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트를 읽지 않고 헤겔을 읽어도 될까요?

얼마 전에 서울대 김상환 교수님이 헤겔의 정신현상학을 소개하는 강의를 봤습니다. 사실 헤겔에 대해선 크게 관심이 없었는데 굉장히 재밌을 것 같더군요. 그래서 ‘아무래도 헤겔을 읽으려면 칸트를 읽긴 해야겠지’ 하고 생각하고 있는데 도저히 책(순수이성비판)에 손이 가지 않았습니다. 이유는 제가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탐구를 읽고 진성 신도가 되어버려서 순수이성비판을 읽는 것이 딱히 의미 있는 일이 아니라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첫째로 칸트를 읽지 않고 헤겔을 읽어도 되는지 혹은 읽을 수 있는지를 여쭤보고 싶고

둘째로 칸트를 읽어야 한다면 순수이성비판에 있는 비트겐슈타인 후기철학의 입장에 대항할 만한 주장이나, 꼭 대항하는 주장이 아니더라도 뭔가 의미 있게 읽힐 수 있는 부분을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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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칸트 철학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헤겔을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특히나 헤겔이 <정신현상학> 내에서 넌지시 언급하는 비판적 대목들이 무엇을 말하는지 제대로 캐치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꼭 <순수이성비판>을 직접 읽으실 필요는 없고, "적어도" 칸트에 관한 2차 문헌이나 <형이상학 서설>쯤은 먼저 읽으셔야 하겠습니다.

(2) 비트겐슈타인의 후기철학에 대해서는 저는 아는 바가 없습니다만, 의미 있게 읽을 수 있는 부분이라면 "초월적 변증학" 또는 순수 지성개념의 "초월적 연역"(B판) 정도가 있지 않을까 해요. 사실 <순수이성비판>도 파고들어 보면 상당히 탐구할 주제가 많은 책이라고 생각해요. 당장 "촉발"의 문제만 해도 칸트에서 피히테, 셸링, 헤겔로 이어지게 된 계기 중 하나라고 할 수 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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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크게 안 될 건 없다고 생각하는 주의입니다. 물론 칸트를 읽으면 이해도가 높아지는 것은 사실입니다만... 그렇다고 읽지 말라고 하는 건 조금 멀리 가는 게 아닌가 싶어요. 결국 칸트를 몰라도 충분히 첫 리딩에 배울 건 많고, <정신현상학>을 한 번 읽은 후에 칸트를 읽고 다시 돌아와서 읽어도 되는거니깐요. 저 같은 경우도 첫번째 철학 수업이 헤겔의 <정신현상학>이었는데, 칸트를 공부하지 않고도 꽤 많이 배웠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헤겔은 워낙 어려우니 입문서를 구하시는 게 일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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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읽는다'의 수준을 어느 정도로 잡을지에 따라 다를 것 같습니다. yhk9297님의 말씀처럼, 반드시 칸트를 깊이 공부하지 않고도 헤겔의 전반적인 아이디어를 이해할 수는 있습니다. 다만, fuersichsein님의 말씀처럼, 헤겔의 텍스트 속 행간을 제대로 읽으려면 칸트에 대한 일정 수준 이상의 이해는 필수적입니다.

(2) 솔 크립키(S. Kripke)와 데이비드 루이스(D. Lewis) 이후의 영어권 주류 분석철학은 비트겐슈타인의 사유에서는 많이 멀어졌습니다. 다만, 비트겐슈타인의 사유를 비판적으로 극복하였기 때문에 멀어졌다기보다는, 다른 철학적 주제들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비트겐슈타인의 사유가 상대적으로 소외되는 현상이 발생하였다고 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크립키의 『이름과 필연』이나 루이스의 "Counterpart Theory and Quantified Modal Logic" 정도가 분석철학 내의 비트겐슈타인 이후 경향을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텍스트라고 할 수 있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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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부분이 칸트의 『순수이성비판』과 비트겐슈타인의 관계에 관해 물으신 것이라면, 이와 관련된 내용은 서강대 철학과의 고 김영건 선생님의 블로그에서 많이 찾으실 수 있습니다.

https://blog.naver.com/sell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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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못읽는다고 하긴 어려울 것 같습니다. 어쨌든 헤겔의 저작은 그 자체로 시작과 완결을 가진 작품이고, 따라서 주장을 이해하는 정도에는 문제 없습니다. 그러나 헤겔적 사유가 시작된 근원을 추적하고, 어떤 문제에 대답하고 있는지를 면밀하게 바라보는, 소위 '풍부한 독해'를 위해서는 칸트의 철학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엄밀한 독해가 목표가 아니어도 접근하는 난이도에 차이가 날 수도 있는데, 헤겔은 칸트까지 철학사가 쌓아올린 어떤 '산' 위에서 사유하고 있는 만큼, 거기까지 접근하는것이 칸트를 읽지 않은 경우보다는 어려울 수가 있겠습니다. 미적분의 개념을 순수 논리로만 본다면 초등학생도 이해할 수 있지만, 이전의 수학 개념들이 잘 잡혀있지 않다면 난이도가 급격히 상승하는 것처럼요.
그래서 적어도 칸트에 대한 도식정도는 가져가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처음부터 모든 것을 알 필요도 없고, 그렇게 하는 것도 불가능하니 칸트를 완독하고 갈 필요는 없지만, 칸트의 물자체-현상 개념과 그 도식 내에서 인간의 지위 정도는 가져가시는게 헤겔을 정확하고, 빠르게 읽는 데에 많은 도움을 주리라 확신합니다. 추가로 피히테-셸링으로 이어지는 독일 관념론의 계보 또한 아시면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칸트의 문제에 이들이 어떻게 응답하는지를 중심으로 보시면 좋을 것 같아요.

(2)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은 제가 읽어본 텍스트가 <철학적 탐구> 정도뿐인지라 내용적으로는 정확히 말씀드리기는 어렵지만, 일반적인 접근법의 차원에서 조언을 드려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비트겐슈타인 또한 칸트 이후의 지적 전통 속에 살았던 사람이니만큼 영향과 차이를 분석해보는 방향의 독해가 괜찮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칸트식의 인식론이 서양에서 설득력있게 받아들여졌던 만큼 비트겐슈타인이 칸트가 훌륭하게 지적하는 부분을 어떻게 빠져나가고 있는지, 혹은 관련이 없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등을 생각해보면서 읽으신다면 보다 풍부한 비트겐슈타인에 대한 이해가 가능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칸트 이후 형이상학의 주요 과제는 순수이성비판을 벗어나는 것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칸트의 영향력은 크기 때문에, 의미가 없는 일이 절대로 아닐 거에요.

제가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탐구를 읽고 진성 신도가 되어버려서 순수이성비판을 읽는 것이 딱히 의미 있는 일이 아니라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사유의 폭을 스스로 제한 두는 것이 아닐까요? 읽어보고 "역시 무의미한 일이었어" 라고 느끼는 것 조차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들 감사합니다.
제가 약간 강박적이기도 하고 철학을 공부한다면 결국 언젠가는 읽게 될 거라 생각해서 칸트부터 읽어보기로 결정했습니다.
언제부턴가 의미 있는 일을 새로운 생각을 얻는 일로만 생각한 것 같네요. 차분하게 충분한 시간을 들여 텍스트를 파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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