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철학밈이나 인터넷을 보면 사람들이 니체랑 쇼펜하우어를 허무주의로 묶는 걸 많이 봤는데요 특히 니체하면 사람들이 니체를 “삶은 아무 가치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 정도로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저는 우상의 황혼, 비극의 탄생을 읽으면서 니체를 조금 과장하면 “긍정의 철학자” 혹은 “역동의 철학자”라고 까지 부르고 싶었습니다 니체의 이런 비관적인 이미지는 어디서부터 온 건가요?
제대로 읽어보지 않은 사람들에 의해 meme화되어서 그렇습니다. 다른건 몰라도 최소한
은 이론적 여지 없이 초기 니체부터 후기까지 일관되게 반대하는 삶의 태도입니다.
그렇게 밈화 됐을만한 요인은 무엇이었을까요? 완전히 잘못된 해석인가요? 아니면 그렇개 해석될 여지정도는 있나요?
글쎄요, 몇 가지 떠오르는 생각을 적어보자면,
(1) 니체의 동생인 엘리자베트가 니체의 유고들을 편집하고 소개하면서 자기 자신의 견해들을 많이 담았는데, 그 과정에서 니체가 나치즘이나 파시즘 같은 극우주의적 정치 사상과 연결되었다는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엘리자베트는 히틀러에 대해 "당신이 바로 니체가 말한 차라투스트라의 '초인'이다."라고 말했다고도 하죠.) 그만큼, 이후에 나치에 대해 제기되는 수많은 비판과 풍자가 니체에게도 그대로 적용된 게 아닌가 해요. 서구 사회를 2,500년 동안 지탱해 온 도덕과 양심과 합리성과 질서의 '몰락'이 바로 나치즘과 파시즘에서 단적으로 드러났다고 할 수 있다면, 니체는 (다소 억울하겠지만,) 그 몰락의 상징과도 같은 인물이 된 것이겠죠.
엘리자베트와 히틀러
(2) 니체의 철학은 20세기의 실존주의의 맥락과 연결되는 것으로 이해되기도 해요. 그런데 실존주의 문학이나 철학이 종종 '비합리성', '부조리', '무', '불안', '무의미' 같은 주제들에 대해 강조하는 것으로 대중적으로 받아들여지다 보니, 니체에게도 그런 이미지가 붙은 게 아닌가 하네요. 가령, 햇빛이 눈부셔서 아랍인을 살해하였다는 카뮈의 『이방인』 속 뫼르소의 이미지나, 어느 날 갑자기 벌레로 변해 가족들에게까지 잊혀져서 무의미하게 삶을 마감하는 카프카의 『변신』 속 잠자의 이미지가 니체에게도 덧씌워진 게 아닌가 하네요. (하지만 실존주의 역시 단순히 허무감을 강조하는 철학 사조라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실존주의에 대한 이런 대중적인 이미지는 실존주의 작품이 지닌 부분적 특징을 지나치게 과장한 것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러게요. 오히려 니체는 삶을 경멸하게 만드는 "배후세계론자"들이나 "죽음을 설교하는 자들"을 격렬히 비판하니까요. 니체 자신이 누구보다 싫어했을 표현이 니체를 설명하는데 쓰인다는건 미묘하네요.
(전 니체를 백승영 교수님 자라투스트라 번역본이랑 해설서로만 접해서 이 번역어가 통용되는 번역어인지는 모르겠네요)
(3) '허무주의'라는 용어는 니체 사상의 내적 특징에서 나온 것이기도 해요. 니체의 현대적 계승자들은 '허무주의'라는 말을 아주 적극적으로 내세우기도 하는데, 이때의 '허무주의'라는 표현은 우리의 삶을 다른 형이상학적이고 초월적인 실재에 의존시키지 않는다는 긍정적인 의미이고, 이런 긍정적인 의미에서의 허무주의는 니체 본인에게서 온 것이 맞으니까요.
가령, 가다머의 제자이면서 니체를 해석학에 적극적으로 도입하는 이탈리아 철학자인 잔니 바티모(G. Vattimo)는 자신의 해석학을 '허무주의적 해석학'이라고 스스로 강조하기도 해요.
"The reference to Nietzche's announcement draw us closer to the theme of nihilism. If hermeneutics, as the philosophical theory of the interpretive character of every experience of truth, is lucid about itself as no more than an interpretation, will it not find itself inevitably caught up in the nihilstic logic of Nietzsche's hermeneutics?" (G. Vattimo, Beyond Interpretation: The Meaning of Hermeneutics for Philosophy, David Webb (trans.), Stanford, California: Stanford University Press, 1997, p. 7.)
데리다에게서 수학한 한국 철학자 박이문 선생님도 자신의 윤리학을 '허무주의'라고 표현한 적이 있으시죠.
[…] 박이문은 '행복한 허무주의'를 표방한다. 인간적인 삶과 세계에는 형이상학적으로 의미가 주어져 있지 않지만, 인간 스스로 의미를 부여하면서 긍정적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실존주의적 허무주의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그의 사상이 유래한 무신론적 실존주의는 인간이 진리도, 신도 업슨 공허한 세계에서 절망하여 허무주의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부각시킨다. 그러나 스스로 가치를 찾아야만 하고,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려는 용기'를 지녀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만 그래도 나름 행복을 찾을 수 있다고 본다. (강학순, 『박이문: 둥지를 향한 철학과 예술의 여정』, 미다스북스, 2014, 322쪽.)
[…] 박이문의 허무주의는 니체의 것과 동일선상에 놓여 있다. 즉 도덕적 허무주의에 머무르고 있는 셈이다. 기존의 삶의 의미의 기반이 된 최고의 가치들이 폐기된 상황을 허무주의로 표현하고, 그것을 넘어 가치 전환을 통해서 내 자신이 스스로 부여하는 생의 의미에 근거해서 삶을 긍정하려는 '앙티 데스탱(Anti-Destin)'의 내용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강학순, 『박이문: 둥지를 향한 철학과 예술의 여정』, 325쪽.)
그런데 이런 '긍정적인 허무주의' 혹은 '행복한 허무주의'가 대중적으로 소개될 때는 '허무주의'라는 용어에만 초점이 잘못 맞춰지게 되겠죠. 그래서 '긍정적인'과 '행복한'이라는 수식어는 빠지고 '허무주의'만 남아서, 마치 니체가 삶을 부정하고, 인생의 의미를 부정하고, 합리성과 도덕을 부정한 철학자인 것처럼 잘못 소개되는 것이겠죠.
애초에 니체가 자신 글이 오해되도록 글을 씁니다. 예를 들어, 아래 인용문만 보면 니체는 감각주의를 비판하고 플라톤적 사유방식을 높이 평가하는 인물입니다.
"실로 물리학은 영원히 통속적인 것일 수 밖에 없는 감각주의가 내세우는 진리 규준에 본능적으로 따르고 있다. 물리학에서는 무엇이 명료한 것이고 무엇이 '설명되는' 것인가? 그것은 보고 만질 수 있는 범위의 것에 지나지 않는다. 물리학에 따르면 우리는 모든 문제를 이 정도까지만 탐구해야 한다. 이와는 반대로 고귀한 사유방식이었던 플라톤적 사유방식이 갖는 매력은 바로 명백한 감각적 증거에 저항하는 데에 있었다(BGE 15)"
그런데 그 뒤에 가서는 "감각에 대한 지배는 플라톤이 천민적인 감각이라고 불렀던 다채로운 감각의 소용돌이 위에 창백하고 차가운 회색의 개념망을 던지는 것에 의해서 이루어졌다"라면서 플라톤주의를 비판하고(BGE 15), "감각주의는 발견의 원리라고는 할 수 없어도 최소한 규제적인 가설이라고 할 수는 있다"라면서 감각주의를 높이 삽니다(BGE 16).
이것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니체가 '감각주의'라는 동일한 표현으로 지시하고자 하는 대상이 버클리와 칸트라는 점, 니체가 비판하는 감각주의는 버클리이고 높이사는 감각주의는 칸트라는 점을 앞뒤 문장을 읽고 포착해야 합니다, 예를들어: "감각기관이 관념론적 철학이 의미하는 현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명심해야만 한다: 그러한 현상으로서는 감각기관 자체는 어떠한 원인도 될 수 없을 것이다(BGE 15)."
여기서 또 이어지는 문제가 한 철학을 도식적으로 이해할 때 발생하는 문제인데, '니체가 칸트를 비판했다' 정도로 니체를 도식적으로 그리고 나이브하게 이해 및 전제하는 한, 니체가 칸트를 높이 샀다는 점을 쉽게 무시해버립니다.
니체가 철학자인 한 그의 저술도 여느 철학자의 저술 작업처럼 한 단어 한 문장 꼼꼼히 독해되어야 하는데, 그 문체의 특성과 형식상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읽지 않습니다. 니체는 이미 이러한 사태를 예견한듯이, 니체는 자신이 말하려는 바를 이해하는 사람들을 "우리"라고 말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은근히 돌려서 비판합니다. (물론 이 "우리"라는 표현은 자신이 비판하는 대상을 칭할 때도 쓰입니다)
결국, 니체가 곡해되어 meme화된 이유 중 하나는, 니체가 말하는 '우리 아닌 자들'이 니체를 읽고 니체의 의도가 아닌 말을 니체가 했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감각기관이 관념론적 철학이 의미하는 현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명심해야만 한다: 그러한 현상으로서는 감각기관 자체는 어떠한 원인도 될 수 없을 것이다(BGE 15)."
니체의 이 문장은 어떻게 해석되는지 궁금합니다.
제가 설 연휴 직후에 일본을 가야해서 책을 옆에 두고 자세히 보며 답변해드릴 상황이 안되네요. 제가 예전에 JGB 15절을 공부하며 남겨둔 글을 대신 올려둡니다.
JGB 15.pdf (66.8 KB)
감사합니다
식당으로 비유하면 경양식 돈가스 집을 차렸는데 사람들이 "경양식"이라는 수식어는 빼놓고 "돈가스"만 보고 마치 일식집인 것처럼 오해해서 인터넷에 초밥 텐동 메밀소바 맛집이라고 소문이 난 거군요...
이건 조금 다른 이야기이긴 한데요. 말씀하신거랑 엇비슷하게 여러모로 논란이 많은 철학자인 레오 스트라우스처럼, 니체를 일종의 플라톤주의자로 읽고 또 플라톤을 니체적으로 해석하는 독법들(-어떻게 보면 현실 인식과는 정반대 방향의 해석이기도 하죠-)에 대해선 혹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여쭐 수 있을까요?
우선 저는 레오 스트라우스가 니체를 어떻게 해석하는지 잘 모릅니다. 또 한편, 어떤 의미에서 "플라톤주의"를 말씀하시는 것인지 말씀해주셔야 답변을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실 이 주제에 대해 저도 깊이 알지 못해, 오히려 혹시 의견이나 알고 계신 점이 있으실까 해서 질문을 했던 건데, 막상 설명을 해야 한다고 하니 제가 단정적으로 말씀드리긴 조심스러운 부분이 많고 쉽지 않은 부분이 많네요.
이게 니체나 레오 스트라우스나 둘 다 해석을 둘러싼 논쟁이 워낙 많고 관련된 논란이나 논의가 많은지라 제가 함부로 말씀드리긴 좀 그렇습니다.
일단 스트라우스, 니체, 플라톤 관계 이렇게 관련 내용을 간단히 다루고 있는 국내 논문 두 편만 일단 참고용으로 올려두겠습니다.
박성우. (2020). 레오 스트라우스의 플라톤주의: 스트라우스 정치철학의 두 테마와 관련하여. 정치사상연구, 26(1), 151-180.
박성우. (2021). 스트라우스의 니체 해석을 통해 본 스트라우스 정치철학의 의도: 신학정치적 문제와 플라톤주의를 중심으로. 한국정치연구, 30(3), 1-30.
일단 제가 관련된 학술 연구 내용들을 얼추 이해한 바에 따르면 스트라우스는 플라톤이 말하는 '철학자(철인)'와 니체의 '초인(위버멘쉬)'을 상당히 유사한-사실 거의 동일한-존재로 보고 있다는 견해가 있습니다.
둘 다 동굴에서 벗어난, 빛을 보는 초월적인 존재이지만, 한쪽, 플라톤의 '철학자(철인)'은 공동체를 위해 교육받아 그 '공동체의 가치와 방향을 창조하는 존재'이고 반면 다른 한쪽 니체의 '초인(위버멘쉬)'은 '자기 초월을 통해 스스로의 가치를 창조하는 존재'로 이해될 수 있는 정도의 차이가 있다고 들었습니다.(물론 이러한 비교도 논쟁적이며, 주류 해석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점도 알고 있습니다.)
스트라우스는 플라톤과 니체의 저술 속에 이러한 요소들이 암묵적으로 숨겨져 있다고 보고, (-일종의 '비의적 독해esoteric reading'-)의 관점에서 해석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또 스트라우스 외에도 플라톤과 니체를 연결해 해석하려는 철학자들이 일부 있다고 들었습니다. 물론 이 부분 역시 다양한 논란이 있고, 학계에서도 의견이 분분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여튼, 어디까지나 제가 이런 해석에 확신이 있는게 아니고 논의를 읽다가 개인적으로 궁금해서 한 질문이었습니다.
내용과 관련된 스트라우스의 서술 중 일부입니다:
새로운 상황은 새로운 귀족의 출현을 필요로 한다. 그것은 새로운 이상에 의해 형성된 새로운 귀족이어야 한다. 이것이 니체의 위버멘쉬에 대한 가장 분명한, 따라서 가장 피상적인 의미 규정이다. 인간의 위대성에 대한 과거의 모든 관념들을 가지고는 인간이 세계가 부과하는 무한정의 책임을 감당할 수가 없다. 철학자가 무엇인가에 대해 니체만큼 장엄하고 숭고하게 말한 사람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무리가 아니다. 물론 니체가 묘사하는 미래의 철학자는 니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플라톤의 철학자를 상기 시킨다. 그러나 플라톤은 니체만큼 혹은 니체보다 더 분명하게 문제가 되는 특성들을 파악하고 있었지만 그의 심오한 통찰력을 공표하기보다는 암시적으로 표현했다.
-Strauss, Leo. (1989). Pangle, Thomas L. (ed.). 《The Rebirth of Classical Political Rationalism》 , pp.40-41-
자료 감사합니다. 시간이 나면 읽고 의견 남겨보도록 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