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마누엘 칸트, 『형이상학의 진보』 요약문 (3) [完]

  1. 2절 라이프니츠-볼프의 시대 이후에 형이상학의 객관, 즉 형이상학의 최종목적과 관련하여 달성된 것
    이 절에서 칸트는 본격적으로 라이프니츠-볼프 시대의 형이상학의 학설을 분석하고 비판하기에 이른다. 먼저 그는 순수이성의 진행 단계를 1, 이론적-독단적 전진, 2. 회의적 정지, 3. 실천적-독단적 완성 단계로 구분한다. 이때 첫 번째 단계는 존재론의 한계 내에서 진행되며, 두 번째는 선험적인 또는 순수한 우주론의 한계 내에서 진행되는데, 이것은 다시 물체적 본성에 관한 형이상학과 사유하는 본성에 관한 형이상햑으로 나뉘고, 전자는 외감의 대상들에, 후자는 내감의 대상들에 관계한다. 세 번째 단계는 신학의 단계로서 신학으로 이끌며 또한 신학을 필연적인 것으로 만드는 모든 선험적인 인식들을 가지고 있다(XX 282 참조).

(1) 형이상학의 첫 번째 단계: 전진
먼저 여기서는 직관의 표상들을 지적인 개념들로 환원시키고 그렇게 지성의 개념들에 의해 표상될 수 없었던 것을 불가능한 것으로 간주하여 상식조차도 왜곡시키게 된 라이프니츠-볼프 형이상학을 비판한다. 그는 식별불가능성의 원칙, 충족이유율, 예정조화설, 단자론을 검토하고 비판하는데, 그의 핵심 논점은 그가 직관의 표상을 모두 지성의 개념으로 환원시킴으로써 모순에 빠졌다는 데 있다.

(2) 형이상학의 두 번째 단계: 정지
다음으로 칸트는 형이상학의 두 번째 단계를 서술하면서, 『순수이성비판』의 "초월적 변증학"의 내용을 재서술하고자 시도한다. 그는 이성이 "조건 지워진 것으로부터 무조건적인 것으로"(XX 287) 나아가려 한다는 점을 지적하며, 그러한 예시들로 수학적 이념들과 역학적 이념들을 제시한다.

A. 수학적 이념(외연적 양에 관련하여)의 이율배반은 세계의 공간적 분량과 시간적 분량에 관계되는 것으로, 먼저 공간상으로는 다음과 같은 이율배반에 빠진다(『순수이성비판』 A426=B454 이하 참조).

정립: 세계는 시간상 시초를 가지고 있으며, 공간상으로도 한계로 둘러싸여 있다.
반정립: 세계는 시초나 공간상의 한계를 갖지 않으며, 오히려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무한하다.

이때 정립명제의 근거는 만일 세계가 유한하다면 세계는 공허한 공간에 의해 한정되어 있을 것이고, 이때 공허한 공간은 지각될 수 없으며 (감지가능한) 현존을 동반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또한 만일 시간에 "시원이 있다면, 공허한 시간이 세계에 선행할 것이며, 이 공허한 시간은 세계의 생성을, 즉 선행하는 무를 가능한 경험의 대상으로 만들 것인데, 이것은 자기모순이기 때문이다"(XX 289).

B. 역학적 이념(내포적 양에 관하여)의 이율배반은 그 내포적 분량이 공간과 시간을 채우는 정도에 관계된다.

정립: 공간 안의 물체적 사물들은 단순한 부분들로 되어 있다.
반정립: 물체들은 단순한 부분들로 되어 있지 않다(XX 289)

이때 정립명제의 근거는 만일 물체들이 단순한 부분들로 되어 있지 않고 무한히 분할가능하다면, 부분들은 물론 실체들이겠지만 그러나 순전한 관계들인 실체들의 합성이 모두 제거된다면, 모든 관계들의 순전한 기체인 순전한 공간 이외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같은 곳). 그러나 반정립 명제는 단순한 것이 공간적으로 표상될 수 있다면 그것은 다시 부분들을 갖는 무한소급에 빠질 것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이 이율배반 또한 불가피하다.

결국 그는 이 이율배반을 통해 다음의 사실들을 밝히고자 한 것이다. (1) 이러한 이율배반들은 공간과 시간 안의 대상들을 순전한 현상으로 간주할 경우에만 빠져나올 수 있다(XX 290). 따라서 이것은 우리의 인식의 제한으로 귀결되기에 이른다. (2) 이러한 두 명제들 간의 충돌은 분석적 대립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이러한 관계라면 배중률에 의해 하나가 참이면 다른 하나는 거짓이어야만 하는데, 이율배반의 경우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3) 이율배반에서 두 명제는 모두 참일 수 있다. 예컨대 '감성계에서 현상들의 인과성은 모두 자연 기계론에 종속된다'는 명제와 '이런 현상들의 어떤 인과성은 이 법칙에 종속하지 않는다'는 명제에서 주어는 서로 다른 의미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칸트의 자유 개념 논의(『순수이성비판』 후반부 참조)로 이어진다. (4) 순수 이성의 회의적 정지 상태를 필히 야기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런 이율배반은 (...) 결국에는 비판을 매개로 하여 이성의 독단적 전진들로 이끈다(XX 292).
칸트는 여기서 자유를 이론적 관점에서는 전혀 인식가능한 것이 아니지만, 실천적인 관점에서는 탐구하고자 한다. 그것이 그의 윤리학 기획의 기초가 된다.

(3) 형이상학의 세 번째 단계: 완성
칸트는 이 논문 전체에서 "학술원의 과제에 따라" 형이상학을 윤리 형이상학이 아닌 이론 형이상학으로 논의를 제한한다. 그는 여기서 자연목적론의 개념에서 최종목적 개념으로 전진해 나아가며, 곧 순수 실천 이성의 최종목적은 최고선이라고 밝힌다(XX 294). 이것은 이론적-독단적으로는 확보될 수 없지만, 윤리적-실천적 관점에서는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 최고선은 단지 자연이 제공할 수 있는 것에서만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이성적인 세계 존재자들의 윤리적이며 가장 합법칙적인 행위에서도 구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칸트는 초월적 이념들을 세 가지로 제시한다. 그것은 각각 우리 "안의", 우리 "위의", 우리 "이후의" 초감성적인 것을 지시한다.
(1) 자유 ("자유, 우리는 여기서 출발해야 한다"[XX 295].) (2) 신 (도덕적인 세계 창조자로서, 도덕성에 적합한 세계 안에서의 지복이라는 이 최종목적의 질료적 조건에 관한 우리들의 무능력을 보충해 준다.) (3) 영혼불멸 (사멸하는 존재자들의 도덕적 행위에 적합한, 우리 이후의 우리의 현존의 지속.)

결국 칸트는 "형이상학은 초감성적인 것에 대한 인식인데, 라이프니츠-볼프의 시대 이후에 무엇을 그리고 또한 얼마나 많은 것을 달성했으며, 그리고 도대체 무엇을 달성할 수 있는가?"(XX 296) 하는 물음만을 남겨 둔다.

  1. 학술원 과제의 해결
    결론적으로 칸트는 라이프니츠-볼프학파의 노력, 즉 이론적 이성에서 초감성적인 것에 도달하고자 했던 노력들을 헛된 것이라고 표명하며(XX 309), 그럼에도 실천적 이성의 영역에서는 충분히 그 초험적 개념들을 가질 수 있음을 강조하며 글을 끝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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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잘 읽었습니다. 이 저술이 칸트 당대의 라이프니츠-볼프 철학과 칸트 자신의 『순수이성비판』을 직접 비교하고 평가하는 내용인가 보네요. 그동안 『순수이성비판』에 대한 가장 좋은 해설서는 칸트 자신의 『형이상학 서설』이라고 생각했는데, 『형이상학의 진보』도 칸트 철학에 대한 칸트 자신의 해설서로 훌륭할 것 같아 보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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