 있는 걸까요?

  3. 새로운 비트겐슈타인 진영이 잘 이해가 안 갑니다. 제 얕은 지식으로는 논리실증주의와 전기 비트겐슈타인은 비슷한데, 비트겐슈타인은 논리실증주의와 달리 '말할 수 없는데 보여질 수 있는 신비한 것'을 상정하였다는 점에서 구분된다고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YOUN님의 블로그를 보니까 새로운 비트겐슈타인 진영은 '말할 수 없는데 보여질 수 있는 것'을 상정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새로운 비트겐슈타인은 그냥 전기 비트겐슈타인을 논리실증주의로 읽는 거 아닌가요?

질문이 멍청해 보여도 양해 부탁드립니다ㅜㅜ

1개의 좋아요

(1) "진술의 의미는 전적으로 그것이 가능한 경험에 대해 만드는 예측에 있다."라고 검증원리를 요약할 경우, 역설적이게도 이러한 검증원리의 명제는 검증원리 자신의 조건을 만족시키지 못하게 됩니다. 이 점이 논리실증주의에 대한 유명한 반박 중 하나입니다.

피터 반 인와겐(P. van Inwagen)은 논리실증주의의 검증원리가 바로 이 점에서 '자기-지칭적으로 비일관적'이라고 "The Nature of Metaphysics"라는 논문에서 지적하기도 합니다. 즉, 논리실증주의는 모든 명제가 분석/종합 이분법에 따라 구분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경험적으로 검증되는 종합 명제가 실질적인 과학의 명제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정작 논리실증주의 자신의 명제는 분석 명제도 종합 명제도 아니고, 검증될 수도 없는 게 된다는 것이죠.

(2) 약간 논쟁적인 주제이지만,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적 질병을 치료하는 '단일한' 방법을 구상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치료의 방법에 관한 유명한 구절인 『탐구』 133절에서 비트겐슈타인은 "하나의 문제가 아니라 문제들"이 존재한다고 지적하면서 이렇게 말하거든요.

데리다의 표현을 빌리자면, 비트겐슈타인은 일종의 '기생적(parasitic)' 사유를 시도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특정한 철학적 방법이나 사유를 미리 상정해 놓은 상태에서 치료를 한다기보다는, 개별 질병을 발생시키는 이론이나 문제에 밀착하여서, 그 이론이나 문제가 어느 지점에서 꼬여 있는지를 드러내는 방식으로 문제를 치료하려 한 것이라고 저는 해석합니다. 당연히, 문제가 무엇인지에 따라 그 문제를 어떻게 치료해야 하는지 방법도 다를 수밖에 없죠.

가령, "시간이 빠르게 흐른다."라는 말은 일상적 맥락에서는 전혀 무의미한 문장이 아닙니다. 하지만 형이상학자가 이 말을 지나치게 진지하게 받아들여서, 시간이 '흐르기' 위해서는 어떤 조건이 필요한지 고민하는 순간, 그래서 3차원주의 형이상학이나 4차원주의 형이상학의 관점에서 저 말의 의미를 설명하려 하는 순간, (적어도 비트겐슈타인의 관점에서는) 이 말은 무의미한 문장이 될 것입니다. 즉, "시간이 빠르게 흐른다."라는 말이 일상적 맥락에서 사용되는지 형이상학적 맥락에서 사용되는지에 따라, 이 말이 의미가 있는지 없는지가 달라지는 것이죠. 저 말이 그 자체로 문제인 것이 아니라, 저 말이 '특정한' 상황에서 문제를 발생시키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특정한' 상황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에 따라, 저 말이 왜 무의미한 것인지를 드러내는 방식도 달라지겠죠. 다음 내용을 참고해 보시면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이승종 예를 들어 우리는 삶이 얼마나 속절없는지를 표현할 때 "시간이 정말 빨리 흐르는구나!"라고 하죠. 그런데 이 표현을 좀 더 형이상학적으로 끌고 가면 "시간에도 속도라는 게 있구나!"라고 말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시간이 빨리 흐르기 위해서는 시간이라는 실체가 있어야 하고, 이 실체가 점점 속도가 붙어야 한다고 잘못된 생각을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공간도 존재자들이 담길 수 있는 커다랗고 보이지 않는 그릇 같은 실체로 생각해 버릴 수도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시간과 공간을 실체화해서 사유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시간과 공간에 대한 형이상학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형이상학은 우리가 사용하는 시적이고 은유적인 표현에 근거할 뿐입니다. "시간이 정말 빨리 흐르는구나!"라는 표현을 너무 진지하게 생각해서 시간을 실체화하는 사유를 비트겐슈타인은 비판하고 있죠.

이승종 & 윤유석, 『철학의 길: 대화의 해석학을 향하여』, 세창출판사, 2024, 393-394쪽.

물론, '언어게임'은 언어가 유의미하게 사용되는 상황을 가리키는 표현이기 때문에, 이런 무의미의 발생 맥락이나 상황에도 '언어게임'이라는 용어를 적용할 수 있는지 저로서는 다소 망설여지기는 합니다. 하지만 적어도 치료의 방법이 단일하지는 않다는 점은 거의 분명해 보입니다.

(3) 아뇨, '새로운 비트겐슈타인' 진영은 논리실증주의와 비트겐슈타인을 엄격하게 구분하려 합니다. 특별히, '새로운 비트겐슈타인' 진영 중에서도 코라 다이아몬드(C. Diamond)나 제임스 코넌트(J. Conant)처럼 『논고』에 대한 '단호한 독법(resolute reading)'을 옹호하는 진영은 전기 비트겐슈타인과 카르납이 완전히 다른 강조점을 가지고 있다고 해석합니다. 오히려 앤스콤(G. E. M. Anscombe)이나 해커(P. M. S. Hacker)처럼 고전적인 독법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전기 비트겐슈타인과 논리실증주의 사이의 연속성을 강조하죠. 대략 다음과 같이 구분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앤스콤(E. Anscombe) 으로 대표되는 기존 비트겐슈타인 해석자들은 무의미한 문장들 중에서도 (a) 말할 수 없는 진리를 가리켜 보이고 있는 무의미한 문장과 (b) 순전히 철학적 혼동으로 인해 발생한 무의미한 문장이 구분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가령, 『논고』 자신의 문장은 세계에 존립하는 사태를 기술하는 문장이 아니라는 점에서 무의미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의 한계 너머에 있는 ‘말할 수 없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시도라는 점에서 순전히 무의미하지는 않다는 것이다.

다이아몬드(C. Diamond) 로 대표되는 새로운 비트겐슈타인 해석자들은 모든 무의미한 문장이 ‘순전한 무의미’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말할 수 없는 것을 보여주는 무의미한 문장 따위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새로운 비트겐슈타인 진영의 핵심 주장이다. 『논고』 자신의 문장도 순전한 무의미에서 예외가 되지 않는다. 즉, 이러한 해석은 『논고』 가 말할 수 없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 책이 아니라, ‘아이러니’를 통해 철학적 질병을 해소하고자 한 책이라고 이야기한다. 『논고』의 명제들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서 형이상학을 탐구하고자 하는 사람은 『논고』의 끝부분에 이르러 형이상학에 대한 지금까지의 모든 탐구가 사실 무의미하였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하는 상황에 빠지기 때문이다(비트겐슈타인, 2006: 6.54-7 참고). 따라서 『논고』는 말할 수 없는 것을 남겨두어야 한다고 말하는 책이 아니라, 정반대로 말할 수 없는 것 따위는 순전히 무의미할 뿐이라고 말하는 책으로 해석된다.

https://blog.naver.com/1019milk/222496107312?trackingCode=blog_bloghome_searchlist

2개의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