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론장의 초국적화: 탈베스트팔렌적 세계에서 공론의 정당성과 유효성에 대하여
낸시 프레이저에 따르면 공론장은 <규범적 정당성>과 <정치적 유효성>이라는 두 가지 비판이론적 함의를 지닌다. 왜냐하면 (1) 형성 과정이 포용적인 한, 공론은 비판적 검토를 견뎌 낼 수 없는 관점을 기각하고 있는 관점의 정당성을 보장하고, 또 (2) 공론을 정치적 힘으로 전환하여 관료들이 책임을 지게 만들며 국가의 행위가 시민들의 의지를 표현하도록 보장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녀에 따르면 오늘날 많이 논해지는 ‘초국적 공론장’이라는 것은 전통적인 공론장 개념이 가진 위 두 가지 측면과 잘 연결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초국적 공론장은 (1) 정치적 삶에 대한 동등한 참여권을 가진 정치공동체의 구성원들 사이에서 행해지는 의사소통이 이루어지는 곳이 아니라는 점에서 <정당성>을 잃고, (2) 주권 국가와 무관한 것이라는 점에서 <유효성>을 잃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는 ‘초국적 공론장’ 개념을 버릴 필요는 없다고 주장한다. 오히려 요구되는 것은 탈국민국가적 상황에 적절한 공론장 개념을 재구성하는 것이라는 것이 그녀 주장이다. 이 과정에서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기존의 공론장 이론이 전제하던 베스트팔렌적 토대에 대한 검토다. 즉, 공론장 개념이 구제 불가능할 정도로 베스트팔렌적인지, 아니면 탈베스트팔렌적으로 재구성될 수 있는 것인지 검토해야 한다.
그녀 계획은 다음과 같다; (1) 하버마스의 공론장 이론에 암묵적으로 전제된 베스트팔렌적 가정을 설명하고, 그를 비판하던 여러 비판적 이론에도 베스트팔렌적 가정이 숨겨져 있음을 보인다. (2) 양자 모두가 가정한 베스트팔렌적 가정에 문제를 제기하는 초국적성이 지닌 특징을 설명한다. (3) 공론장 이론들이 탈국민국가적 상황에서 취해야할 방향을 설정한다.
1절. 고전적인 공론장 이론과 그에 대한 급진적 비판: 베스트팔렌적 틀의 주제화
낸시 프레이저에 따르면 하버마스의 <공론장의 구조변동>에서 공론장은 국민[민족]국가로 받아들여지는 제한된 정치공동체, 주권을 가진 영토국가와 동연적인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즉, 해당 저서에서 하버마스는 공론장에 대한 베스트팔렌적 틀을 암묵적으로 전제하고 있다. 그리고 바로 이런 이유에서 그의 공론장에 관한 이론은 현존하는 베스트팔렌적 국가들의 민주주의적 결함을 확인하고 비판하는 규범적 지위를 갖추게 된다. 예컨대, ‘진정으로 정당하게 국가적 공론으로 간주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와 같은 규범적 질문과 ‘국가의 공론이 정치적 유효성을 갖는가?’와 같은 효력에 관한 질문을 던질 수 있었다.
그녀는 하버마스의 비판적 이론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크게 두 가지 흐름의 반론이 제기됐다고 설명한다. 첫째는 공론으로 간주되고 있는 것의 정당성을 따지는 <정당성 비판>으로, 이에 따르면 하버마스는 ‘명목상으로는 공중의 구성원인 사람들의 공적인 토론의 완전한 당사자로서의 타인들과 동등하게 참여할 능력을 박탈하는 체계적 장애물[계급적 불평등과 신분적 위계질서]의 존재를 은폐한다(143-144).’ 둘째는 공론의 유효성을 따지는 <유효성 비판>으로, 이에 따르면 하버마스는 ‘토론을 통해 형성된 공론이 가지는 정치적 힘을 박탈하는 체계적 장애물[경제적 권력과 공고한 관료적 이해관계]을 온전하게 파악하지 못했다(144).’ 하지만, 낸시 프레이저가 보기에 이러한 비판들은 모두 유효한 비판이나, 베스트팔렌적 틀을 당연한 것으로 간주했다는 점에서 하버마스와 하버마스 비판가들은 같다. 마지막으로 그녀는 <사실성과 타당성>에 대해서도 논하는데, 하버마스가 해당 저서에서 앞서 설명한 두 가지 양상의 비판을 수용헀지만, 여전히 베스트팔렌적 틀은 가정한다고 지적한다.
2절. 탈국민국가적 상황: 베스트팔렌적 틀에 대한 문제제기
낸시 프레이저는 현재의 공론 형성 과정이 베스트팔렌적 틀을 거의 무시하고 있기에, 해당 틀을 암묵적으로 가정한 공론장 이론을, 나아가 그것이 주던 비판적 기능을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주장한다. 이런 이유로 공론장 이론은 비판받아야 하고 개정되어야 한다. 그녀는 공론장 이론의 핵심 가정을 여섯 가지로 구분하고 비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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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이론에서는 베스트팔렌적-국가의 시민이 의사소통의 당사자로 규정됐지만, 오늘날의 의사소통의 ‘당사자’는 시민으로 구성되지 않는 일련의 분산된 대화 참여자들인 경우가 많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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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이론에서는 베스트팔렌적-국가의 경계에 근거한 베스트팔렌적-국가의 이익으로 규정되었던 의사소통의 ‘내용’은 지구 전체의 경제에 관한 것으로, 초국적인 위험공동체로 확대되었다. 그렇지만 이런 공동체가 그것에 부수되는 폭넓은 연대성이나 정체성을 동반하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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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이론에서 베스트팔렌적-국가의 영토로 규정되었던 의사소통의 ‘장소’는 이제 점차로 탈영토화된 사이버공간으로 변화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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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이론에서 의사소통을 위한 언어적 매체는 베스트팔렌적-국가에 의존한 단일한 모국어였지만, 인구가 뒤섞인 결과 민족 언어는 국가에 상응하지 않고 현존하는 국가들 자체가 사실상 다언어적 상황에 처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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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이론에서는 베스트팔렌적 국가의 출판매체로 규정되었던 의사소통의 ‘방법’은 이제 분산적이고 중첩적인 시각문화들로 이루어진 광대한 초언어적 관계망을 포괄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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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는 공론에 대해서 응답해야만 하는 것이 주권을 가진 영토국가로 규정되었지만, 오늘날 의사소통의 '‘청취자’, 수신자는 이제 손쉽게 인식할 수도 없고 책임을 부여할 수도 없는 공적이고 사적인 초국적 권력들의 무정형한 혼합물이 되어 버렸다.
3절. 공론장을 다시 새롭게 사유하기
(1) 공론장의 정당성에 관한 문제
공론장 이론에서 공론이란 <오로지 잠재적으로 영향을 받을 수 있는 모든 사람이 그들의 공동의 관심사를 처리하는 것과 관련된 토의에 동등한 자격으로 참여>할 때, <정당성>을 갖춘다. 이런 이유로 정당성을 판별하는 조건은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토론에 참여할 수 있도록 승인된 사람이 누구인가를 따지는 **<포용성 조건>**으로, 이 조건은 <토론은 원칙적으로 결과와 관련된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어야 한다>을 의미한다. 또 하나는 대화 참여자들이 어떻게 관계 맺는지를 따지는 **<동등성 조건>**으로 <원칙상 모든 대화 참여자들은 그들의 견해를 진술하고, 문제를 설정하고, 다른 사람이 가진 암묵적 혹은 명시적 가정을 문제 삼고, 필요한 경우 논의 수준을 바꾸고, 일반적으로 그들 의견이 공정하게 청취될 수 있도록 하는 데서 대체로 평등한 기회를 누려야 한다>이다.
베스트팔렌적 틀에 기반한 기존의 공론장 이론은 위 두 조건을 <시민권>에 호소하면서 충족시키려 했다. ‘영향받는 사람들’과 ‘확립된 정치공동체의 구성원’을, ‘의사소통적 동등성’을 ‘영토국가 내에서 동등한 정치적 지위’를 동일시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존의 공론장 이론은 <동등성 조건>에 몰두하고, <포용성 조건>에는 덜 관심을 가졌다. 즉, 공론장에서 시민들이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냐는 문제에 집중하면서, 공론장에 참여해야 하는 사람들이 ‘시민’이라는 점에는 의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탈베스트팔렌화하는 현시대에 공론장의 당사자에 관한 문제는 다루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현재 상황에서 공론 결과에 영향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영토국가 내의 시민에 한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이제는 시민권에 호소해서 공론장의 <포용성 조건>을 만족시킬 수 없는 시대이다.
여기서 낸시 프레이저는 자신만의 약소한 대안을 내세운다. 그녀가 내세우는 방안은 당사자, 즉 공중의 범위를 재설정하는 것이다. 그녀는 공중의 범위는 “관련된 사회적 상호작용은 협치구조의 범위에 상응해야 한다”라면서 “공론은 정치적 시민권과는 무관하게 관련된 협치구조에 공동으로 종속된 모든 사람이 동등한 자격으로 참여하는 의사소통 과정을 통해서 산출된 경우에만 정당하다”라고 주장한다(167-168). 이런 이유로 협치구조가 국가들의 경계를 넘어서는 경우, “그에 상응하는 공론장들 역시 초국적인 것”이 되어야 하고, 그렇지 않은 경우 “그런 공론장이 형성하는 견해들은 정당한 것으로 간주될 수 없다”라고 그녀는 주장한다(167-168).
(2) 공론장의 정치적 유효성에 관한 문제
공론장 이론에서 공론은 <공적 권력의 행사가 시민사회의 숙고된 의지를 반영하도록 만들고, 또 공적 권력에 책임을 부과하는 정치적 힘으로 동원>될 때, <정치적 유효성>을 갖춘다. 이런 이유로 유효성을 판별하는 조건은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의사소통 권력의 흐름과 관련된 **<번역 조건>**으로, 이 조건은 <시민사회에서 형성된 의사소통 권력은 먼저 구속력 있는 법률로, 다음으로는 행정권력으로 번역되어야만 한다>를 의미한다. 또 하나는 행정 권력의 능력과 관련된 **<능력 조건>**으로, 이 조건은 <공적 권력은 그것이 응답해야만 하는 토론을 통해 형성된 의지를 실행할 수 있어야만 한다>를 의미한다.
기존의 공론장 이론은 위 두 조건이 베스트팔렌적 국가에 의해 충족된다고 보았다. ‘공론의 수신자’와 ‘법률을 실행하는 데 필수적인 행정 능력을 보유한 자’ 모두가 ‘베스트팔렌적 국가’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존의 공론장 이론은 <번역 조건>에 몰두하고, <능력 조건>에는 덜 관심을 가졌다. 시민사회와 국가 사이의 민주적 권력순환의 문제에 집중하면서, 국가가 시민들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치는 사적 권력을 규제할 수 있는 능력을 보유하는가에 관해서는 충분히 다루지 않았다. 즉, 국가의 능력은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하지만 탈베스트팔렌화하는 현시대에 국가의 능력에 관한 문제는 다루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현재 상황에서는 근대 영토국가가 자국의 경제와 환경 등을 조절 및 보호하고 안전과 복지를 제공할 능력을 오롯이 갖고 있다고 여기기에 힘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낸시 프레이저는 “초국적인 문제들을 해결할 행정능력을 가지고 있는 초국적인 공적 권력들을 창출”하고 “그것들을 새로운 초국적인 공론장에 복속”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171). 바로 이 경우에만 공론장은 정치적 유효성을 가지게 되고, 공론장 이론은 두 요소를 구체적으로 주제화할 경우에만 탈베스트팔렌화된 시대에 비판적인 이론으로 작동할 수 있다는 것이 그녀 주장의 핵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