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비트겐슈타인 관련해서 질문드립니다!
제가 이해한 바가 맞다면 후기 비트겐슈타인에게 언어놀이는 곧 일상언어이고, 그 안에는 다양한 언어놀이들이 있으며, 그것은 모두 삶의 형식의 일부입니다. 편의상 비슷한 개념인 <언어놀이> <일상언어> <삶의 형식>을 모두 A로 치환하겠습니다.
제가 보기에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에서는 양립 불가능한 두가지 명제가 동시에 주장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1) A는 언제나 이미 성취되고 있다.
가령 후기 비트겐슈타인은 우리에게는 본질적으로 하나의 언어만이 있으며 그것은 일상 언어라고 믿는다(WWK 45쪽)고 말하며 A의 편재성을 주장합니다. (지금 책이 없지만) YOUN님이랑 이승종님이 공동 집필하신 책에서도 이승종 교수님이 비슷한 주장을 하신 것으로 기억합니다. 문제를 일으키는 언어도 일상언어이고, 문제를 치료하는 언어도 일상언어라고 말하시면서, (같은 길이의 선분이 다르게 보이는) 착시현상 사례를 들었던 것으로 기억해요.
(2) A가 성취되지 않을 때 철학적 질병에 빠진다.
저도 (1)이 맞다고 생각하지만 비트겐슈타인 저작 곳곳에 (2)의 흔적이 보여서 헷갈리네요.
가령 낱말들의 형이상학적 사용에서 일상적 사용으로 돌려보낸다고 할 때(116), 초-표현을 사용하는 잘못된 길로 빠진다고 할 때(192), 아픔이 무슨 뜻인지는 알지만 내가 지금 여기 지니고 있는 것이 아픔인지는 모르겠다는 의심의 표현이 언어놀이에 속하지 않는다고 할 때(288) 마치 일상언어 바깥에 다른 언어가 있고 그것에서 벗어나 언어의 고향인 일상언어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되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이 모순을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요? 나아가 비트겐슈타인을 (1)로 볼만한 확실한 근거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전기 비트겐슈타인은 자연과학의 언어와 윤리학/미학의 언어를 엄격하게 구분짓고 전자를 옹호했는데, 이런 식으로 후기 비트겐슈타인을 이해하면 그는 일상언어와 형이상학적 언어(초-표현)를 염격하게 구분하고 전자를 옹호하는 주장을 하는 셈이 됩니다. 이 해석이 맞을까요? 아니면 이분법을 버리고 오히려 모든 것이 이미 일상언어의 일환이라고 이해하는 편이 나을까요?
이 부분이 다소 어색하다고 생각합니다. 다소 애매하게 정식화가 되어 있어서, 오히려 정식화하지 않고 쓰신 문장의 의미에까지도 혼동을 일으키는 것 같습니다.
(1) 일상언어는 이미 잘 사용되고 있다.
말씀하신 것처럼, 비트겐슈타인은 우리의 일상언어가 이미 잘 사용되고 있다고 강조합니다. 일상언어를 해석하기 위해 별도의 메타언어나, 규칙이나, 의미론 따위가 필요하지 않다고 지적하는 거죠. 가령, "대충 여기에 서 있어라."(PI, §71)라는 말에서 '대충(roughly)'이 정확히 어떤 상태이고 '여기에(here)'가 시공간 좌표축에서 정확히 어느 지점을 말하는 것인지 우리가 규정하지 않는다고 해도, 이 말이 완전히 무의미하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 거죠. 그 말이 해당 대화 맥락에서 잘 사용되고 있다면, 그 말은 의미를 지닌 것으로 여겨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2) 낱말의 '형이상학적 사용'이란 실제로는 제대로 된 사용이 아니다.
해석상 다소 논란이 될 수 있는 지점이지만, 비트겐슈타인은 낱말의 '형이상학적 사용(metaphysical use)'이 제대로 된 사용 자체가 아니라고 보는 듯 합니다. 가령, 비트겐슈타인은 '지식', '존재', '대상', '나', '명제/문장'이라는 낱말들의 본질을 파악하려고 하는 철학자들의 시도에 대해 과연 "그 낱말은 자신이 고향을 가지는 언어에서 지금까지 실제로 이러한 방식으로 사용되는가?"(PI, §116)라고 비판적인 태도로 의문을 제기하죠. '형이상학'이라는 표현이 비트겐슈타인의 어법에서는 부정적이고 편향된 의미로 쓰인다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적어도 이 구절은 '형이상학적 사용'이라는 것이 ('사용'이라는 표현과는 달리) 실제로는 언어의 정상적인 사용 자체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3) 낱말이 실제로는 사용되고 있지 않은 데도 사용되고 있는 것처럼 착각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비트겐슈타인이 말하는 '철학적 질병'이란, 낱말이 실제로는 사용되고 있지 않은 데도 사용되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착각하는 상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특정한 맥락에서만 의미를 지닐 수 있는 표현이, 그 맥락을 벗어나서도 보편적인 의미를 지닐 수 있는 것처럼 언급된다면, 바로 이런 착각이 발생하였다고 지적할 수 있겠죠. 가령, "시간이 빠르게 흐른다."라는 말은 은유의 맥락에서 의미를 지니는 표현이잖아요. 그런데 이 표현이 과학의 맥락에서도 의미를 지니는 것처럼 분석하려 한다면, (그래서 '시간의 흐름'이라는 것도 단위 시간 당 위치 변화를 가지는 것처럼 분석하려 한다면,) 이런 분석은 실제로는 사용되고 있지 않은 낱말을 마치 사용되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착각하는 상황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