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south님이 굉장히 잘 설명해 주셨습니다. 여기에 몇 가지 더욱 상세한 설명을 덧붙여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 구조주의가 실존주의를 극복했다?
일반적인 해설에 따르자면, 1960년대 이후 프랑스 사상계에서의 주류 입장은 실존주의에서 구조주의로의 변화를 겪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구조주의를 소개하는 글들이 이런 변화를 책의 앞부분에서부터 아주 강조하면서 '구조주의의 승리'를 선언하죠. 가령, 프랑수아 도스의 『구조주의의 역사』라는 책 제1권에는 다음과 같은 설명이 있습니다.
사상적 지도자로서의 사르트르의 면모가 퇴색하면서 철학자들은 위기·불확실성·의혹의 순간을 맞게 된다. 그러자 그들은 각광을 받기 시작한 인문사회과학을 이용해서 비판적 문제 의식을 날카롭게 가다듬는다. 그들은 주관성의 철학, 주체의 철학으로서의 실존주의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다. 사르트르적 인간은 ‘실존이 본질에 선행’하기 때문에 자유에만 집착한 채, 자기 의식의 지향성에 의해서만 존재한다. 단지 소외와 허위 의식만이 자유에 이르는 길을 방해할 뿐이다. 2차대전 직후에 이러한 사르트르의 철학에 심취하여 사르트르파라고 자처하던 롤랑 바르트 같은 지식인들이, 그런 철학에서 차츰 멀어져 구조주의에 전적으로 참여하게 된다. 주체와 의식 대신 규칙·코드·구조가 득세하는 것이다. (Dosse, 1998: 25-26)
그런데 이 설명은 실존주의의 입장에서 보자면 다소 부정확하고 편향적입니다. 실존주의가 '의식', '지향성', '주체'라는 요소들을 강조한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해서 '규칙', '코드', '구조'라는 주제를 무시하고서 실존에게 무한정한 자유를 부여하려 했던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의 실존이 우리가 내던져진 세계의 구조적 조건으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않다는 것이 실존주의의 핵심 강조점 중 하나죠. 야스퍼스의 '한계상황(Grenzsituation)' 개념이나, 하이데거의 '피투성(Geworfenheit)' 개념이나, 카뮈의 '부조리(absurdité)' 개념이 이러한 강조점을 명시적으로 말하고 있기도 하고요.
반대로, 구조주의의 입장에서 보더라도, 구조주의가 반드시 실존주의를 비판해야만 하는 사조인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구조주의와 실존주의는 같이 갈 수 있는 요소들이 아주 많죠. 가령, 레비스트로스 같은 구조주의 인류학자들은 그동안 근대가 비논리적이라고 치부한 '신화적' 사유 혹은 '야생적' 사유들이 그 나름의 이항대립 구조에 따라 '논리적'으로 짜여 있다는 점을 드러냈습니다. '근대의 과학'과 '야생의 사고' 중 어느 쪽이 다른 쪽에 비해 절대적으로 더 우월하다거나 열등하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 구조주의의 핵심 주장이죠. 이런 주장은 과학으로 진리를 찾고자 하는 시도에 대한 실존주의의 비판과도 상당 부분 일맥상통합니다. 세계에는 고정된 '본질'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을 뿐더러, 과학이 그 본질을 드러내 줄 수 있다는 생각이 정당하지 않다는 것이 실존주의의 강조점 중 하나였으니까요.
(2) 실존주의는 카뮈와 사르트르 이후 죽었다?
그래서 1960년대 이후 실존주의의 쇠퇴는 단순히 실존주의가 구조주의에 의해 극복되었기 때문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굳이 말하자면, 당대 프랑스 사상계를 대표하고 있던 사르트르에 대한 지식인들의 의심과 환멸로 인해, '사르트르의 실존주의'에 대한 대안으로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가 주목받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특별히, 사르트르는 스탈린의 공산주의를 옹호하고 한국전쟁 당시 북한을 옹호하기도 하면서, 자신의 친한 친구들이었던 메를로퐁티와 카뮈로부터도 절교당하기도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사르트르가 지성계에서 가지고 있던 위상을 대체할 만한 인물로 레비스트로스가 자연스럽게 부상하였다고 보는 것이 당대의 정황을 잘 나타낼 것입니다.
실존주의라는 사조 자체의 통찰과 함의는 1960년대 이후에도 철학계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칩니다. 특별히, 오늘날의 유럽의 정치철학은 실존주의와 뗄 수 없이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가령, 자크 데리다의 『죽음의 선물』과 칼 슈미트의 『정치신학』은 키에르케고어의 사유를 현대적으로 계승한 저작들입니다. 그 둘은 모두 키에르케고어의 유명한 저작인 『공포와 전율』을 해설하고 있죠. (칼 슈미트는 드러내 놓고 '키에르케고어'라는 인물을 언급하지는 않지만, 예외상태에 대한 자신의 논의가 어느 '프로테스탄트 신학자'에게서 나왔다고 고백합니다. 그 인물이 키에르케고어라는 사실은 기정사실화되어 있죠.) 그리고 이 논의들이 이후에 발터 벤야민, 조르주 아감벤, 샹탈 무페 등에게까지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치면서 오늘날 급진 정치철학의 논의들을 낳았습니다.
실존주의 내부에서도 카뮈와 사르트르 이후의 논의들을 찾을 수 있습니다. 가령, 가브리엘 마르셀의 실존주의가 어떤 의미에서 카뮈와 사르트르의 실존주의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는 '그 이후' 논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생몰년도로만 따지자면 마르셀은 사르트르와 동시대인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는 40세 때 가톨릭으로 전향을 하면서 소위 '유신론적 실존주의자'가 됩니다. (마르셀은 '유신론적 실존주의'라는 표현을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종종 자신도 자신의 입장에 대해 이 표현을 적용합니다.) 그러면서 사르트르의 실존주의에 대해 비판적인 관점에서 자신의 논의들을 풀어가는데, 그러다 보니 마르셀의 이 논의들이 실존주의 내부에서 제기된 카뮈와 사르트르 이후의 한 입장이라고 해도 좋을 듯합니다.
- 사족이지만 <오늘의 신학공부>라는 유튜브 채널에 실존주의에 관한 강의가 하나 올라올 예정이라고 합니다. 중세의 실존 개념에서부터 시작해서, 키에르케고어, 하이데거, 야스퍼스, 마르셀, 카뮈, 사르트르를 지나, 실존주의와 구조주의의 관계에 대해, 더 나아가 실존주의의 미래에 대해 아주 포괄적으로 소개하는 강의라고 하네요. (아래 영상 말미에 '촬영을 마친 강의'로 등장하는 'ㅅㅈㅈㅇ ㅊㅎ'이 아마 '실존주의 철학'이 아닌지에 대한 강력한 의심(?)이 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