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절⁵ 순수 이성의 이론적-독단적 사용의 범위
다음 절에서 칸트는 "순수 이성의 이론적 인식의 범위는 단지 감관들의 대상들에까지만 미친다"는 명제를 증명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의 논지는 결국 지성개념인 범주조차도 감관의 범위에만 한정된다는 것이다. 이를 논의하기 위해 그는 경험적 개념과 선험적 개념(범주)를 구분한다. 경험적 개념은 감관들의 직관으로부터 논리적 형식 및 일반타당성에 의거하여 끌어내진 것이다. 예컨대 말의 표상에서 네 발 달린 동물이라는 개념이 그러하다. 이에 반해 범주는 직관을 그 '밑에' 두는 인식형식으로서, 선험적 도식으로서 도식화됨으로써 대상을 가지고 적용될 수 있다.
이에 대해서 그는 별로 설명하고 있지 않지만, 이는 충분히 『순수이성비판』을 통해 더 자세히 알아볼 수 있다. 그는 이 저술에서 순수 지성개념의 도식기능에 대해 논구한다. 그에 따르면, "한 개념 아래 한 대상이 포섭될 때는 언제나 대상의 표상은 개념 표상과 동종적이어야 한다"(『순수이성비판』 A137=B176). 그런데 순수 지성개념들은 경험적 직관들과 동종적인 것이 아니다. 그래서 "순수 지성개념들이 어떻게 현상들 일반에 적용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생기는데, 이것을 해결하는 그의 방식이 바로 도식 이론이다. 즉, 범주와 현상을 매개해주는 제3의 것이 있어야 하고, 이것은 한편으로는 지성적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감성적이어야 한다. 이때, 칸트는 "초월적 시간 규정은 보편적이면서도 선험적 규칙에 의거하고 있는 한에서 범주와 동종적"(같은 책, A138=B176)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시간이 잡다한 것의 모든 경험적 표상에 포함되어 있는 한에서는 현상과 동종적이다. 그래서 범주의 현상들에 대한 적용은 초월적 시간 규정을 매개로 가능해진다. 즉 현상들을 범주 아래에 포섭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도식은 상상력의 산물이다(같은 책, A140=B179). 이때 상상력의 종합은 이렇게 이루어진다: 즉, 범주를 시간화하는 것이다. 예컨대 수는 하나에다 동종적인 하나를 연속적으로 더해가는 것이다. 실재성과 부정성은 동일한 시간의, 채워진 시간인가 비워진 시간인가 하는 차이에서 생긴다(같은 책, A143=B182). 이러한 시간화에 따라 범주는 감관의 현상이라는 범위에로 사용이 제한되기에 이르는 것이다.
결국 초월철학의 최상의 과제는, 우리가 결코 경험의 영역을 넘어서지 못하기에, "어떻게 경험이 가능한가?"로 귀결된다(XX 275). 칸트가 경험의 발생을 기술할 때, 그는 통각의 종합적 통일과 지성의 선험적 원칙들을 요구한다.
통각에 대해서도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자.
칸트는 통각의 종합적 통일을 표상들의 결합 일반의 원리로서 제시한다. 이것은 모든 결합의 개념에 선험적으로 선행하는 것으로서 어떤 범주가 아니다(『순수이성비판』 B131). 즉, "나는 사고한다는 것은 나의 모든 표상에 수반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모든 지성사용의 최상 원리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이러한 근원적 통일이 없다면, 그 어떤 경험적 인식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어서 칸트가 제시한 지성의 선험적 원칙들이란 곧 직관의 공리들, 지각의 예취들, 경험의 유추들, 경험적 사고 일반의 요청들로 구분되는(같은 책, A161=B200 참조) 지성원칙을 지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어서 칸트의 논변은 전통적 관념론을 자신의 논의에서 배제하는 것이다. 그는 외적 경험이 문제될 경우 심각한 회의가 생겨나지만, 그럼에도 "지각들은 언제나 우리 안에 있을 것이고, 우리는 어쨌든 객관들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우리의 지각들에만 의지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 바깥의 어떤 것이 지각들에 대응하는지의 여부는 인식의 확장에 아무런 변화도 가져오지 않기"(XX 277) 때문에 형이상학의 전진에서 잃을 것은 없다고 말한다.
이를 통해 칸트는 초감성적인 것에 대한 어떤 인식도, 이성의 사변적 능력에 관한 한, 가능하지 않다고, 즉 순수 지성적인 것들에 대한 학문은 없다고 단언하기에 이른다.
그는 또한 라이프니츠 형이상학의 원리에 대한 간접적인 비판을 제시하는데, 그에 따르면 직관이 의식의 정도—명석함과 애매함—에 의해 구분되는 라이프니츠 철학에서는 공간표상을 단지 경험적인 것으로 간주하리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라이프니츠에서 순전한 직관이란 단지 대상에 대한 애매한(verworren) 개념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이때, 즉 공간을 필연적인 것으로 가정하는 것과의 모순되는 사태를 언급한다. 즉, 그는 공간을 경험적인 것으로 두면서도 "공간은 삼차원을 가진다"는 명제는 명증적인 선험적 명제라고 주장해야만 한다. 또한 여기서는 물체의 개념에서 개념뿐만 아니라 직관이라는 표상 또한 속한다는 점을 증명함으로써, 다시 한번 감성과 지성의 구분을 철저히 하고자 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그는 "초감성적인 것에 관해, 이론적 인식은 가질 수 없지만, 그럼에도 유비에 의한 인식은 (...) 가질 수 있"(XX 280)다고 말하는데, 즉 이념의 상징(간접적 현시)은 대상에 관한 유비에 의한 표상이다.
이어지는 대목에서 칸트는 라이프니츠의 '식별불가능성의 원칙'을 언급하며 비판한다. 식별불가능성의 원칙이란 그 두 대상이 지니고 있는 모든 속성이 정확히 같다는 것을 의미한다. 칸트 또한 물론 "모든 내적인 규정들에서 완전히 동일한 두 사물들이 서로에 대학 바깥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모순"(같은 곳)이라고 말한다. 그럼에도 그가 라이프니츠를 비판하는 점은 공간이란 사물들 자체의 성질이나 관계가 아니라 직관의 표상이라는 것이다(이에 대해서는 『순수이성비판』 A271~2=B327~8 참조).
⁵ 앞선 절과 같은 1절로 중복된다. 필자가 보기에 2절의 오류로 보인다. 편의상 제목에서는 2절로 표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