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누엘 데란다, 『새로운 사회철학』–들뢰즈에 대한 사회학적 독해와 그 한계

1. 들어가며
마누엘 데란다(1952~)는 프랑스의 현대 철학자 질 들뢰즈(1925~1995)의 배치(agencement) 이론을 사회철학에 적용하여 그동안 '공허한 일반성'에 머물러 있었던 사회학적 개념들을 새로운 것으로 대체하고자 한다. 그의 저작 『새로운 사회철학』(2006)또한 그 서문에서 밝히고 있듯이, 그는 "사회 존재론에 접근하는 새로운 방식을 소개"(5쪽)하여 이러한 새로운 관점에서 사회철학적 연구를 진행해 나가고자 한다. 데란다는 이러한 연구를 거의 전적으로 실재론적인 관점에서 진행해 나간다(또는 차기작 『들뢰즈: 역사와 과학』에서는 자신의 철학을 유물론이라고 지칭하기도 한다). 그에 따르면 이러한 입장은 현실이 정신과 독립적으로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입장이다(같은 곳). 결국 그는 "사회적 존재들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개념으로부터 사회적 존재의 자율성을 옹호"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관점 하에서, 즉 여러 가지 방식의 사회존재론적 기술이 가능하다는 입장 하에서 "배치"라는 들뢰즈의 매우 창조적인 관점을 채택한다. 그럼에도 이것은 "객관적인 조립 과정"(8쪽)에 관계한다. 따라서 이것은 정리하자면 사회 속 존재자들의 네트워크를 존재론적으로 배치의 문제로 보는 관점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배치는 저자가 말하듯이 어떤 존재자들의 본질적 속성도 의미하지 않고, 단지 외재적인 관계를 의미할 따름이다. 그는 이 책에서 배치 이론에 대한 전반적인 개론에서부터 그것이 총체성 이론 및 본질주의와 다른 점을 강조하고, 사람, 그리고 사람들 간의 네트워크, 조직, 정부, 도시, 국가에 관해 철학적으로 기술한다. 필자는 저자의 이 과정을 최대한 이 책에 충실하게 정리한 뒤, 마지막으로 저자의 방법이 가지는 한계를 논의해 보고자 한다.

2. 배치란 무엇인가?
먼저 들뢰즈가 말하는 배치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보자. 배치(agencement), 즉 아장스망은 얼핏 보기에 단지 건축적인, 또는 설계도적인 용어로 보인다. 그러나 조금 더 엄밀히 말하자면, 들뢰즈 자신이 언급했듯이, 이 배치는 지리학적이다(『디알로그』 8쪽 이하 참조). 결국 들뢰즈는 이것을 통해 철학적으로 무엇을 하고자 하는가?
그의 배치 이론을 단 한 마디로 정의하자고 한다면, '항들 간의 외재적인 연결'일 것이다. 배치의 본질은 '연결'에 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실제로 들뢰즈는 한 대담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모든 문법, 모든 삼단논법은 접속사들이 존재 동사에 계속해서 종속되도록 하는 수단입니다. 접속사들이 존재 동사의 둘레를 돌게끔 만드는 수단이죠. 따라서 더 멀리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다시 말해 관계들과의 마주침이 모든 것을 꿰뚫고 망가뜨리도록, 존재를 침식시키도록 만들어야 하고, 존재가 동요하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이다/있다(EST)를 그리고(ET)로 대체해야 하는 것입니다. A 그리고 B. 그리고는 특별한 관계도, 특별한 접속사도 아닙니다. 그것은 모든 관계들, 모든 관계들의 길을 연결하는 것이죠. 관계들이 그 항들의 바깥, 그 항들 집합의 바깥, 존재나 일자나 전체로 결정될 수 있을 모든 것의 바깥에서 질주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열외-존재(extra-être), 사이-존재(inter-être)로서의 그리고."(『디알로그』 110쪽)*

먼저 그의 이러한 생각은 초기 저작인 『경험주의와 주체성』(1953)에서의 다소 독창적인 흄 독해에서 기인한다. 그는 흄의 관념 연합 이론으로부터 다음의 결론을 이끌어낸다: "모든 관계는 항들에 외재적이다"(『디알로그』 107쪽 ;『들뢰즈 다양체』 162쪽 참조). 이른바 '외재성의 관계들'(relations of exteriority)이라고 불리는 이 관점은 배치 이론의 철학적 기초가 된다. 관계들을 항 외부에 두면서 이것은 또한 '더 좋은 연결'이라는 철학적 과제를 부여하기도 한다. 이에 대해서는 들뢰즈의 스피노자론이 결정적이다. 그는 『스피노자의 철학』(1970)에서 스피노자가 생각했던 신체와 관념 간의 관계를 주시한다. "한 신체가 다른 신체를 '만날' 때, 한 관념이 다른 관념을 만날 때, 이 두 관계는 결합되어 보다 큰 능력을 갖는 하나의 전체를 이루든가, 아니면 하나가 다른 하나를 해체하여 그 부분들의 결합을 파괴하게 되든가 하는 일이 일어난다."(『스피노자의 철학』 34쪽) 이것이 스피노자가 말하는 윤리학적 기쁨의 형이상학적 원천이다. 왜냐하면 그 관계가 결합(긍정)이냐 해체(부정)이냐 하는 것은 분명히 그 신체들에 외부적이고, 따라서 신체 그 자체는 그 어떤 내재적인 본질적 관계도 수반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의 신체가 한 신체를 만라서 그것과 결합될 때, 우리는 '기쁨'을 느끼고, 반대로 한 신체 혹은 한 관념이 우리의 고유한 결합성을 위협할 때, 우리는 '슬픔'을 느낀다."(같은 곳). 결국 이것은 결국 사회적 존재들의 자율성을 옹호하려는 데란다의 입장과도 맞아떨어지는데, 왜냐하면 항들이 외재적인 만큼 다양한 관계 양상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관점이 갖는 비판적 토대는 무엇인가? 데란다는 이 책 『새로운 사회철학』에서 이 외재성의 관계들을 '내재성의 관계들'(relations of interiority)과 비교하여 서술한다. 이것은 '매끈한 총체성'이라는 표현으로 특징지어진다. 곧 부분과 전체 사이에 유기적 통일성을 형성하는 것인데, 여기서 부분들은 전체를 구성하는 속성이 된다. 따라서 "이 개념에 따르면 전체는 부분들 사이에 엄밀한 상호 결정관계가 있어서 빠져나올 수 없는 통일성을 가진다"(『새로운 사회철학』 24쪽). (이러한 관계를 철학적 모델로서 사유한 대표적인 학자로는 헤겔을 들 수 있다.) 또한 배치라는 개념은—저자가 제2장에서 설명하듯이—본질주의라는 입장에도 반대하는데, 말하자면 배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존재 분류법에 격렬하게 반대한다. 아리스토텔레스적 존재는 유(類), 종(種), 개체로 분류된다. 이때 이것은 말 그대로 위계적이다. 예컨대 동물은 유이고, 사람은 종, 그리고 어느 한 사람은 개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존재론은 "구체적 일반성"이라는 개념을 산출해 낸다(같은 책, 54쪽). 따라서 이것은 매우 일반화되어있을 뿐만 아니라 상당히 안정적이라는 점에서는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는 것 같기도 하다. 이에 반해 배치는 과정의 문제로 귀결되기에 불안정성을 특징으로 하고, 그 때문에 관계는 변형될 수 있다. 정리하자면 전통적 본질이론은 수직적인 구조를 가지는 데 반해, 들뢰즈의 존재론은 평평한(flat) 평면구조를 특징으로 한다. 이것이 들뢰즈가 말하는 (내재성의) 평면의 의미이다. 그런데 왜 '내재적'인가? 방금 우리는 들뢰즈의 존재론을 항들간의 관계의 외재성으로 규정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이는 모순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 어떤 초월성도 포함하지 않으며, 그 자체로 변용 능력, 특히나 강도적인 능력에 의해 규정된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배치란 항들 간의 외재적 관계들이다. 그러나 이 설명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여기에 데란다는 창발성(emergence)이라는 개념을 덧대어 이 이론의 형이상학적 함의를 밝혀낸다. 앞선 스피노자 철학에 대한 인용에서 우리는 배치가 단순히 두 항 간의 연결이 아니라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창발적임, 즉 전체가 부분들의 총합보다 큰 것, 그것이 배치의 특징이다. 말하자면 회사조직은 단순히 직원들 간의 총합이 아니라 그들 간의 위계조직도적 연결이며 배치이다. 이는 '사회 실재론'적 관점을 배치 이론으로 설명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3. 영토화와 탈영토화
들뢰즈는 자신의 저작에서 배치의 두 가지 차원을 고려한다. 첫 번째 차원은 물질적 역할과 표현적 역할 간의 구별이다(『새로운 사회철학』 28쪽 참조).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논의하기로 하고, 먼저 두 번째 차원으로 제시되는 영토화와 탈영토화에 대해서 알아보자. 이것은 그 단어 외형에서도 나타나듯이 지리학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앞서 말했듯이 배치는 관계의 변동가능성과 비절대적 안정성과 불안정성으로 특징지어질 수 있다. 이는 사회적 사례에 적용될 때 더 명료해진다. 말하자면 따라서 사회적 네트워크는 결속력 있게 안정화될 수도, 반대로 불안정화될 수도 있다. 먼저 영토화의 네트워크는 공동체를 정의한다. 이것은 "실제 영토의 공간적인 경계를 정의하고 선명하게 하는 과정이다"(같은 책, 30쪽). 예를 들어서 교역이 활발하지 않은 민족 집단은 영토화가 강한 사회 집단으로 볼 수 있다. 또 조직 간의 위계구조의 안정화 및 군주의 카리스마라는 결속력 또한 영토화의 원인으로 볼 수 있다. 이때 후자는 물질적인 어떤 것이 아니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이것은 단순히 영토화가 '물질적' 측면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언어—즉 '표현적' 측면—에서도, 표준어 사례, 그리고 외래어 사용이 어려운 한 언어민족 사례로 그것을 볼 수 있다. 또 예를 들어 이해하기 어려운 방언을 쓰는 지역은 더 영토화되어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이후에 '코드화' 개념으로 이어지는데, 예를 들어 말하자면 예를 들어 유전자 암호의 출현과 그 선형적 배열이 그것이다(차례로 영토화와 코드화는 들뢰즈의 분석에서는 '이중분절'이라고 불린다). 이에 대한 철학적 모티프는 흄의 '습관적 반복'에 있다고 할 수 있다(같은 책, 90쪽). 예를 들어서 문화는 세대를 걸쳐 전승되고 반복됨으로써 영토화되고, 미시적으로는 일에 대해 습관적으로 반복함으로써 직업에 적응하는 직장인이 있을 수 있다. 이에 반해 공간적 경계들을 불안정하게 하거나 내적 이종성을 증가시키는 모든 과정은 탈영토화로 여겨진다(같은 곳). 예를 들면 서신, 우편 제도, 여러 지역들의 중앙에 위치한 지역 시장 등이 그 예시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구별은 다소 상대적인데, 왜냐하면 지역 시장보다 지방 시장들은 그에 비해 더 내적 동질성이 약화되어 있기, 즉 탈영토화되어 있기 때문이다.(여기서도 데란다는 '시장'이라는 굳어 버린 일반성을 지역 장터 및 지방 시장 등의 특이성으로 대체한다. 이에 대해서는 저자의 『들뢰즈: 역사와 과학』 제1장을 참조). 또 탈관료제는 관료제에 비해 더 탈영토화되어있다고 말할 수 있으며, 더 미시적인 예시로는 조직 내에서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들, 이민자, 외국인 노동자 등이 탈영토화적인 요소라고 말할 수 있겠다. 데란다는 탈영토화의 요인들에 "새로운 기술 습득"의 효과를 추가한다. 예를 들어 어린아이가 수영이나 자전거 타기를 배우게 되면, 새로운 인상으로 가득한 경험을 할 누 있는 새로운 세계가 갑자기 열린다. 그러나 이것도 앞서 말한 습관적 반복이 되면 영토화될 수 있다.

4. 사회학적 배치와 그 예시들
이러한 기본개념들 아래에서 데란다는 사회적 현상들을 철학적으로 '새롭게' 기술하기 시작한다. 이에 대한 예시들을 차례대로 제시해보자.
먼저 사람들 사이의 관계가 있다. 사람은 사회적 분석에서 가장 작은 최소단위가 될 수 있기에, 여기서부터 시작하는 것은 적절할 것이다. 먼저 동맹은 외재성의 관계의 좋은 예시이고, 노조시위나 반대집단 등은 탈영토화 조직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또 친구들 간의 결속은 영토화로, 그리고 하위 문화 조직들 간의 결속은 영토화로, 그러나 그것이 더 거시적인 관점, 그러니까 한 집단 내에서의 비주류 문화로 간주될 때는 탈영토화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때 문제가 하나 생긴다. 예를 들어서, 만일 전쟁이라는 사건의 경우, 도시들은 군사 조직을 통해서 인과적으로 상호작용했는데, 이러한 상호작용을 조직들 사이의 하나로 볼 것인지 아니면 도심지들 사이의 하나로 볼 것인지에 관한 문제이다(같은 책, 72쪽). 데란다는 이 난점을 '인과적 잉여'(casual redundancy)라는 관점에서 해결하고자 한다. 이 인과적 잉여란 다음을 의미한다: 만일 A와 B가 각자 야구공을 집어들어 한 유리창을 향해 던진다고 하자. 둘 모두 정확히 유리창을 깨뜨렸으며, 둘 중 한명만 던졌더라도 명중했을 것이다. 만일 그들이 정확히 동시에 유리창을 깨뜨렸다면, 그것은 인과적 과잉결정의 경우라고 말할 수 있다(이에 대해서는 이 책의 72쪽 옮긴이주 참조). 따라서, "전쟁이 아주 오래 지속되거나 대규모로 벌어진다면, 조직적 차원의 의사결정은 도시의 차원에서의 자원고갈보다 중요하지 않아서, 하나의 군사 조직을 다른 조직과 대체해도 상대적으로 변화하지 않으므로 도심지들 사이의 상호작용과 관련된 것으로 이러한 사례를 파악하는 것이 설득력이 있다"(같은 책, 72~73쪽).
두 번째 사례로는 조직과 정부가 있을 수 있다. 이때 데란다는 합법성의 근원에 따라 권위 구조를 세 가지로 제시한 막스 베버를 기본적으로 따라간다. 그에 따르면 그 세 가지는 다음과 같다. (1) 매우 효율적인 관료제—이때 여기서는 구성원들의 지위가 명확하고, 현직자들의 권한 영역은 문서화된 규정에 의해 밝혀져야만 한다. 이러한 구조는 합법적인 성문법적 구조로 설명되며, 다시 말해 코드화의 예시라고 할 수 있다. (2) 전통적 규칙과 의례, 즉 종교 조직이나 군주제. 여기서는 전통이 중요시되고, 지도자나 우두머리가 내릴 수 있는 명령의 내용은 막연해서 상당히 자의적일 수 있는 사적 특권을 누릴 수 있다. (3) 군주의 카리스마. 마지막으로 이것은 하나의 표현적 요소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데란다는 여기에 (4) 계약적 관계라는 배치 형태를 추가한다. 그것은 일부 행동에 대한 통제권을 다른 사람에게 양도하는 관계로서, 사회계약론적 의미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표현적 요소가 고려되어야 하는데, 데란다가 지적하는 것은 이러한 권위구조에서 언어의 역할이다. 병원 방문과 복용량, 학교 출석부와 같은 것은 그 집단을 영토화하는 요소로 이해될 수 있는데, 저자는 여기서 미셸 푸코를 언급하기도 한다.
마지막으로는 도시와 국가를 사례로 들 수 있는데, 이때 여기서 물질적 형태로는 다른 지역과의 왕복이 편리한 도시들, 또는 상대적으로 폐쇄적인 전제국가를 각각 탈영토화와 영토화의 예시로 들 수 있다. 또 표현적 형태로는 다음의 사실이 눈길을 끈다: "파리에서는 엘리베이터보다 먼저 건립된 아파트 건물 등은 높은 층에 살수록 거주자의 사회적 지위가 낮아지는 명백한 수직적 계층화를 보여 주었지만, 엘리베이터가 도입된 이후로 지역의 계층화가 역전되어, 높은 층의 아파트에 살수록 지위도 높아지게 되었다"(같은 책, 164쪽). 이러한 요소들은 어떻게 배치가 사회에서 표현되며 또 어떻게 물질적인 것 못지않게 표현적인 효과 또한 지닐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5. 이 책의 의의와 한계, 결론
지금까지 나는 마누엘 데란다의 『새로운 사회철학』의 내용을 배치 이론을 해설하며 정리해 보았다. 확실히 데란다의 서술은 들뢰즈의 난해한 철학적 개념들을 실례를 들어 명료화하여 큰 도움이 된다. 또한 들뢰즈의 철학을 단지 공허한 형이상학적 사고에 머물게 하지 않고 사회학에 적용하여 학문의 새로운 지평을 모색한 점 또한 상당한 성과라고 할 수 있겠다. 특히나 그의 본질주의 및 총체성에 대한 비판은 각각 고전철학에 기초한 낡은 사회철학과 무비판적 실증주의로부터 사회학을 구조해 주는 듯하다. 그럼에도 이 책이 가지는 한계점이 있다면, 아무래도 들뢰즈라는 형이상학자를 사회이론에 접목시킨다는 시도가 꽤나 대담한 것이었기에, 다소 개론적인 수준에서 머물러야 했다는 점일 것이다. 내가 보기에 저자는 이 책에서 사회 현상들에 대한 "기술하기"에 다소 집중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들뢰즈의 철학적 과제는 "어떻게 좋은 배치를 형성할 것인가" 하는 것이기에, 어떻게 그의 관점에서 더 적합한 사회적 배치를 형성할 것이며 그럴 수 있는가 하는 다소 근본적일 수 있는 문제는 소홀히 된 것이 다소 아쉽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마누엘 데란다의 『새로운 사회철학』은 배치 이론의 관점에서 사회현상을 기술하고자 한 놀랍도록 대단한 시도이다. 그의 후속 작업이 들뢰즈가 남겨 놓은 과제, 즉 더 좋은 배치의 문제의 해결에 조금이나마 더 다가갈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참고문헌
마누엘 데란다, 『새로운 사회철학』 김영범 옮김, 그린비, 2019
마누엘 데란다, 『들뢰즈: 역사와 과학』 유충현 옮김, 그린비, 2020
질 들뢰즈, 『스피노자의 철학』 박기순 옮김, 민음사, 2001
질 들뢰즈, 『디알로그』 허희정 외 옮김, 동문선, 2021

(주석*) 이 인용문 및 이 글에서 설명되는 배치 개념에 대해서는 필자의 글 「들뢰즈와 배치의 지리학」 참조(들뢰즈와 배치의 지리학 : 네이버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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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 계열은 봐도봐도 모르겠네요.

이때 말해지는 '외재적인' 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먼저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들뢰즈가 말하는 '외재성'이라는 것이 무엇인지에 설명하기에 앞서, 인용하신 저 부분을 조금 수정해 보고자 합니다. 조금 더 명료하게 풀어 쓴다면, 들뢰즈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항들 사이의 연결, 그러나 내적인(본질적인)연결이 아니라 외적인 관계에 의해서 이루어진 연결'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먼저 들뢰즈가 지속적으로 반대하는 철학적 입장인 본질 내재주의(이렇게 불러도 좋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에서는, 대상 간의 관계는 본질적인 것으로 특징지어집니다. 예를 들어 '말벌은 난초를 좋아한다' 또는 '난초는 말벌을 유혹한다'의 예시에서 그들은 이것을 말벌 또는 난초의 본질적인 속성으로 간주할 것입니다. 그러나 들뢰즈에게 있어서 이것은 단순히 (스피노자적인) '우연한 만남'의 결과일 뿐입니다. 그래서 들뢰즈는 저것을 "말벌 그리고 난초"의 문제로 봅니다. (물론 여기서 결국 모든 것을 우연의 산물로 보는 관점으로 귀결되지는 않을까 하는 물음이 생깁니다만, 들뢰즈는 이때 니체의 아모르파티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우연의 필연'이라는 모티프로 그것을 해결하려는 것 같습니다.) 결국, 본문에서 인용했듯이, 모든 것을 존재 동사(is)가 아니라 연결사(and)의 문제로 보려는 것이 들뢰즈의 철학적 기획인 것입니다. 그의 문제는 "더 많은 연결을 만들어내는 것"(『천 개의 고원』中)이기 때문입니다. 들뢰즈에게 있어서 관계는 언제나 우연(만남)의 산물입니다. 말벌이 난초를 좋아한다는 것은 본질적으로는 그 어떤 내재적 특성도 아닙니다. 예컨대 고유명사 또한 "최소한 두 항 사이에서 일어나는 무엇인가를 가리킵니다"(『디알로그』 102쪽).
정리하자면, 위 인용문에서 '외재적'이 뜻하는 의미는, 바로 어떤 개념에서 그것을 특징짓는 두 하위 개념 간의 관계를 본질적인(필연적인) 것이 아니라 우연적인 만남의 산물로 본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 저 외재적이라는 단어는 우연적이라는 말로 (좀 무리스러울 수는 있겠지만) 바꿔 말해도 들뢰즈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같다는 점입니다.

의도치 않게 말이 길어졌고 제가 뜻하는 만큼 명료해진 것 같지는 않아 스스로도 답변이 불만족스러운 것 같지만, 제가 이해한, 그리고 설명할 수 있는 한계는 여기까지인 것 같습니다. 만일 제 답변이 선생님께서 의도하신 바와 거리가 있는 답변이었다면, 선생님께서 '어떤 부분에서' 이 '외재적'이라는 의미를 모르겠다고 하신 건지도 밝혀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 이런 의미이군요. 왜 이제 '창발'이나 '탈영토화' 얘기가 나오는지 조금은 짐작이 가네요. 이건 사실 글쓴이 님의 문제라기 보다는 제가 보기엔 다소간 자의적인 들뢰즈(혹은 데란다)의 용어 선택 때문에 발생한 의문 같네요. 설명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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