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생각이 드는 명제가 '사람이 왜 살아야하는가'였습니다. 그것에 대해서 수 많은 철학자와 사람들이 답변을 해주었고 저도 어느 정도 이해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다른 한 가지가 머릿속을 지배합니다. '왜 인간은 자살하면 안 되는가.' 아주 허무주의스러운 질문입니다. 모두 다 한 번 쯤은 생각하셨다시피 삶에 대해 허무함을 느끼지 않습니까. 과거를 돌아보면 기억에 가장 남는 것은 괴로운 기억이 가장 많습니다. 행복한 순간이 있다면 괴로운 순간도 있습니다. 행복을 보면서 살아봤자 고통의 순간은 찾아올 수 밖에 없습니다. 앞으로의 미래는 불행 밖에 없을게 분명하고 사람은 어차피 죽게 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 속에서 인간은 왜 자살을 선택하면 안 되는가. 비과학적인 윤회나 환생은 집어치우고 천국과 지옥은 쓰레기통에 집어넣은 채로 다시 한 번 물어봅니다. 죽음 후의 세상은 그 누구도 알지 못하고 증명할 수 없는데, 왜 죽음을 무서워하는가. 그럼 그 죽음이라는 단어가 무서워할 필요가 없다면 왜 자살을 하지 않는가. 만약 모든 전세계 인구한테 아무 고통 없이 죽을 수 있는 스위치가 있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 버튼을 누를까.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이 명제에 대한 답을 알고 싶은데, 추천 책이 있으면 받고 싶습니다.
삶의 의미는 '반드시' 종교에서만 발견될 수 있다고 보는 사람으로서, 저는 "비과학적인 윤회나 환생은 집어치우고 천국과 지옥은 쓰레기통에 집어넣은 채"로서는 어떠한 답도 주어질 수 없다고 보는 입장입니다. 하지만, 굳이 질문자님의 요청에 맞는 책을 하나 고르자면, 카뮈의 『시지프 신화』를 추천드릴 수는 있습니다. 이 책은 다음과 같은 유명한 구절로 시작합니다.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바로 자살이다. 인생이 살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를 판단하는 것이야말로 철학의 근본 문제에 답하는 것이다. (알베르 카뮈, 『시지프 신화』, 김화영 옮김, 민음사, 2016, 15쪽.
그리고 카뮈는 궁극적으로 이 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답합니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부조리의 경험이 자살과는 얼마나 거리가 먼 것인지 알 수 있다. 자살은 반항에 뒤이어 오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이다. 왜냐하면 자살은 반항의 논리적 귀결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 자살은 그것 나름의 방식으로 부조리를 해소해 버린다. 자살은 부조리를 바로 죽음 속으로 끌고 들어간다. 그러나 나는 부조리가 지탱되려면 부조리 자체가 해소되어버려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안다. (알베르 카뮈, 『시지프 신화』, 84쪽 인용자 강조.)
한 마디로, 삶의 부조리 앞에서 진정으로 반항하는 사람은 자살 따위는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자살은 부조리를 있는 그대로 직면하고 견뎌낼 만한 능력이 없는 사람들이 하는 선택이라는 것이 카뮈의 평가입니다.
오, 저도 "태어나지 않는 것이 낫다"를 추천하려고 했어요.
"사람은 왜 살아야 하는가?"라는 물음을 명제로 여길 수 있을지는 모르겠네요. 기회가 닿으면 한국인들이 명제라는 단어를 어떻게 쓰고 있는지 제가 한번 조사하고 싶습니다.
저는 "앞으로의 미래는 불행밖에 없을 게 분명하고"라는 @ch618618 님의 말씀에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의 미래에 불행밖에 없거나 그럴 가능성이 매우 크더라도, 그 사람이 자살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가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이미 태어난 사람의 현존, 다시 말해 그 사람이 현재 살아 있는 일 자체가 가치 있기 때문입니다. 제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 분도 계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미 태어난 사람의 생명이 소중하다고 믿는 분들은 그 사람이 현재 살아 있는 일 자체도 가치 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저는 천주교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4년 전부터 성당에 다니지 않고 있습니다. 지금 저는 저 자신을 불가지론적 무신론자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종교가 없는 사람도 제 주장이 참이라고 믿을 수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미 태어난 사람의 현존은 그 자체로 가치 있다."라는 명제는 과학적 방법으로 입증할 수 없습니다. 제가 보건대, 이는 원래 각자가 참이라고 믿을지 말지 정해야 되는 명제입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한국을 비롯한 많은 나라가 이 명제를 공리(公理, axiom)로 받아들였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따라서 그런 나라는 이 명제가 참이라고 믿지 않는 사람의 자살 시도를 막으려고 할 것입니다.
사람은 어차피 언젠가 죽는데 뭐 하러 스스로 일찍 죽어야 되나요? 어떤 사람은 죽음이 두렵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일생을 알차게 보내고 싶을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자살하고 싶지 않겠죠.
그 부분을 읽어보진 않았지만 베너타의 human predicament에 제한적으로 자살을 옹호하는 논증이 있다고 알고있습니다
"죽음에 대한 형이상학과 윤리학: 새 에세이들"이라는 책의 13장을 데이비드 베너타가 썼는데, 그 제목이 '자살: 제한적인 옹호'네요.
현재 절판이지만 이 책 추천 드립니다. 내가 감히 자살을 '해석'하려고 했구나 반성하도록 도와준 책입니다.
여기에 더해 이 자살, 허무, 절망을 어떤 태도로 극복하는가 질문이 생기신다면 도스토옙스키의 4대 장편, 한스 큉 <나는 무엇을 믿는가>, 변선환 <인생은 살 만한가> 추천합니다. 다들 그리스도교적 작가이지만, 내용은 너무나도 인간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