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피터 싱어는 자신의 에세이 <이렇게 살아가도 괜찮은가> How are we to live? 10장에서 삶의 의미에 대해 다룬다.
삶의 의미를 다루는 저작들이 대개 그러하듯, 싱어는 시시포스 신화를 화두에 꺼내며 카뮈를 언급한 다음 리처드 테일러로 넘어간다. 테일러는 "시시포스의 운명이 어떻게 바뀌면 그가 삶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지고 두 가지 가능한 해답을 제시한다.
(1) 매번 똑같은 바윗돌을 굴려 올리면 땀 흘린 결실이 없으니 다른 돌을 굴려 신전을 짓는다
(2) 시시포스가 매번 똑같은 돌을 헛되이 굴리되 시시포스에게 바윗돌을 굴리려는 강한 욕망을 불어넣는다.
(1)은 신전의 '아름다움' 같은 객관적으로 가치 있는 목표를 추구하므로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다 보며, (2)는 객관적인 것이 아니라 내면의 동기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본다. 테일러는 (2) 주관주의적 관점에 손을 들어주며, 싱어에 따르면 테일러는 실존주의자, 논리 실증주의자, 그리고 20세기의 지배적 정신에 동조하는 현대의 많은 철학자들과 의견을 같이한다. 의미란 주관적이며, 우주 전체는 아무 의미가 없을 지라도 우리는 자신의 삶에 나름의 의미를 자유롭게 부여할 수 있다.
싱어 역시 우리가 삶에 스스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는 점을 부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싱어는 주관주의적 관점이 가진 문제들을 언급하며 (1) 삶의 의미를 객관적 가치에서 찾아야 한다 주장한다.
2.먼저 가치 있는 목표의 부재는 권태와 불안감 등을 낳는다. 그 예로 싱어는 전업주부, 원주민, 가축의 예를 든다.
a. 미국의 전업주부들은 생계는 남편들에게 맡기고, 가전제품의 발달로 가사 노동에 걸리는 시간들이 줄었음에도 불구하고 무언가 '이름 붙일 수 없는 문제'로 인해 우울감에 시달린다. 주부는 유일한 역할인 집안일과 자녀 양육이 끝나면 나머지 시간은 텔레비전이나 보면서 시간을 허비하는데, 여기서 가치 있는 목표를 찾을 수는 없었다.
b.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들은 서구 문명과 접촉하며 물질적 부를 누릴 기회를 얻었지만, 삶의 질은 오히려 하락했다. 원주민 사회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지식들과 기술이 무용지물이 되며 부족민들이 하루하루 해오던 일들이 의미를 잃었기 때문이다.
c. 좁은 철창에 갇힌 가축들은 끊임없이 같은 행동들을 반복하는 '정형행동'을 보이는데, 이는 먹이 찾기, 보금자리 찾기 등 자연에서 했던 목표 추구의 행동들을 더 이상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목표 상실로 인한 불만족'에 대응 해 현대 문명은 신경 안정제 등을 제공하며 불만족에 대응하려 하지만, 이는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하고 단지 "불만족한 주부를 만족한 좀비"로 바꾸는 일에 불과하다.
3.여기서 우리는 싱어에게 이렇게 물어볼 수 있다. (싱어가 비판하려는) 주관주의적 관점이 정말 가치 있는 목표 추구를 배제하는가? 오히려 스스로 가치 있는 목표를 찾아 그것을 얻기 위해 노력하게 하는 것, 그것이 주관주의적 관점 아닌가?
물론 주관주의적 관점에서 목표를 추구 하는 것 역시 가능하다. 하지만 그 목표가 객관적 가치를 지닌 것이 아니라 단순히 1차적 만족을 주는 데 불과하다면, 목표를 추구하던 사람은 제대로 만족하지도 못하고 불행해질 가능성이 높다.
싱어는 소유욕 또는 경쟁에서 의미를 찾으려는 사람들을 예로 든다. 더 많은 부를 축적하는 것, 그리고 경쟁 자체가 목적이 된 경우 사람들은 대개 불행해 진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이 얻은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더 많은 부를 쌓고 더 많은 승리를 얻는 데 과하게 몰입한 나머지 강박에 빠지기 때문이다.
싱어는 이런 상황을 가리켜 '지혜롭지 못하다'라고 말한다.
끝없는 축적은 무의미에서 탈출하는 또 다른 수단입니다. 하지만 이 탈출구는 근본적인 지혜의 결여를 드러냅니다. 제가 말하는 '지혜는 어느정도의 이해력과 자각능력을 바탕으로 삶에서 무엇이 중요한지 성찰하여 얻은 깨달음을 일컫습니다. 여기에다 '실천적'이라는 말을 덧붙여 '실천적 지혜'라고 하면, '지혜'에 따라 행동하는 능력을 뜻합니다. 경쟁이라는 목표는 '성찰하는 정신'을 만족시킬 수 없으며 심지어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성찰하지 않는 사람들을 만족시키지도 못하는 듯합니다.
나아가 단순히 의미를 주관적으로만 추구하는 것은 정말 가치 있는 목표를 추구하는 데 도움을 주지 못한다. 무엇이 가치 있는 지를 판단하는 것은 내 자아의 승인이 아닌, 윤리적 판단의 영역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내 자아의 승인 만을 가치 판단의 척도로 삼는 다면 우리는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에서 눈을 돌려버리곤 우리 자신에게 가치 있는, 행복과 쾌락을 가져다 주는 것 만을 찾을 것이다. (특히 오늘날 소비사회가 그렇다) 하지만 이는 쾌락을 추구하는 일에 몰두하지만 지속적인 쾌락은 찾을 수 없는 '쾌락주의의 역설'의 상황에 우리를 몰고 간다. 반면 우리가 객관적 가치에 영합하기 위해 윤리적으로 사는 데 목표를 둔다면, 우리는 자아에 대합 집착에서 벗어나 남을 돕는 데서 지속적인 행복을 느낄 수 있고, 세상을 좀 더 좋은 곳으로 만들 수 있다. (다른 맥락이지만, 이 부분은 키르케고르가 말하는 심미적 실존에서 윤리적 실존으로의 도약을 생각나게 한다.)
우리 삶에서 상상의 판타지를 넘어선 의미를 찾으려면 이 현실에 단단히 뿌리 박고 현실이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는지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잠시 살다 갑니다. 삶은 즐거울 수도 있고 괴로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쾌락과 고통을 넘어 삶에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면, 주관적 경험 만으로는 이 의미를 만들어낼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해야 할(가치 있는) 일이 없다면 삶은 의미가 없습니다. 그리고 어떤 일이 해야 할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 정하는 것은 윤리적 판단의 영역입니다.
4.그렇다면 객관적 가치는 꼭 윤리적이어야 하는가? 싱어에 따르면, 윤리적 삶을 살아가는 것이 삶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는 유일한 방법은 아니지만, 최소한 윤리적 이상은 가장 단단한 토대 위에 서있다.
개인을 넘어선 이상, '초월적 이상'을 추구하면서 삶의 의미를 추구하려는 사람들은 많다. 축구 선수는 개인보다 팀을 중요시 하고, 어떤 회사 직원들은 개인보다 회사를 더 중요시 여긴다. 그러나 이는 자신이 속한 마피아 패밀리나 나치당을 자신 보다 더 중요시 여기는 사람들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이런 이상에 헌신하는 것이 사람들에게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진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이상들은 '성찰하는 정신'들을 만족시킬 수 없다는 것이 문제다. 축구팀이나 회사의 이익에 헌신하는 것은 성찰할 수록 그 속에서 의미를 찾기 힘들지만 윤리적 삶에 헌신하는 것은 아무리 성찰해도 그것이 하찮거나 무의미하다고 생각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윤리적 삶을 무의미하게 보이도록 만드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시간이 지나면 내가 한 가치있는 행동들이 다 사라져 버릴 것이라는, '우주적 무의미' 이다. 다시 테일러가 드는 시시포스의 예로 돌아가 보자. (1)에서 시시포스가 지은 신전은 세월이 지나면 돌무더기가 되어버릴 것이다. 이는 시시포스에게 절망감을 줄 것이고, 신전을 짓는 일의 의미를 회의하게 만들 것이다.
그러나 싱어는 러셀의 말을 인용하며, 무언가 언젠가는 끝나버릴 것이란 사실이 그것의 가치를 떨어뜨리진 않는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인간이 만든 가장 아름답고 오래가는 인공물이 언젠가 먼지로 바뀐다고 해서 이 창조 행위의 가치와 의미를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테일러는 여기에 또 이의를 제기하며, 시시포스가 신전을 완성한 뒤에 그 아름다움을 영원토록 감상하더라도 그것은 영원한 권태만 남길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싱어는 이 예시는 찰나를 살아가는 우리 인간에게는 통하지 않을 유비라고 일축한다.
5.싱어의 주장은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선 객관적 가치에 영합해야 한다'는 수전 울프의 주장과 유사하다. (수전 울프의 주장은 엘도라도 출판사에서 나온 life - 삶이란 무엇인가 에 실려 있다.) How are we to live가 에세이인 만큼 논증의 체계성은 수전 울프 쪽이 좀 더 높은 것 같다. 하지만 (내 기억상) 울프가 객관적 가치가 무엇인지 명확히 말해주지 않은 반면, 싱어는 그 객관적 가치가 윤리적 가치여야 한다 주장하며 삶의 의미에 대해 좀 더 명확한 제시를 하는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본인이 인정하듯이 좀 더 도발적인 측면이 있다.)
한편 베너타는 human predicament에서 우주적 무의미가 우리 행위의 가치와 의미를 떨어뜨리지 못한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위안을 가져다 주지 못한다고 반박한다. 즉 설령 싱어의 말이 맞더라도 우리 삶은 여전히 우주적 의미를 결여하고 있고, 윤리적 삶은 우리 개인이나 공동체에게 의미를 가져다 줄지언정 우리의 우주적 무의미를 해결해주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베너타의 비유에 따르면, "아버지의 건강이 안 좋으신대 어머니가 건강하다고 해서 아버지에 대한 걱정이 줄지는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