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버하르트 융엘 "하나님의 존재는 되어감 안에 있다" 제2부 하나님의 대상성 번역

제2부

하나님의 대상성

다음에서 논의될 “하나님의 대상성(Gegenständlich-Sein)”이란 개념은, 앞서 설명된 내용을 바탕으로, 바르트(BARTH)에 따르면 인간 인식 주체가 하나님을 인식 가능한 또는 인식된 객체로 사용할 수 있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대상화(Objektivierung)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점이 분명합니다. 바로 이러한 오해를 방지하는 것이 바르트의 삼위일체 교리의 핵심적인 기능 중 하나였습니다. 삼위일체 교리는 하나님이 자신의 존재의 주체일 뿐만 아니라, 자신의 인식의 주체(Subjekt)이자 인식됨(Erkannt-Sein)과 인식되어지는(Erkannt-Werden) 존재라는 것을 정립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바르트에게 삼위일체 교리는 교의학의 시작점에 위치하며, 좁은 의미에서 하나님의 교리(Gotteslehre)에서도 중심적인 역할을 합니다.

하나님을 인식한다는 것은, 인식하는 주체가 하나님을 진정으로 인식하며, 따라서 하나님이 인식의 주체(Subjekt)라는 사실이 포함되지 않는다면 논의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 인식의 주체가 된다는 점에서, 하나님을 이 인식의 객체(Objekt)로 간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대상성(Gegenständlich-Sein)”에 대한 논의는 필수적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주체이고 하나님이 객체라는 이 논리가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나님의 “대상성(Gegenständlichkeit)”에 대한 논의는 어떻게 신학적으로 정당하고 필수적인 것이며, 단순히 일반적인 인식론적 주장에 불과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바르트(BARTH)가 이 질문에 답하면서 밝힌 것은, 하나님 인식의 문제와 하나님의 대상성 문제가 “이미 하나님의 교리(Lehre von Gott)에 속하며, 이는 하나님의 존재와 활동에 대한 설명 속에서만 결정적으로 다뤄질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우리의 질문은 하나님 인식 속에서 하나님의 대상성 문제를 다루는 것을 포함해야 합니다.

바르트(BARTH)가 “하나님의 대상성(Gegenständlichkeit Gottes)”을 논할 때, 이는 결코 “어떤 형태의 실재론이나 객관주의를 옹호하기 위한” 것이 아님을 분명히 강조해야 합니다. 또한 바르트의 하나님의 대상성에 대한 논의는 고전적 인식론이 제시하는, 인식 주체와 인식 객체의 구분, 의식의 내재성 및 인식 대상의 객관성과 초월성이라는 개념에 기초한 것이 아닙니다.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인간 앞에 신적인 ‘그(Er)’의 객관성으로 나타나는 이는… 인간이 인식할 수 있는 다른 객체들과 동일한 객체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의 대상성(Gegenständlich-Sein)에서 다른 모든 인식론적 객체들과 근본적으로 구별되며, 이러한 대상성은 다른 대상들의 객관성으로부터 정의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그의 대상성에서 다른 인식론적 객체들과 구별되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를 인식하는 인간 주체를 다른 모든 인식 주체의 방식과는 구별되는 주체로 만드십니다. 이는 고전적 인식론을 존재론적으로 수정하려는 N. 하르트만(N. Hartmann)의 시도나, 그 본질로 돌아가 해체하려는 하이데거(M. Heidegger)의 시도에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시도들이 진지하게 받아들여질 필요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시도들이 하나님의 인식을 “모든 다른 인식들과는 전적으로 독특한 사건”으로 이해하려 한다면, 처음부터 “그 범주”를 벗어나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다른 모든 인식들”의 범주를 넘어 하나님의 인식을 논하려는 시도조차도 신학적으로는 무의미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인식과 관련된 “구별(Aussonderung)”은 오직 하나님이 자신을 다른 모든 대상들로부터 분리하여 나타내시는 방식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과정에서 하나님은 자신과 인간 모두를 “구별된 상태(abgesonderten Stand)”로 만드십니다. 여기서 “구별됨(abgesondert)”은 하나님이 다른 대상들처럼 낯설고 고립된 객체로서 특별한 주의를 요구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마치 광야의 어린 왕자처럼). 또한 이는 하나님이 존재 일반과 구별되는 방식으로 특별한 존재론적 주의를 요구한다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구별됨”에서 다른 대상들과의 객체적 관계에 있지 않으며, 존재 일반의 비대상성으로서도 구별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대상성 안에서 “구별”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객체로 삼을 수 있지만, 다른 객체들을 대하는 방식으로 하나님을 대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대상성의 방식은 하나님을 다른 모든 객체들과 구별되게 만듭니다. 그리고 이러한 대상성의 방식은 인간이 하나님 인식의 주체로 되는 유일무이한 방식의 기초가 됩니다.

a) 하나님의 대상성으로서의 계시됨

하나님의 대상성(Gegenständlich-Sein)은 곧 그의 계시됨(Offenbar-Sein)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해석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인식에서 객체가 되십니다. 하나님은 그의 계시에서 자신을 해석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인식에서 객체가 되셨으며, 동시에 인간을 하나님의 인식의 주체로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의 존재가 "객체로 등장함으로써" 그는 먼저 자신의 인식을 위한 주체를 창조하십니다. 따라서 인간은 하나님의 인식의 주체가 되는 것은 오직 그가 주체가 될 때(fit)만 가능합니다. 이는 한편으로, 하나님의 대상성이 인간이 하나님을 대상화(Objektivierung)한 결과가 아니라, 반대로 하나님의 자기해석으로 이루어진 대상성이 인간을 하나님을 인식하는 주체로 만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른 한편으로, 인간이 하나님의 인식의 주체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인식의 사건, 즉 "하나님 인식이 이루어지는 과정(Erkenntnis Gottes in ihrem Vollzuge)"에서만 이루어집니다. 이는 또한 하나님의 "대상성(Gegenständlichkeit)"도 하나의 사건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스스로를 대상으로 만드십니다. 그는 스스로를 대상으로 만드셨기 때문에만 대상이 되십니다. 만약 하나님의 대상성의 사건적 성격이 무시된다면, 하나님은 인식되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 인식의 대상은 "하나님의 현재적 존재(aktuelles Sein Gottes)"이며, 이는 그의 대상성 속에서 현재적 존재로 나타납니다. 여기서 행위(Akt)와 존재(Sein)를 분리하려 한다면, 모든 것이 망가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대상성(Gegenständlich-Sein)과 이에 상응하는 인간의 주체성(Subjekt-Sein)은 하나님의 인식에서 더 정확히 규정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대상성이 그의 계시됨(Offenbar-Sein)이라면, 하나님은 그의 말씀(Wort) 안에서 대상적입니다. 왜냐하면 계시는 바르트(BARTH)에 의해 하나님의 자기해석(Selbstinterpretation)으로 정의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그의 말씀 안에서 대상적이라면, 이는 “하나님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인식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대상성은 하나님이 하나님으로서 표현 가능(sagbar)해졌다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인식은 하나님으로서 표현 가능해진 하나님이 인간에 의해 “바라보고 이해되는” 방식으로 언어로 드러나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으로서 표현 가능해진 상태로 인간의 입에서 언어로 드러나는 이 사건은 곧 신앙(Glaube)입니다.

“말씀(Wort) 안에서 자신을 드러내시는 하나님께 인간이 가지는 긍정적 관계, 곧 하나님이 하나님이시며, 또한 그분이 자신의 하나님이라는 명확한 깨달음 안에서 인간이 마음(Herz)으로 하나님께 '예(Ja)'라고 응답하는 것 – 이것이 신앙(Glaube)입니다... 이 신앙의 사건 안에서 하나님의 인식(Erkenntnis Gottes)이 이루어지며, 이는 신앙의 확신 속에서 '간접적 인식(mittelbare Erkenntnis)'입니다."

하나님을 인식하는 인간의 주체성(Subjekt-Sein)은 곧 신앙(Glaube)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앞서 살펴보았듯이, 주체가 될 수 있도록 만들어질 때(fit)만 하나님의 인식의 주체가 되므로, 신앙은 인간이 하나님을 객관화(Objektivieren)할 수 있는 일반적인 인식 능력(cum assensione cogitare)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신앙은 인간과 하나님의 긍정적 관계로서 하나님 자신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자신의 말씀(Wort) 안에서 인간과 만나신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말씀 안에서 인간 앞에 오십니다. 말씀을 통해 신앙이 하나님으로부터 인간에게 옵니다. 신앙 안에서 인간은 하나님 앞에 섭니다. 따라서, 말씀 안에서 하나님은 인식될 수 있습니다. 말씀을 통해 하나님은 인식될 수 있으며, 이는 하나님이 신앙을 허락하실 때 가능합니다. 신앙 안에서 하나님은 인식됩니다. “인간은 하나님 앞에 섬으로써 하나님을 인식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주체성이 그의 대상성(Gegenständlich-Sein) 안에서도, 그리고 그가 “객체로서 인간 주체와 관계를 맺으실 때”에도 보존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로 인해 unio mystica (신비적 합일) 또는 하나님 인식의 주체와 객체의 동일성은 발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대상성 안에서 “객체화(vergegenständlicht)”되지 않으며, 인간이 하나님과 동일시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대상성 안에서 여전히 deus coram homine (인간 앞의 하나님)으로 남으시며, 인간은 하나님 인식의 주체가 되면서도 여전히 homo coram deo (하나님 앞의 인간)로 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인간은 이러한 대면 관계 속에 머물 때에만, 즉 하나님이 하나님으로 표현 가능(sagbar)해지고, 인간이 표현 가능해진 하나님을 언어로 드러낼 때에만 지속됩니다. 이러한 언어적 사건이 없다면, 이는 침묵의 unio mystica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의 말씀 안에서 자신을 해석하심으로써 하나님과 인간의 지속적인 구별이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인간에게 계시하실 때에도 하나님으로서 인간과 구별됩니다. 신앙은 하나님의 인식으로서 하나님과 인간의 구별을 인정하는 것이며, 이는 하나님이 언어로 드러날 때 이루어집니다. 이런 의미에서 신앙의 인식은 “인간과 그로부터 구별된 하나님과의 연결(Verbindung)”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이 사건 속에서 인간과 구별되시기” 때문입니다.

b) 성례적 현실성으로서의 하나님의 대상성

바르트(BARTH)는 하나님이 그를 인식하는 인간과 구별되심을, 하나님의 대상성이 다른 대상들의 대상성과 구별된다는 것으로 동시에 설명합니다. “우리가 다른 모든 대상을 가지는 방식은, 먼저 우리 자신을 가지는 데에서 비롯됩니다. 우리는 그것들을 우리가 미리 설정한 자신의 존재에 대한 규정으로, 그리고 미리 정해진 자신의 존재 방식 안에서 가집니다.” 이에 반해, 인간이 하나님의 대상성(Gegenständlich-Sein)을 마주하는 입장은 “근본적으로 철회될 수 없는 '나중에 오는(Nachher)’ 입장”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대상성을 마주하는 이 “나중에 오는” 입장은 “은혜의 상태(Stand der Gnade)”입니다. 신앙의 인식으로서의 하나님의 인식은 이 상태에서 이루어지며, 그렇지 않다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대상성이 하나님을 인식하는 인간보다 앞선 은혜로운 “먼저 있음(Vorher)”은, 하나님이 자유롭게 우리를 위해 자신을 대상으로 만드시고, 우리에게 자신을 인식할 수 있도록 하신다는 점에서 다른 모든 대상과 구별됩니다. 이 대상은 (N. 하르트만이 인식 행위를 지칭할 때 사용하는 용어처럼) 자유롭게 자신을 인식할 수 있도록 내어주지 않는 한 파악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대상성은 그의 은혜로운 인식 가능성(gnädige Faßlichkeit)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대상성(Gegenständlich-Sein) 안에서 sub contrario (상반된 형식 아래서)만 인식 가능합니다. 하나님의 계시 속 대상성은 간접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른 대상들의 표징과 외형 아래서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이에 따라, 하나님을 인식하는 인간은 “항상 간접적으로 하나님 앞에 서 있습니다. 그는 직접적으로는 다른 대상, 즉 다른 일반 대상들 중 하나 앞에 서 있습니다. 이 다른 대상의 대상성은 하나님의 대상성을 대리합니다. 이 다른 대상은 하나님이 자신을 인식하게 하시고, 그 안에서 인간이 하나님을 인식하게 하는 매개입니다."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하나님과 구별되는 대상적 실재”의 일부인 다른 대상이 하나님의 대상성을 위한 매개로 사용될 수 있는 이유는, 이 매개적 대상 자체에 있지 않고 하나님이 그것을 사용하시는 데에 있습니다. 하나님에 의해 사용된 대상적 실재의 일부는 “특별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작품(Werk Gottes)”입니다. 이는 단순히 그 존재 자체(그 또한 하나님의 작품입니다!)를 넘어 하나님의 대상성을 증언하고, 따라서 하나님의 인식을 가능하고 필요하게 만드는 데 사용되며, 사용되어야 합니다. 다른 일반 대상들 중 하나로서 하나님의 대상성을 매개하는 이 특별한 대상은 하나님이 특별한 사건 속에서 그것을 하나님의 인식을 위한 매개로 선택하심으로 인해 “특별한” 하나님의 작품이 됩니다. 이 특별한 사건을 통해 “매개를 사용하는 구체적인 상황”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대상화(Vergegenständlichung Gottes)”는 단순히 하나님의 존재를 읽어낼 수 있는 “일종의 계시 지도(Offenbarungsatlas)”가 되는 것을 피할 수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자신의 자유로운 은혜에 따라 살아 있는 주님으로서 그의 행위 안에서 직접 우리에게 말씀하지 않으셨다면 가능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바르트(BARTH)에 따르면, 하나님을 인식하는 인간이 하나님의 대상성을 인식할 수 있는 방식은, 인간을 둘러싼 창조된 실재에서 하나님의 대상성을 증언하는 매개의 대상성 안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따라서, 바르트의 관점에서는 하나님의 본질적 대상성(Gegenständlich-Sein als solchem)과 그의 대상성을 증언하는 창조된 하나님의 대상성(geschöpfliche Gegenständlichkeit Gottes)을 명확히 구분해야 합니다. 바르트는 이 구분을 “1차적 대상성(primäre Gegenständlichkeit)”과 “2차적 대상성(sekundäre Gegenständlichkeit)”이라는 개념적 구별을 통해 표현합니다. 우리는 먼저 바르트가 “1차적 대상성”이라는 용어로 하나님에 대해 무엇을 의미하는지 간략히 살펴본 후, 계시를 통해 우리를 위해 드러나는 하나님의 “2차적 대상성”을 충분히 규명해야 할 것입니다.

바르트(BARTH)에 따르면, 하나님의 “1차적 대상성(primäre Gegenständlichkeit)”을 논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그의 계시 속 대상성 안에서 자신을 인간에게 주님(Herr)으로 계시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바르트에게서 하나님의 주되심(Herr-Sein)이라는 범주가, 하나님의 존재 안에서 근거를 둔 계시의 가능성을 나타내는 표현임을 이미 확인한 바 있습니다. 하나님의 존재에 근거한 이 가능성은 하나님의 존재의 실재로서, 신학적 "귀납적 추론(Rückschluß)"을 통해 드러납니다. 이 과정에서 바르트는 계시 자체에 근거를 둔 존재론적 공리로 다음 원칙을 사용합니다. “실재가 있는 곳에, 그에 상응하는 가능성도 있다.” 바르트는 하나님의 계시 속 대상성을 이해하기 위해, 계시로부터 구별된 하나님의 “1차적 대상성”을 내적 삼위일체적(innertrinitarisch) 존재에서 도출합니다. 바르트는 이 – 그의 사고를 근본적으로 규정하는 – “내적 삼위일체적 추론(innertrinitarischer Rückschluß)”을 계시 인식으로 이해하며, 이를 형이상학적 추측으로 간주하지 않습니다. 이 추론은 하나님이 계시 속에서 인간 앞에 서 계시는 “자기증명(Selbstbeweis)”을 사후적으로 반추하는 과정입니다.

바르트(BARTH)가 이 귀납적 추론 과정에서 하나님의 “1차적 대상성(primäre Gegenständlichkeit)”을 도출한다고 할 때, 이는 하나님이 단순히 주님(Herr)으로서만 우리에게 대상적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주님이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대상적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가능성(Können)은 하나님의 존재에 본질적으로 속한 실재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가능성은,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의 δυν ά μει ὄν (가능태)과 ἐνεργε ίᾳ ὄν (현실태) 사이의 긴장 속에서 미래적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가능성은 그의 능력(Macht)으로서 “한순간에(in einem Nu) 그리고 단 한 번에(ein für allemal)” 참으로 현재적(wirklich gegenwärtig)입니다.

“하나님은 그가 누구신지를 스스로 드러내신 분이다... 하나님의 존재는 그의 본질의 이 전체성(Ganzheit)을 넘어서는 것이 없다.” 이로써 신학적으로 주장되는 것은, 주님(Herr)으로 계시되신 하나님이 참으로 “유일하고 진정한 주님”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되심(Herr-Sein)은 하나님의 “1차적 대상성(primäre Gegenständlichkeit)”에 대한 논의를 필수적으로 만듭니다. 하나님의 “1차적 대상성”은 그의 영광(Herrlichkeit), 그의 “진정한 주권(eigentliche Herrschaft)”이며, 이는 하나님이 “자기 안에서 주님이시며, 자신에게 대면하시고, 자신을 인식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 하나님으로서 스스로 존재하시며, 영원에서 영원까지 계신다는 사실은 그의 “주님으로서의 자기 증명(Selbstbeweis)의 내적 능력(innere Kraft)”입니다. 하나님이 주님으로서 스스로에게 대상적이기 때문에, 그는 그의 “2차적 대상성(sekundäre Gegenständlichkeit)”을 통해 인간에게 자기 증명을 강력하게 이루십니다.

하나님의 내적 삼위일체적 대상성(innertrinitarisches Gegenständlich-Sein)은 하나님이 자신을 인식하시는 사건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은 이 하나님의 인식 사건과 그 진리에 계시를 통해 인간이 참여하도록 하십니다. 이 참여는 하나님의 자기 인식 사건에 의해 가능해지며, 따라서 “하나님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에 근거합니다. 이 사건은 인간이 그것에 참여하는 계시 안에서, 말하자면, 재현(nachgebildet)됩니다: 성부와 성자의 존재 방식 안에서 성령의 존재 방식을 통해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자기 인식, 하나님의 고유하고 근원적인 대상성입니다." 그러나 계시 안에서 이 사건, 즉 하나님의 고유하고 근원적인 대상성이 “재현”되는 방식으로, 인간이 이 사건에 참여하는 것은 간접적입니다. 하나님의 자기 인식에 대한 참여의 간접성은 하나님이 계시에서 우리에게 온전히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단지 부분적으로만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더 높은 질서에서 또 다른 하나님의 계시나 동일한 하나님의 어떤 다른 방식의 계시를 기대해야 한다”는 것도 아닙니다. 바르트(BARTH)에 따르면, 신앙의 인식에는 더 이상 추가될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이 신앙의 인식은 종말론적으로 확증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참여의 간접성은, 하나님이 “그 자신의 대상성과는 다른, 창조된 대상성(geschöpfliche Gegenständlichkeit) 안에서 자신을 인식할 수 있도록 하신다”는 점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sub contraria specie (대립된 형태 아래서) 자신의 작품 안에서 자신을 드러내시는 이 사실은 바르트(BARTH)에 따르면 성례적(sakramental)입니다.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계시는 성례(Sakrament)입니다. 즉, 하나님의 자기 증언이며, 그의 진리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창조된 대상성의 형태 안에서.” 하나님이 자신의 “고유한 대상성(eigentliche Gegenständlichkeit)”을 그의 창조물의 낯선 대상성 안에서 반복하실 때, 하나님의 대상성은 성례적 현실성(sakramentale Wirklichkeit)가 됩니다. 하나님의 대상성이 성례적 현실성이라는 것은 창조물에게 있어 특권입니다. 창조물은 “그의 대상성 안에서 하나님의 대상성 자체를 나타내는 존재(Repräsentant)가 되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성례적 현실성로서 하나님의 대상성은 “창조물에 대한 자신의 영광을 가시적으로 나타내는 것을 스스로 포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그의 성례적 대상성 안에서, 은혜로 창조물을 영광스럽게 하시는 deus revelatus (계시된 하나님)이자 deus absconditus (숨겨진 하나님)이십니다. Deus absconditus는 하나님의 성례적 대상성 안에서, 하나님이 자신을 창조물의 대상성 안에서 드러내시고, 창조물로 하여금 그를 대신해 말하도록 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성례적 대상성은 “그의 창조물 중 하나 혹은 그가 창조한 세계 안의 공간과 시간 속 사건이 그를 대신하여 말하도록 하신다”는 점에 있습니다. 성례적 현실성으로서 하나님의 대상성은, 하나님이 우리가 사는 현실 안에서 이 현실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고 말씀하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례로서 하나님의 대상성이란, 하나님이 세속적으로 자신에 대해 말씀하시며, 인간적으로 우리와 대화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Menschheit Jesu Christi) 자체가... 첫 번째 성례(erste Sakrament)입니다.”

“첫 번째” 성례(erstes Sakrament)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인간적 본성의 존재”는 하나님께서 자신에 대해 말씀하시도록 맡기시고 권한을 부여하신 모든 창조물의 “실재적 근거(Realgrund)이자 본질(Inbegriff)”입니다. 이는 그의 계시의 성례적 현실성에 대한 실재적 근거이자 본질입니다. 예수 인간의 존재로부터 “과거와 미래로 이어지는 성례적 연속성(sakramentale Kontinuität)”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이 성례적 연속성은 오직 예수 인간의 존재에만 근거하며, 이를 통해 다른 창조물들도 “예수 인간을 통한 하나님의 증언”과 함께 창조물로서 하나님의 대상성을 증언하는 역사의 일부가 됩니다. 예수의 인간적 본성(즉, “예수 인간의 존재”)이 gratia unionis (결합의 은혜)이며,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과의 결합을 통해” 하나님의 대상성을 최종적으로 증언했기 때문에, “이 창조물이 하나님과의 결합 속에서 가지는 존재는, 다른 창조물들 또한 그들의 대상성 속에서 하나님의 고유한 대상성에 대해 증언할 수 있고, 이 점에서 예수처럼 하나님의 성전, 도구, 그리고 표징이 될 수 있다는 약속”을 의미합니다. 예수 인간의 성례적 우선성(sakramentale Priorität)은 하나님이 이 인간의 존재 안에서 유일무이하게 대상적이라는 점에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에서 하나님의 대상성이 유일무이하다는 것은 “하나님의 자기 비하(Selbsterniedrigung)와 자기 소외(Selbstentfremdung)”를 의미하며, 이는 “창조물의 완전히 다른 대상성에 의해 그의 대상성이 가려지는 것”을 포함합니다. 하나님이 창조물의 대상성 안에서 성례적으로 대상적이 되는 제한은 창조물에게 하나님의 대상성에 대한 성례적 규정(sakramentale Bestimmtheit)으로서 유익을 제공합니다. 십자가에서 죽어가는 예수 인간의 성례적 대상성 안에서 하나님이 겪으신 극단적인 자기 소외는, 인류에게 하나님의 대상성에 대한 가장 극단적인 성례적 규정으로서 유익을 제공합니다.

성례적 현실성(sakramentale Wirklichkeit)으로서의 창조된 하나님의 대상성(kreatürliches Gegenständlich-Sein)은 하나님이 창조물의 존재 안에서 눈에 보이고 이해될 수 있는 객체(Objekt)가 되게 함으로써 창조물에게 특별한 특권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이 창조된 대상성을 통해 하나님을 인식하는 주체(Subjekt)에게도 특권을 제공합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인식이 이루어질 때, 성례적 현실성이라는 매개를 통한 하나님의 자기 소외(Selbstentfremdung)는 인간에게 유익을 제공합니다. 이것이 바로 언약(Bund)의 사건입니다. “계시는 성례적 현실성의 형태로 이루어지며, 이는 하나님이 특정한 창조된 주체-객체 관계를 자신과 창조물인 인간 사이의 언약 도구로 격상시키고 구별하는 방식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창조 속에서 하나님의 대상적 존재(Gegenständlich-Sein)의 자리로서의 성례적 현실성과, 그 자리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계시적 존재(Offenbar-Sein), 성례적 현실성으로서의 창조와, 이를 구성하는 하나님의 계시로서의 언약, 자연(Natur)으로서의 성례적 현실성과, 그 실재를 성례로 만드는 하나님의 은혜(Gnade)의 현존을 구분해야 합니다.

창조(Schöpfung)와 언약(Bund), 자연(Natur)과 은혜(Gnade), 성례적 매개(sakramentales Mittel)와 계시(Offenbarung)는 본질적으로 동일하지 않기 때문에, “창조가 언약을 가리거나, 자연이 은혜를 탈취하거나, 성례적 매개 자체가 계시임을 주장하여 결국 하나님의 인식이 이루어지지 않을 가능성”이 존재합니다. “이 형태가 주어진 상태에서 반드시 일어나야 할 일이 정작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가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자신을 성례적으로 대상화(sakramental gegenständlich)하실 때 하나님이 감수하시는 위험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성례적으로 대상화하실 때, 그는 다음과 같은 의미에서 성례적으로 대상화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당신(Er)이자 너(Du)로서 드러나시지만, 동시에 나는(Ich) 하나님으로서 그의 존재와 본질 속에서 여전히 숨겨진(verborgen) 분으로 남아 계십니다.” 하나님의 숨겨지심(Verborgenheit)은 창조물의 특권에 상응하는 하나님의 자기 제한(Verzicht)입니다. 하나님의 자기 제한으로서 그의 숨겨지심도 은혜(Gnade)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교제는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성립되고 유지되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숨겨진 분(verborgen)이십니다.”

결론적으로, 바르트(BARTH)에 따르면 성례적 현살성에서 하나님의 대상적 존재(Gegenständlich-Sein)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시간을 주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시는 자신의 시간, 곧 “계시의 시간(Offenbarungszeit)”을 선물로 주십니다. 하나님은 이 계시의 시간을 “성례적 현실성의 매개를 통해”, 즉 “우리의 시간 한가운데에서” 주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우리가 자신의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우리의 시간을 허락하시며,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을 위한 시간을 가질 수 있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대상적 존재가 창조물의 대상성 안에서 우리의 시간을 허락하신다는 것은, 하나님의 대상적 존재가 “반복(Wiederholung) 속에서” 인식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인식되어야 할 진리는 전체적으로 “시간적이며, 따라서 반복을 필요로 하는 진리”입니다. 진리의 반복 필요성을 부정하는 것은 그 시간성과 하나님의 대상적 존재의 성례적 매개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시간적으로 대상적이십니다. 즉, “그의 유일한 계시의 늘 새로운 형태들 안에서”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하시며, 우리보다 앞서 걸으십니다.” 따라서 “하나님 앞에서 진리 안에 서 있는 우리의 모습은 곧 하나님 앞에서의 걸음(Wandeln vor ihm)”이 됩니다.

c) 인간학적 실존으로서 하나님의 대상적 존재

하나님의 대상적 존재(Gegenständlich-Sein)가 창조된 대상성 안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우리의 시간을 허락하시며 자신의 시간을 주신다는 것을 의미한다면, 하나님의 대상적 존재는 인간학적 의미를 갖습니다. 하나님의 대상적 존재의 인간학적 의미는, 하나님이 자신의 대상적 존재를 통해 우리의 존재를 자신의 존재와 특정한 관계로 이끌어 간다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 인식의 대상으로 나타나는 곳에서는, 하나님은 인간의 존재를 자신의 존재와의 “사랑과 두려움의 관계”로 이끌어 갑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대상적 존재로 계신다는 것은 인간학적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무엇보다도 사랑할 수 있으며(dürfen), 동시에 무엇보다도 두려워해야(müssen)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대상적 존재 안에서 우리와 함께하시며, 우리에게 자신의 시간을 주십니다. 그는 자신을 사랑받을 가치가 있는 분으로 드러내십니다. 또한 그는 자신이 드러내시는 모습과 다르지 않으시기에 사랑스러우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대상적 존재 안에서 동시에 우리와 함께하시며, 우리에게 우리의 시간을 허락하십니다. 그는 이를 통해 “우리 안에서 그를 사랑할 수 있는 가능성”을 창조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 사랑의 자유를 빚진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허락하신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무엇보다도 사랑할 수 있는 동시에 그를 무엇보다도 두려워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것이 자신이 스스로 얻은 권리가 아니라 그에게 주어진 것임을 알기에, 그는 그를 사랑할 수 없게 되는 것이 자신의 비참하고 두려운 종말을 의미할 수밖에 없는 분으로서 하나님을 두려워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대상적 존재(Gegenständlich-Sein)를 통해 하나님을 모든 것을 초월하여 사랑할 수 있으며(dürfen), 따라서 모든 것을 초월하여 두려워해야(müssen) 하는 분으로 인식할 때, “우리의 존재는 실제로 사랑과 두려움의 관계로 인도됩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대상적 존재 안에서 우리가 그를 단순한 대상으로 객관화하지 않고, 그의 대상적 존재를 구성하는 행위를 존중하도록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자신이 이 행위에 부합하도록, 우리의 전 존재와 우리의 바라봄과 이해 속에서 하나님의 행위에 상응하는 인간적 행위를 이루게 하십니다.” 이 인간적 행위는 신앙(Glauben)이라 불립니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을 모든 것을 초월하여 사랑하고 두려워함으로써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대상적 존재 안에서 우리의 존재와 하나님의 존재 사이의 관계(이 관계는 신앙의 관계로서 하나님의 사랑과 두려움의 관계입니다)를 돌보신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대상적 존재에 인간학적-실존적 의미를 부여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대상적 존재 안에서 인간을 위한 돌보시는 분(für den Menschen Sorgende)으로서, 인간의 존재를 규정하는 하나님의 사랑과 두려움을 보살피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대상적 존재에 대한 모든 정당한 논의는 동시에 인간에 대한 진술이어야 합니다. 이 원리는 하나님의 성례적 대상적 존재에도 적용되며, 바르트(BARTH)가 말한 하나님의 “1차적 대상성(primäre Gegenständlichkeit)”에 대한 진술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이는 교회 교의학(Kirchliche Dogmatik)에서 삼위일체적 기반을 가진 선택론(Erwählungslehre)과 화해론(Versöhnungslehre)이 이를 분명히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존재(Sein Gottes)를 인간학적 실존(anthropologisches Existential)으로 말하는 방식은 두 가지 반론에 대해 미리 방어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첫 번째 반론은 바르트(BARTH)의 “학파” 내부에서 제기될 수 있는 것으로, 여기서 하나님의 존재가 인간의 실존 안에서 “해소”되거나, “내가 흔들리고 동요하는 근원(Woher meines Umgetriebenseins)”으로 전락할 수 있다는 우려입니다. 이에 대해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가 그의 “2차적(sekundären) 대상성” 안에서 인간학적 실존으로 불리는 이유는, 우리가 이 대상성을 하나님이 자신을 대상화하시면서 동시에 인간의 실존을 하나님의 사랑(Gottesliebe)과 하나님의 두려움(Gottesfurcht)으로 이끄시고 이를 돌보시는 분으로 이해하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대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존재 자체는 인간학적 실존이 아닙니다. 그러나 인간의 실존은 이러한 실존에 의해 구성됩니다. 이는 인간의 실존이 extra nos (우리 밖에서) 구성되었으며, 이 구성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두려움의 행위 안에서 nos extra nos esse (우리 자신을 넘어서는 존재)가 되도록 운명지어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에서 이제 다른 반론이 등장합니다. 이는 불트만(BULTMANN) 학파에서 제기될 수 있는 반론입니다. 실존(Existentiale)은 본래 존재론적으로 중립적인 구조를 표현하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Gottesliebe)과 하나님의 두려움(Gottesfurcht)은 기독교적 실존의 특정한 행위로, 인간 실존의 존재론적-실존적 실현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두려움을 인간학적 실존이라고 부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대상적 존재(Gegenständlich-Sein)를, 하나님의 사랑과 두려움을 돌보시는 존재(Sein des für Gottesfurcht und Gottesliebe Sorgenden)로 규정했습니다. 그러나 이 규정에 대해서도 반론이 더욱 강하게 제기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하나님의 사랑과 두려움을 돌보시는 하나님은 이러한 사랑과 두려움의 사건 안에서만 파악될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존재를 인간학적 실존으로 말하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주장입니다. 이에 대해 우리는,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랑과 두려움을 돌보시는 분일 뿐 아니라, 인간 실존을 구성적으로 규정하시는 분이라고 말해야 합니다. 비록 인간 실존이 하나님의 사랑과 두려움의 행위로 실현되지 않더라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두려움은, 인간 실존이 하나님의 사랑과 두려움을 돌보시는 하나님의 존재에 의해 구성되기 때문에, 그리고 그만큼만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두려움이 결여된 것은 항상 부정된 하나님의 사랑과 두려움이며, 이는 곧 죄(Sünde)입니다. 죄는 하나님의 사랑과 두려움을 돌보시는 하나님의 대상적 존재 앞에서는 불가능한 가능성(unmögliche Möglichkeit)입니다. 그러나 인간 실존이 하나님의 사랑과 두려움으로 규정된다는 사실로 인해 죄는 불가능한 가능성이 됩니다. 루터(LUTHER)의 말, “네가 네 마음을 두고 의지하는 것이 곧 네 하나님이다”는 긍정적 측면과 부정적 측면에서 모두 적용됩니다. 이는 “참된 하나님”이 인간 실존의 하나님의 사랑과 두려움을 돌보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인간 실존이 어떤 것에 마음을 두는 행위(ponere seipsum extra se)에 의해 규정된다는 점에서, 인간 실존은 항상 하나님의 대상적 존재에 의해 구성되어 왔습니다. 무신론(Atheismus)과 허무주의(Nihilismus)는 신학적 판단에서, 믿음과 마찬가지로 존재론적으로 하나님의 대상적 존재에 의해 가능해졌습니다. 그러나 이는 믿음과 달리 처음부터 배제되고, 하나님에 의해 부정된 불가능한 가능성으로 존재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대상적 존재를 인간학적 실존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이 용어 자체는 포기할 수 있습니다. 단, 이 용어와 함께 그 실체까지 포기하는 일이 없을 때에만 가능합니다. 그 실체에는, 하나님의 언약(Bund)이 그의 창조의 내적 근거라는 점에 대한 합의가 포함됩니다.

칼 바르트(Karl Barth)와 루돌프 불트만(Rudolf Bultmann)의 신학적 차이는 바르트가 자신의 신학적 진술에서 계시와 관련된 인간학적 관계를 추상화하는 반면, 불트만은 신학적 진술을 인간학적 진술로 해체한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이와 같은 설명은 두 신학자의 신학을 피상적으로 분류하는 것에 불과하며, 이로 인해 본질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차이는 오히려 바르트가 하나님의 계시에서의 대상적 존재(Gegenständlich-Sein)를 “2차적 대상성(sekundäre Gegenständlichkeit)”으로 보고, 이를 가능하게 하는 삼위일체적 하나님의 존재에서의 “1차적 대상성(primäre Gegenständlichkeit)”과 구별해야 한다고 믿는 반면, 불트만은 계시의 가능성(하나님 안에서 근거한 가능성)에 대해 질문하는 것을 스스로 금지한다고 보는 데 있습니다. 이해를 위해 필요한 것은, 바르트가 계시의 가능성에 대한 질문을 계시를 초월하여 묻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계시를 근거로 이 질문을 제기할 수밖에 없다고 본다는 점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바르트는 이후 모든 신학적 진술에서도 그것들이 인간학적으로 중요하다는 점을 결코 배제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르트에게 신학적 진술의 인간학적 중요성은 그것들의 진리의 기준이 아닙니다. 바르트에게 신학적 진술의 진리 기준은 모든 신학적 진술에서 계시 주체의 자유가 보존되는 데 있습니다. 반면, 불트만에게 신학적 진술의 인간학적 중요성은 그것들이 진리임을 나타내는 기준일 수 있습니다. 이는 그에게 계시가 항상 종말론적 사건으로서 역사적 “사실(Daß)” 안에서 이루어진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역사적 사실(Daß)”이 종말론적 사건으로 역사적 중요성을 가지는 “역설적 동일성(paradoxe Identität)”이 나타납니다. 불트만은 이 역설적 동일성의 “있다(est)”에 고수하는 반면, 바르트는 하나님의 “1차적”과 “2차적 대상성”의 구분에 따라 하나님이 직접 드러나시더라도, 이는 그의 작품 안에서, 즉 하나님을 가리키는 표징으로서만 나타난다고 봅니다. 바르트에게 예수의 인성 역시 이와 같은 의미에서 성례적 현실성(sakramentale Wirklichkeit), 즉 비유(Gleichnis)입니다. 바르트가 불트만과 궁극적으로 구별되는 점은, 바르트가 루터(Luther)의 성만찬 교리에 대해 제기한 동일한 유보에 있습니다. 즉, 성례적 현실성의 상징에서 하나님의 임재는 하나님과 우리의 현실을 동일시하는 것으로 이어질 수 없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은 객관화될 위험에 처할 것입니다. 따라서 바르트와 불트만이 초기에는 공통적인 의도를 공유했으나, 두 신학자를 분리한 사유의 방식은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칼 바르트와 루돌프 불트만의 신학적 관계 문제는 “유비(Analogie)”와 “역설적 동일성(paradoxe Identität)”의 대립을 통해서만 체계적으로 충분히 제기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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