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자신에 집중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저는 사실 하루 중 책을 읽는 시간보다, 혼자 조용한 곳에서 눈을 감고 생각의 시간을 가지는 비중이 더 높은데요, 그러는 중에 떠오른 재미난 질문을 공유해보겠습니다.

집중한다는 것은, 형태가 있든 없든, 보통 무언가를 지시 대상으로 삼습니다.
타인의 발화가 되든, 어떤 사물이 되든, 글자의 의미가 되든지요.

그런데 나 자신에 집중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지시대상이 있을까요? 여기서 '나'는 어떻게 정의내릴 수 있을까요?

한 예시를 들면, 저는 지금 스터디카페에 앉아있지만 뱃속에선 꼬르륵거릴 듯한 느낌이 들곤 합니다.
그러나 꼬르륵거리기를 원하는 제 몸과 달리 꼬르륵거려선 안된다고 명령하는 생각도 공존합니다.
여기서 제 자신에게 집중하겠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될까요?
여러분들의 의견이 궁금합니다 ㅎㅎ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우선 제 자신에게 집중을 하지 못하는게 무엇인지부터 떠올려봤습니다.
그 근거로는 자연적으로 느끼는 불편함을 들겠습니다.
몸과 생각의 부조화에서 저는 불편함을 느낍니다.
소리를 내선 안된다 생각하면서도, 그러고싶다 하더라도 뱃속이 가만히 있어주지는 않으니까요.
여기서 불편함은 제 자신으로부터 나온 것이지만, 소리를 내선 안된다는 것은 과연 제 자신으로부터 나온 것일지 의문이 듭니다.
당위로서 처음부터 자연적으로 있던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그리고 암묵적으로 내재화 규칙이니 말이죠.

그런데 어떻게 보면 그 규칙을 떠올리는 것도 제 자신입니다.
꼬르륵거리려는 것도 제 자신입니다.

여기서 저는 저도모르게 내재화된 규범을 스스로 도출하고 있었음을 발견합니다(그 이유로는 가장 본질적으로 저는 제 이익을 위하기 때문이라 보지만 너무 글이 길어질까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다른 글로 공유해보고자 합니다.). 행동 역시 제 것이죠.

이제 사실은 자연적이었던 제 모습을 인지하고 그동안 몰랐음을 알게 돰으로써 어딘가에 구애받음 없이 자유롭게 선택하고 있게 됩니다.
아까는 부조화였지만 이제는 이것도 내 것 저것도 내 것이기에,
자연스럽게 스스로도 합당하다 납득하며 한 쪽을 행하고 있게 됩니다.

결국, 제 자신이 가장 자유롭고 가장 순수한 상태가 스스로에 집중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그는 불편함 없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상태이며, 나에게 집중하는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들었을 때 특정 무언가를 지칭하려는 것이 아닌, 가장 비워진 상태에서 자신 자체의 총체를 내세우는 것이지 않나 봅니다.

이를 사람들이 표현하는 식으로 말하면 '나를 잘 안다' '자신감 있다' '나를 믿는다' 등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p.s. (1) 그러나 그런 결론만 좇는 것은 그 결론과 자신의 부조화를 인지하지 못하기에 결국 실패한다 봅니다. 인터넷에서 떠도는 명언이나 공부자극 등의 함정이 이것이라 생각합니다.

p.s. (2) 저는 요새 이런 생각에 대한 흥미를 시작으로 플라톤의 대화편을 읽고 있는데요, 아직 서양철학사를 잘 알지 못하여 혹시 제 생각을 발전시킬만한 뒤쪽 철학 분야는 무엇이 있을 지 추천도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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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nny님과 같은 방식의 작업은 넓은 의미에서 '현상학적 기술(phenomenological description)'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각이나 기억이나 상상의 과정에서 일어나는 사태들에 주목하고, 그 사태들을 최대한 온전하게 그려내는 작업을 통해, 우리가 간과하거나 망각하고 있던 진리들을 포착해내고, 그 진리들을 바탕으로 철학을 갱신시키려는 일련의 시도가 현상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후설의 텍스트에서 wanny님이 수행한 것과 비슷한 몇 가지 예시를 들어 보죠.

예를 들어 시작하자. 내 앞에는 어스름한 불빛 아래 이 하얀 종이가 놓여 있다. 나는 이것을 보고 만진다. 여기에 놓여 있는 종이—게다가 이러한 성질들 속에 정확하게 주어진, 이 상대적 불명석함 속에, 이 불완전한 규정성 속에, 이렇게 방향이 정해짐 속에 정확하게 나에게 나타나는 종이—에 관한 완전히 구체적인 체험으로서의 종이를 이렇게 지각하면서 보고 만지는 것, 이것이 사유작용, 즉 의식체험이다. 자신의 객관적 성질들, 공간 속의 연장(延長), 나의 신체라고 일컫는 공간사물에 대한 객관적 위치를 가진 종이 자체는 사유작용이 아니라 사유된 것(cognitum)이며, 지각체험이 아니라 지각된 것이다. […] 하나의 알아차림인 본래적 지각작용 속에서 나는 대상, 예를 들어 종이에 주의를 기울이고, 이것을 여기에 그리고 지금 존재하는 것으로 파악한다. 파악함(Erfassen)은 이끌어내 포착함(Herausfassen)이며, 지각된 모든 것은 경험배경을 갖는다. 이 종이 주변에 책·연필·잉크병이 놓여 있고, 어떤 방식으로 또한 '직관의 장'(場) 속에 지각적으로(perzeptiv) 거기에 '지각되지만', 그러나 종이에 주의를 기울이는 동안 이것들은 또한 2차적 주의를 기울임과 파악함 이외에는 아무런 주의를 기울임도 받지 못한다. 그것들은 나타났지만, 그 자체만으로 정립되지 않았다. 모든 사물지각은 이렇게 배경직관(또는 사람들이 직관작용 속에 이미 주의를 기울였던 것을 받아들일 경우, 배경직시)의 마당(Hof)을 가지며, 이것은 또한 '의식체험', 또는 간단히 말하면, '의식', 더욱 사실상 함께 직시된 대상적 '배경' 속에 놓여 있는 모든 것에 '관한' 의식이다.

에드문트 후설, 『순수현상학과 현상학적 철학의 이념들』, 제1권, 이종훈 옮김, 2009, §35.

여기서 후설은 자기 앞에 놓인 종이를 자신이 어떻게 지각하고 있는지를 기술하면서, 지각이 언제나 특정한 '배경'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포착해냅니다. 특정한 대상에 주목하는 동안에는 그 대상을 둘러싸고 있는 배경이 우리 의식의 뒤편으로 감추어지기 때문에 우리가 평소에는 자주 간과하고는 하지만, 지각은 언제나 '배경'을 바탕으로 이루어진다는 거죠. 그리고 후설의 이런 통찰은 철학적으로 중요한 의의를 지니는 것으로 이후에 드러나게 됩니다. 그동안 많은 철학자들은 '배경'이라는 맥락 없이 대상을 단독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고 가정하고서 자신들의 인식론 체계를 성립시키려 하였던 반면, 후설의 현상학은 그 가정이 지각이 일어나는 방식과는 맞지 않는다는 사실을 지적하였으니까요. 다른 예시도 살펴보죠.

어떤 예를 들어 시작해보자. 줄곧 이 책상을 바라보면서, 이와 동시에 그 책상 주위를 돌아다니면서 여느 때처럼 공간 속에서 나의 위치를 변경하면서, 나는 이 하나의 동일한 책상, 게다가 그 자체로 철저히 변경되지 않고 남아 있는 그 책상의 현존에 관한 생생한 의식을 지속적으로 갖는다. 그러나 책상[에 대한] 지각은 끊임없이 변경되는 것이며, 그것은 변화하는 지각들의 지속성이다. [가령] 나는 눈을 감는다. [그러면] 나의 나머지 감각들은 책상과의 관련 밖에 있다. [그런데] 내가 눈을 뜨면, 나는 다시 지각을 갖는다. 지각[은 무엇인가]? 좀더 정확하게 살펴보자. 어떤 상황 아래에서도 지각은 개별적으로 동일한 것으로 되풀이되지 않는다. 오직 책상만 동일한 것이며, 새로운 지각을 기억과 결부시키는 종합적 의식 속에서 동일한 책상으로 의식된다. 지각된 사물은, 지각되지 않고도, 심지어 잠재적으로 의식되지 않고도(이전에 기술된 비-현실성의 방식으로) 존재할 수 있고, 변경되지 않고도 존재할 수 있다. 그러나 지각 자체는 의식의 끊임없는 흐름 속에서 그것이 있는 그대로 있으며 그 자체가 하나의 끊임없는 흐름이다.

에드문트 후설, 『순수현상학과 현상학적 철학의 이념들』, 제1권, 이종훈 옮김, 2009, §41.

여기서는 책상을 지각하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일이 현상학적으로 기술되고 있습니다. 후설은 (인용한 부분만으로는 아직 분명하게 나타나지 않지만) 책상의 예시를 통해 대상이 '음영(Abschattung)' 지어져 있다고 강조합니다. 우리에게 지각 속에서 주어진 밝은 부분이 있으면, 그 지각 뒤편에 감추어진 어두운 부분이 항상 존재할 수밖에 없고, '지각'이란 밝아짐과 어두어짐이 끊임없이 계속되는 과정에서 대상이 매 순간 새롭게 드러나는 사건이라는 것이죠. 그리고 이런 현상학적 기술도 이후에 철학적으로 중요한 의의를 지니는 것으로 드러납니다. 대상이 언제나 음영지어진 것으로 지각될 수밖에 없다면, 대상을 특정한 시점에서 한 순간에 완벽하게 지각하려는 시도가 가능할 수는 없으니까요. 소위 '신의 관점(God's eye-view)에 서서 대상을 파악하려고 하는 인식론적 시도들에 대한 비판으로 대상의 음영지어짐에 관한 현상학적 기술이 제시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번에는 다른 현상학자들의 예시를 볼까요?

"[…] 우리는 사물이 나타날 때 사실은 처음부터 음향이나 소음과 같은 감각적 요소들의 쇄도함을 인지하는 것이 결코 아니라, 오히려 우리는 굴뚝 속에서 몰아치는 바람 소리를 듣는 것이며, 비행기의 비행 소리를 듣는 것이고, 또 폭스바겐과는 직접적으로 구별되는 벤츠의 운행 소리를 듣는 것이다. 모든 감각적 요소들보다도 사물 그 자체가 오히려 우리에게는 훨씬 가깝다. 우리 집 안에서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듣는 것이지, 결코 음향이나 단순한 소음을 듣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순수한 소음을 듣기 위해서는 사물로부터 떠나 우리의 귀를 사물로부터 떼어놓은 후 추상적으로 들어야 한다."

마르틴 하이데거, 「예술작품의 근원」, 『숲길』, 신상희 옮김, 나남, 2010, 31-32쪽.

하이데거는 귀에 들리는 소리들을 예시로 사용하여 우리가 결코 아무 의미 없는 '순수한 소리 자체' 따위를 들을 수가 없다고 지적합니다. 우리 귀에는 단순한 감각의 파노라마가 들리는 것이 아니라, '굴뚝에서 몰아치는 바람소리', '비행기의 비행 소리', 벤츠의 운행 소리'처럼 특정한 소리가 '…로서'라는 의미화된 구조 속에서 들린다는 것이죠. 그리고 이런 현상학적 기술 역시 대단히 중요한 철학적 의의를 지닙니다. 현상학은 모든 인식이 언제나 이미 특정한 의미로 '해석'되어 있다는 것을 지적함으로써, 우리의 인식이 소위 '감각-자료' 혹은 '소여'에 근거하고 있다고 생각한 고전적 경험주의의 주장을 비판하니까요. 다른 현상학자의 예시를 볼까요?

나는 4시에 피에르와 만날 약속이 되어 있다. 나는 15분 늦게 도착한다. 피에르는 늘 시간을 정확하게 지킨다. 그는 나를 기다려 주었을까? 나는 방 안을 둘러본다. 손님들을 본다. 나는 말한다. '피에르는 없다.' 이곳에는 피에르의 부재에 대한 하나의 직관이 있는 것일까? 아니면 부정은 판단을 기다려야 비로소 개입해 오는 것일까? 얼른 보기에는 여기서 직관을 말하는 것은 이상하게 생각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없는 것(rein)'에 대한 직관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이고, 또 피에르의 부재는 이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 내가 피에르를 찾으러 이 카페에 들어설 때, 이 카페의 모든 대상물은 종합적으로 배경으로서 구성되며, 그 배경 위에 피에르가 나타나야 하는 것으로서(comme devant paraître) 주어진다. 그리고 카페가 이렇게 배경으로 구성되는 것이 최초의 무화(無化, première néantisation)이다. 그 장면의 하나하나의 요소·인물·탁자·의자는 나머지 대상물 전체로 구성된 배경 위에, 스스로 고립시키고 떠오르려 하다가 다시 이 배경의 무차별 속에 빠져서, 그 속에서 희미해져 버린다. 왜냐하면 배경은 덤(par surcroît)으로밖에 보여지지 않는 것이며, 순전히 난외적(欄外的)인 주의의 대상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장 폴 사르트르, 『존재와 무』, 정소정 옮김, 동서문화사, 2009, 56-57쪽.

여기서 사르트르는 카페에 들어가서 부재하는 자신의 친구 피에르를 찾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예시로 사용하여 '무'라는 것이 어떻게 우리에게 출현하는지를 기술합니다. 우리가 카페에서 지각하는 모든 대상들은 '있는 것'들이고, 그런 의미에서 카페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지각은 '존재충실'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런데도 우리는 피에르가 '없다'라는 판단을 내릴 수 있다는 것이 대단히 주목할 만한 일이라는 것이죠. 그리고 사르트르는 이런 '무'에 대한 경험이 지각 주체의 '무화' 작용을 통해 가능하게 된다고 지적합니다. 우리가 특정한 대상에 주목하는 순간, 다른 대상들은 (후설이 이미 잘 기술한 것처럼) 우리 지각의 배경으로 사라지게 되는데, 그렇게 카페 전체가 배경으로 무화되었을 때 비로소 우리는 피에르를 '부재하는' 대상으로서 판단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현상학적 기술 역시 '무'를 둘러싼 오랜 철학적 논쟁과 사유에 대한 한 견해라는 점에서 의의를 지닙니다.

예시들이 보여주는 것처럼, 현상학은 일상의 얼핏 아주 사소하고 단순한 사태들을 기술하는 작업으로부터 출발하여 결국은 중요한 철학적 통찰을 이끌어냅니다. 그리고 이런 통찰이 충분히 누적될 때, 현상학적 기술들은 그 자체만으로 하나의 거대한 철학적 체계로 성립하기도 하죠. 후설, 하이데거, 사르트르 같은 사람들의 글이 모두 이런 식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다만, 이렇게 체계적이고 세련된 형태로 현상학적 기술을 전개하기 위해서는 여러 '훈련'이 필요합니다. 단순히 신변잡기적인 기술을 많이 하는 것을 넘어서, (a) 현상학적 기술을 철저하게 수행하기 위해 '현상학적 환원'이라는 방법을 숙달해야 하고, (b) 자신이 수행한 현상학적 기술이 철학적으로 어떠한 의의를 지닐 수 있는지를 철학사적인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안목도 길러야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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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와.. 방대한 책들의 내용을 쏙쏙 뽑아서 제 글에 맞게 쉽고 깔끔하게 요약해주심에 있어서 경외감이 드네요. 덕분에 지적 호기심이 마구마구 샘솟습니다^_^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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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비슷한 류의 생각을 많이 하고 철학적 텍스트도 찾아봤었는데, 제가 나름대로 내린 결론은, '나' 자신에 집중한다는 것 = '나' 자신이 행하도록 내버려둔다. 인 것 같습니다.
어떤 의미냐면, 등호 뒤의 문장을 보면 행하는 '나'가 있고 내버려두는 '나' 가 있습니다. 즉 '내버려둠을 당하는 나'와 '내버려두는 나' 의 차이를 인지하는게 중요한 것 같습니다. 전자의 '나' 가 완전히 내버려둠을 당할 때, 그때야말로 저는 '온전히 나 자신으로 있다.' '나에게 집중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는 것 같습니다. 의식의 아주 작은 목소리가 들려오는 순간이랄까요? 개인적으로는 무언가 (음악, 수학, 특정 개념과 생각) 에 되게 집중하게 되면 그런 순간들이 많이 생기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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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철학자 오이겐 헤리겔의 <마음을 쏘다, 활>(활쏘기의 선 [Zen in der Kunst dess Bogenschiessens (1948년) 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신칸트학파의 빈델반트에게 배워 리케르트의 지도 하에 하빌리타치온을 쓴 오이겐 헤리겔은 일본유학생들과 플라톤의 저작들을 읽다가, 선Zen 사상에 호기심을 느껴 일본에 철학교수로 가게 된 계기를 바탕으로 활쏘기(궁도)를 시작합니다. 일본에 체류하는 동안 신칸트학파의 일원으로서, <형이상학적 형식>을 발표하고 칼 야스퍼스와 칸트 해석을 두고 논쟁하였고 그 기간에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사상에 연구하는 등 선 사상에 심취하게 됩니다.

이 책에서는 활쏘기라는 방법으로 선에 이르는 과정을 소개하고 있습니다만, 우리 삶에서도 저자와 비슷한 경험을 많이 해볼 수 있습니다. 물아일체나 무아의 경지로 표현되고 있는 그런 것들입니다. 몰입해서 수학문제를 풀었거나 작문을 하였더니 수십분이 지나있던 것, 게임에서 아주 멋진 플레이를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한 것 같이 했던 것 (장례식에 틀어줄 생전 고인의 개쩌는 영상으로 써먹기 부족함이 없는) 등 완벽한 몰입의 상태 말이죠.

활쏘기와 관련해서 볼 때, 그것은 사수와 과녁이 두 개의 대립된 대상이 아니라 하나의 현실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궁사는 자기 앞의 과녁을 맞히는 일 이외에는 자기 자신조차 의식하지 않는다. 이러한 무의식의 상태는 궁사가 자기 자신으로부터 벗어나, 완전히 자유롭고 또 완벽한 기술적 숙련과 혼연일체를 이루고 있을 경우에만 도달할 수 있다. 이 상태는 궁도를 배우는 과정에서 거쳐가는 일련의 발전 단계와는 질적으로 다른 어떤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선이 활쏘기 또는 검도, 꽃꽃이, 다도, 춤, 예술 등 다른 기예와 관계를 맺게 되는 이유를 알 수 있다. 선은 마조도일이 설파했듯이 '일상적 의식'이다. 이 '일상적 의식'은 '피곤하면 잠자고, 배고프면 먹는 것'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반성하고 숙고하고 개념을 만들어내는 순간, 원초적인 무의식의 상태는 사라지고 생각이 떠오른다. 그러면 먹으면서도 먹는 것이 아니고, 잠자면서도 잠자는 것이 아니게 된다. 화살을 쏘았으나 과녁으로 똑바로 날아가지 않고, 과녁 역시 서 있어야 할 그곳에 서 있지 않다. 인간은 사고하는 존재이지만, 계산하고 사고하지 않을 때 위대한 작품을 창조해 낸다. '어린아이다움'은 오랜 세월에 걸친 연습과 자기 망각의 기예를 통해 다시 얻어진다. - 오이겐 헤리겔<마음을 쏘다, 활>

배고플 때 밥을 먹으라는 것 혹은 피곤할 때 잠을 자라는 것이 사람들더러 감각적 욕구와 성향에 쉽사리 탐닉하라는 의미가 아닌 것은 확실합니다. 욕구 충족을 위해서라면 정신의 노력이 반드시 필요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와 반대로 오랜 수행을 쌓아야만 합니다. 그래야만 온몸이 피로해질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마치 자기를 버리는 것처럼 [차를] 마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즉 사람들이 마시는 것인지 아니면 차가 [사람들을] 마시는 것인지 더 이상 알 수 없는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오랜 수행이 선행되어야만 할 것입니다. ˝자아를 완전히 망각하고 상실한 채 마시는 사람은 마실 것과 하나가 되고, 마실 것은 마시는 사람과 하나가 됩니다. 구분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차를 마실 때는 잔을 집는 것부터 잘해야만 할 것입니다. 특별한 정신 상태에 도달해야만 할 것입니다. 그런 상태에서 양손은 마치 잔과 하나인 것처럼 그렇게 잔을 만집니다. 그래서 잔을 놓았을 때도 양손에는 잔의 모양이 남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밥이 사람들을 먹을 때까지 계속 밥을 먹어야만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은 밥을 받아들이기 전에 죽였을 것입니다. ˝나의 자아가 비어 있으면, 모든 사물도 비어 있습니다. 이것은 사물의 종류에 상관없이 만물에 적용됩니다. [...] 여러분이 ‘식사‘라고 부르는 것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단 한 개의 밥알이라도 있는 곳은 도대체 어디입니까?˝ - 한병철, <선불교의 철학>

문득 JYP 박진영 대표가 K팝 스타 심사를 하면서 했던 말이 떠오르네요. 가수가 기타를 의식하면서 치기 시작하면, 제대로 노래할 수 없다. 기타가 한 몸이라고 생각하지 않을거면 그냥 노래만 하는게 낫다. 이런 뉘앙스 였습니다.

나 자신에 집중한다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나 자신임을 의식하지 않는 단계이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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