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마누엘 칸트, 『형이상학의 진보』 요약문 (1)

『형이상학의 진보』

  1. 이 저술에 관해
    『라이프니츠와 볼프의 시대 이후 독일에서 형이상학이 이룬 실질적인 진보는 무엇인가?』(이하 『형이상학의 진보』)는 간트가 1791년 현상 논문 공모전에 응모하기 위해 준비했지만 완성되지 못하고, 세 가지 수고의 형태로 남게 되어 이후 1804년 그의 친구 링크에 의해 발표된 논문이다. 이 저작은 그의 『순수이성비판』(1781/1787)이 종래 형이상학과 관련하여 가지는 지위를 설명하며, 당대의 대표자였던 라이프니츠와 볼프 철학에 대한 그의 최종적인 평가라는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즉, 형식적인 이성의 수행 방식과, 질료적으로는 형이상학의 최종목적에 대한 고찰을 다루는 것이다(XX 265 참조)¹.
    따라서 이 저작의 "첫 번째 부분은 형이상학을 위해 최근에 이루어진 걸음들을", 두 번째 부분은 "순수 이성의 영역에서 형이상학 자체의 진보들을" 보여주고 있다. 이때 전자는 초월철학²의 최근 상태를, 후자는 "진정한 형이상학"의 최근 상태를 포함한다고 칸트는 명시하고 있다(같은 곳).

  2. 1절: 최근에 우리들 사이에서의 초월철학의 역사
    칸트가 이성의 탐구의 도정의 첫 번째 걸음으로서 가장 먼저 언급하는 것은 분석판단과 종합판단을 구분하게 된 일이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의 핵심적 물음인 "어떻게 형이상학이 도대체 가능하긴 한 것인가"(『형이상학 서설』 IV 255)하는 물음을 "어떻게 선험적³ 종합판단은 가능한가?"(『순수이성비판』 B19)라는 물음으로 제시하는데, 그 근거는 그의 저 두 가지 종류의 판단의 구별에 있다. 분석판단은 "술어가 주어 개념에 포함되어 있는 어떤 것으로서 주어에 속하는"(『순수이성비판』 B11) 핀단형식으로, 술어와 주어와의 연결이 동일성에 의해 생각되는 판단이다. 이것은 "술어를 통해 주어 개념에 아무것도 덧붙이는 바가 없이 주어 개념을 단지 분해를 통해서 그 안에서 이미 생각되었던 그것의 부분개념들로 쪼개는 것"이다. 그에 반해 종합판단은 "술어가 주어 개념과 연결은 되어 있지만, 전적으로 주어 개념의 밖에 놓여 있는" 판단으로서, 이 연결은 "동일성 없이" 생각된다. 그러니까 이것은 "주어 개념에다 그 안에서는 전혀 생각할 수 없었던, 그러니까 주어 개념의 분해에 의해서는 끄집어낼 수 없었을 술어를 덧붙이는" 판단인 것이다. 예를 들어서, '모든 물체는 연장적이다'라는 판단은 분석 판단이다. 이에 반해 '모든 물체는 무겁다'는 판단은 종합 판단이라고 할 수 있다. "경험 판단들은 그 자체로 모두 종합적이다"(같은 곳). 여기에서 알 수 있는 바는, 칸트가 결코 선험적(a priori)이라는 용어를 실제적으로 경험에 앞서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그에게 이것은 '논리상' 경험에 앞서 있는 것이다. 칸트는 순수 수학과 순수 물리학을 선험적 종합판단의 탁월한 예들로 제시한다(『순수이성비판』 "초월적 감성학" 참조). 그래서 칸트에게서 이성의 탐구의 도정에서 두 번째 걸음은 '어떻게 선험적 종합판단이 가능한가?' 하는 질문을 제기한 그때이다(XX 266). 이때 이것은 이러한 선험적 종합판단의 가능성을 부정한 철학자 흄에 대한 암시를 제공한다.⁴
    세 번째 걸음은 '어떻게 종합판단들로부터 선험적 인식이 가능한가'라는 과제이다. 이 물음은 선험적 개념들을—경험의 가능성을 위해 필연적인 초월적 개념들을—증명해 내려는 시도로 이어진다.
    이어서 칸트는 선험적으로 가능해야만 하는 직관은 경험적 의식—직관의 질료—에 앞서 있어야 하기 때문에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객관의 형식이 아니라, 주관의 형식이어야 한다고 말한다(XX 266). 즉, "선험적 직관에서 표상될 수 있는 객관의 형식은 이 객관 자체의 성질에 근거하지 않으며, 오히려 대상에 대한 직관적 표상의 능력인 주관의 자연성질에 근거하며, 대상의 직관을 위한 수용성인 감관의 형식적 성질에서 주관적인 것은 단지 선험적으로, 즉 모든 지각에 선행하여 선험적 직관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XX 267)이다. 이는 "이성은 단지 그 자신이 그 자신의 기획에 따라서 산출한 것만을 통찰한다는 것, 즉 (...) 이성 자신이 자연 안에 집어 넣은 것에 따라서 그가 자연 안에서 배워야 할 것을 자연에서 찾는다"(『순수이성비판』 BXIII)는 『순수이성비판』의 대목과도 연결되는 것이다.
    그는 또한 이것이 오직 감각적 존재자인 우리들의 표상 방식에 불과하며, "지성에 의해 객관들을 지각하는, 대상에 대한 직접적인 표상 방식"을 가진 존재자의 존재가능성을 배제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는 『순수이성비판』을 "우리의" 인식에 관한 예비학으로서 목표세우기에, 이러한 반박들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는다.
    어쨌든 이 주관의 직관의 형식에 관한 이론은 "공간과 시간은 주관적 형식일 뿐이며, 전혀 객관들 자체에 속하는 규정은 아니지만, 바로 이런 이유에서 우리는 예컨대 기하학에서처럼 이런 직관들을 규정하는 판단들의 필연성을 의식하면서 이 직관을 선험적으로 규정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때 규정한다는 것은 종합적으로 판단한다는 것(XX 268)이기에, 이 또한 선험적 종합판단의 가능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공간과 시간은 초월적 "관념성"으로 특징지어진다. 이것들은 사태 자체에 속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오로지 주관의 형식적인 성질일 뿐이다. 그럼에도 이것은 현상들에 대해서는 완전한 실재성이기도 한데, 왜냐하면 이것들은 또한 순수 직관의 선험적 '원리'이기 때문에, 주관적인 감각과 달리 경험적 실재성(『순수이성비판』 A28=B44, A35=B52)을 갖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때 "현상"이라는 말은 관념론적인 "이런 표상들은 단지 대상들의 겉모습만을 포함한다는 판단"(XX 269)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겉모습이란 하나의 사물의 표상에서 주관적인 것을 의미하는데, 이것이 판단에서 객관적인 것으로 잘못 간주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어지는 대목에서 칸트는 "단지 내감의 대상, 즉 영혼으로 고찰되는 나는 사물 자체가 아니라 단지 현상으로 알려질 수 있을 뿐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 자신에 대한 모든 인식의 밑바탕에 놓여 있는 순전히 형식적인, 선험적인 내적 직관인 시간 표상은 이 형식을 자기의식의 조건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즉 '경험적인 나와 선험적인 나' 의 문제를 제기하고 이를 해결하고자 한다. 칸트는 "내가 나 자신을 의식한다는 것은 이미 이중의 자아를, 즉 주관으로서의 자아와 객관으로서의 자아를 포함하는 사유"(XX 270)라고 언명한다. 즉, 사유하는 자아는 인격이지만, 사유되는 자아는 다른 대상들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사태일 뿐이다. 첫 번째 의미에서의 자아는 통각의 주체로서, 결코 그것이 어떤 것인지 인식될 수 없다. 왜냐하면 "실체적인 것에 내속해 있는 우연적 성질들을 모두 제거했을 때 남아 있는 것이 더 이상 전혀 인식될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칸트는 무한소급에 빠지지 않기 위해 더 이상 사유 불가능한 절대적인 자아를 상정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에 반해 경험적 자아(심리학적 자아)는 다양하게 인식될 수 있다. 이 경험적 의식은 지각의 주체로서, 시간표상을 가진다.
    칸트는 더 나아가서 순수한 선험적 지성개념이 있다고 밝히고자 한다. 이때 그가 사용하는 논증은 객관에 대한 표상에서 그것은 "하나의 공간에 다른 공간을 덧붙임으로써만"(XX 271), 또 '하나의 시간에 다른 시간을 덭붙임으로써만' 이루어지는데, 이때 합성된 것 자체의 표상은 순전한 직관뿐만이 아니라, "합성이라는 개념"을 필요로 한다는 논리이다. 그러므로 "감관들에 주어지는 대상들이 종속해야 하는 선험적 개념들은, 의식을 동반하는 합성(종합)의 종류만큼 지성에 놓여 있을 것이다"(같은 곳). 그러나 여기서 이 합성을 공간ㆍ시간표상의 방식인 '곁하여', '잇따라'(『순수이성비판』A169=B211 참조)를 지시하는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되고, 오히려 '지성의' 종합 작용으로 생각되어야 한다. 이것은 어쨌든 순수 지성개념이라고 일컬어지는데, 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이에 대한 표를 제시한다(『순수이성비판』 A80= B106). 그리고 이 범주들은 공간과 시간이라는 감성의 형식들에 의존하지 않는(XX 272) 지성 개념들로서, 여기서도 감성과 지성에 대한 칸트의 철저한 분리를 엿볼 수 있으며, 이것이 후에 그의 윤리학의 기본전제가 된다. 칸트는 또한 근원적 개념으로 지속, 변화를, 파생된 개념(준술어)로 운동 개념을 제시하는데, 이 또한 『자연과학의 형이상학적 기초원리』를 범주 이론의 체계 위에 토대짓는 씨앗이 된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칸트의 순수 이성 비판 작업은 "형이상학의 정초"를 목적으로 하며, 형이상학의 목적이란 감성적인 것으로부터 초감성적인 것으로 확장하려는 시도에 다름아니다(XX 273). 이때 칸트는 이것이 "위험한 도약"이 되지 않으려면, 이 이행에서 사태의 진행과정으로서 회의(懷疑)를 필요로 한다고 말하면서, 순수 이성의 단계를 학문론(전진)—회의론(정지)—지혜론(최종목적으로의 이행)으로 구분하고, 이때 첫 번째 것에 이론적-독단적 학설을, 두 번째 것에는 회의적 지침을, 세 번째 것에는 실천적-독단적 학설을 포함시키는데, 이는 마치 헤겔이 『정신현상학』에서 감각적 확신과 회의주의 그리고 절대지로 사태의 본성적 이행을 그려낸 것과도 유사하다고 할 수 있겠다.

각주

  1. 이 저작을 인용할 때는 학술원판 권호에 면수를 덧붙여 이와 같이 표기한다. "A판 쪽수=B판 쪽수"의 형식으로 표기할 『순수이성비판』을 제외하고서는 모두 이러한 방식으로 표기할 것이다.

  2. 본서의 번역본(최소인 옮김, 이제이북스, 2009)에는 이 transzendental을 "선험"으로 번역하고 있지만, 필자는 편의상 이를 "초월"로 바꿔 읽고자 한다.

  3. 필자는 칸트의 용어 a priori를 "선험적"으로, a posteriori를 "후험적"으로 번역하여 사용하기로 한다.

  4. 이에 대해서는 F. 카울바흐, 『임마누엘 칸트』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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