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하기’의 한 방법 : 빈말에 관한 짧은 노트
Ⅰ
도서관 한 구석에 먼지를 덮어쓰고 세월 가는 줄 모른 채 누렇게 늙은 철학책에서도, 어제 막 꽂혀 찬바람이 빠지지 않아 책장이 빠당빠당한 어린 철학책에서도 우리는 ‘철학하기’라는 말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그런 것을 보면 아주 오래 전부터 철학이 현실과 동떨어진 것이어서는 안 된다는 점은 사람들 사이에서 널리 받아들여져 왔던 것 같다. 철학자들은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철학하기’를 실천해왔고 그 결과로 종종 ‘철학화한 세계(philosophised world)’를 세상에 내어놓았다.
그런데 이 ‘철학화한 세계’라는 결과들은 그 영향력이 강해서인지, 우리의 관심을 거시적이고 하나의 통일체를 가진 거대 담론으로 이끌곤 한다. 이런 거대 담론은 대체로 철학의 많은 부분 영역들을 패키지로 담고 있어서, 존재론과 사회적 실천 이론, 미학이나 인간학에 이르는 방대한 주제를 하나의 이론적 틀 안에서 다루는 경우가 많다. 역사의 변곡점에서 이러한 체계를 가진 패러다임적 사상이 중요한 역할을 한 것 같기는 하다. 하지만 나는 이런 거대 담론이 때로는 내적 일관성에 치중한 나머지 세계를 이해하는 과정에서 여타의 학문들이나 실제 세계 자체와 오히려 멀어져버릴 위험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에 대해 자세히 논하는 것은 이 글의 목적이 아니다. 그보다 나는 현실과 맞붙어 철학하는 조금 다른 방식을 제시하고자 한다. 《테아이테토스》에서 소크라테스는 “놀라워하는 것 이외에 철학의 다른 시작은 없다”라고 말한다. (Plato (2013) 155b.)
그런데 비단 처음 보거나 상식을 벗어나는 어떤 것에 대해서만 놀라워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매우 가깝고 친밀한 소재이지만 곱씹어 생각해보면 그 본성에 관해서 우리가 아는 바가 별로 없는 그런 것들이 있다. 실제로 많은 철학적 탐구의 주제들은 의심하지 않았던 것에 대한 의심으로부터 출발한 경우가 많다. 데카르트의 방법적 회의는 물론이고 인과 개념에 대한 흄의 주장이라든지, 지식 개념에 대한 게티어의 반례도 그러한 사례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데이빗 루이스가 “철학자의 직업은 다른 사람들이 두 번 생각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진부한 것에 물음을 던지는 것이다.” (Lewis (2002) p.1.) 라고 말한 것은 바로 이런 점을 정확히 지적하는 것 같다. 내가 추구하는 방식은 바로 그런 것들에 주목하고 탐구하여 ‘작지만 단단한 진리’들을 모아가는 것이다.
아마도 이쯤 되면 이 두루뭉술한 이야기가 어디로 흘러갈지 의심스러운 독자도 있을 것이다. 이제 나는 위와 같은 동기로 한동안 고민했었던 ‘빈말’이라는 주제를 소개할 것이다. 처음 빈말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을 때, 나는 작은 놀라움을 경험했다. 주변에서 빈말을 하는 사람을 종종 봐왔고 가끔은 이것 때문에 고민스럽기도 했을 만큼 가까이 있는 말이었는데도 빈말의 특징을 곰곰이 생각해보니 아주 이상한 말이라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이 주제에 대해 만족할만한 탐구결과를 냈다면 한 편의 발표논문으로 제출했겠지만 나의 학문적 자원이 부족하여 안타깝게도 그러지 못했다. 부끄럽지만 아래에서 소개할 내용은 개념적 잔해물에 가깝다.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이 주제가, 내가 그랬던 것처럼, 흥미롭기를 바라며 지금부터 ‘빈말’에 관한 생각들을 펼쳐놓아 보겠다.
Ⅱ
빈말은 내가 생각하기에 꽤나 특이한 언어현상이다. 우선 대략 분류했을 때, 빈말 현상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눠볼 수 있다. 하나는 언어 표현이 전달하는 바와 실제로 생각한 것 사이에 질이나 정도의 차이가 있는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표현의 의미와 실제 의미가 아예 무관한 경우이다. 오늘 나의 발표가 끝나고 누군가가 나에게 와서 “상당히 통찰력 있는 내용이었습니다.”라고 말을 건넨다면 높은 확률로 첫 번째 종류의 빈말일 것이다. 그는 내 발표가 마음에 들지 않았을 수도 있고 흥미롭게 들었지만 그 정도까지는 느끼지 못했더라도 내 기분을 염두에 두고 그렇게 말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 종류의 빈말은 주로 인사말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예컨대, 헤어질 때 “언제 밥 한 번 먹어요.”라고 말한다든지, “또 연락할게!”라고 말하는 경우가 그렇다. 사실상 이는 헤어질 때의 상투적인 인사를 대체하는 말이지 표현 그 자체의 의미는 없다고 봐야할 것이다.
내가 주목하고자 하는 유형은 두 번째 유형이다. 만일 헤어지는 상황에서의 관습적인 빈말이 “하늘이 붉네요.”처럼 혼동의 여지가 없는 표현이었다면 단순히 새롭게 고착된 언어 표현으로 여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언제 밥 한 번 먹어요.”나 “또 연락할게.”와 같은 표현은 실제로 식사 약속을 잡거나 연락을 주겠다는 것인지 이처럼 빈말이 아니라 언어표현 자체를 의미하는 경우를 나는 이하에서 빈말과 대비하여 ‘찬말’이라고 이름 붙일 것이다. 아니면 그저 빈말인지 혼동을 줄 수 있는 표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런 빈말을 주고받는 언어생활을 한다.
문제의 포인트는 ‘이 현상을 어떻게 합리적으로 이해할 것인가’에 있다. 어떻게 해서 특정한 표현이 빈말의 용법으로 정착하게 되었는지, 그러한 언어 현상이 바람직한 것인지는 물음의 대상이 아니다. 이 점에 주목하여 아래에서는 내가 시도해 본 몇 가지 방법들을 제시해보겠다.
(1) 우선 빈말을 사용할 때 의사소통의 성공과 실패가 있다는 점은 비교적 분명해 보인다. 나에게는 종종 있는 일인데, 상대방이 “언제 밥 한 번 먹자.”라고 했을 때 내가 실제로 날짜를 잡으려고 하면 상대방이 당황하곤 한다. 이는 빈말을 통한 의사소통이 실패한 경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의사소통의 실패는 내가 상대방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는데 실패했기 때문에 발생한다.
화자의 의도와 의미와 관련해서는 그라이스(H.P.Grice)의 비자연적 의미(meaningNN) 개념이 유용한 도구가 될 법도 하다. 그라이스는 비자연적 의미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Meaning”이라는 논문에서 그라이스는 자연적 의미와 비자연적 의미의 차이를 여러 가지 예시로 보여준다.
"A가 x라고 말함으로써 어떤 것을 비자연적으로 의미한다.”는 대략 “A는 청자에게 어떤 효과를 나타내기 위해 x를 발화(utter)하고자 의도했고, 그 효과는 청자가 그 의도를 인식함으로써 발생된다.”와 동치이다. (Grice(1991), p.220.)
자연적 의미와 비자연적 의미의 가장 큰 차이는, 자연적 의미는 “붉은 반점은 홍역에 걸렸음을 의미한다.”처럼 청자의 의도 인식과 무관한 반면 비자연적 의미는 “(치과에서) 손을 들면 아프다는 것을 의미한다.”처럼 청자가 발화자의 의도를 인식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 구분에 따르면 일반적인 의사소통에서 중요한 것은 비자연적 의미라고 할 수 있다. 일단 위 정의에 따르면 어떤 의도적 발화를 통해 의미하려는 바가 전달되려면 즉, 의사소통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상대방의 발화 의도를 인식해야만 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성공적인 의사소통은 서로의 의도에 대해 공통 지식(common knowledge)을 필요로 하는 것 같다. 말하자면, “내가 p를 의도했다는 사실을 상대방이 알고 있고 나는 그 사실을 다시 알고 내가 안다는 그 사실을 상대방도 알고…”와 같은 식의 지식이 필요하다. 여기까지는 일반적인 찬말 의사소통에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 같다. 그런데 빈말의 경우 단순히 내가 p를 의도했다는 것뿐 아니라 x의 언어표현을 문자적으로 이해했을 때 추론할 수 있는 의도와 다른 특정한 의도가 있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는 공통 지식이 한 겹 더 추가된다. 이렇게 배(倍)로 복잡한 맥락을 가진 표현이 어떻게 일상적으로 사용될 수 있는지는 여전히 불분명하다. 나는 어쩌면 한국어가 맥락의존성이 높은 언어라고 평가되는 이유가 이런 것 때문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2) 의사소통과 관련하여 그라이스는 대화의 격률(maxim)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그는 칸트의 4개 범주를 차용하여 몇 가지의 격률들을 제시하는데, 그 중에는 태도의 격률(the maxim of manner)로서 표현의 불분명성을 피하고(Avoid obscurity of expression) 애매성을 피하라(Avoid ambiguity)는 격률이 제시된다. (Grice(1991), p.27.)
그런데 빈말 의사소통은 이 두 격률에 분명히 어긋나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그라이스는 사람들의 의사소통이 반드시 이러한 지침을 따르지는 않는다고 인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들의 대화가 어느 층위에서는 그러한 격률을 따르는 것으로 해석하려는 경향이 있다고 보고, 이를 바탕으로 대화함축(conversational implicature)이라는 논의를 이끌어나간다. (Levinson(1993), p.113.)
안타깝게도 이 부분은 앞서 언급한 나에게 부족한 학문적 자원에 속한다. 빈말의 경우가 그라이스의 논의에 포섭될 수 있는 경우인지는 확실치 않다. 하지만 언뜻 보기에 최소한 빈말은 의사를 전달하는 ‘안정적인’ 의사소통 방법은 아닌 듯하다. 도대체 이런 것은 왜 하는 것일까?
(3) 앞서의 물음과 관련하여 하나의 실용적인 이유를 제시할 수는 있을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사람들이 특정한 말을 빈말로 많이 쓰기 때문이다. 이러한 결론은 다음과 같은 모델링으로부터도 얻을 수 있다.
“언제 식사 한 번 하시죠.”라는 말을 두 가지 의미(찬말과 빈말) 중 하나로 하거나 받아서 의사소통을 성공시키고자 하는 순수 조정 게임(pure coordination game) 조정 게임(coordination game)의 가장 간단한 예는 외길에서 서로 마주보는 상황이다. 마주 본 두 사람은 모두 왼쪽 또는 모두 오른쪽을 선택할 경우에만 길을 지나갈 수 있고 그 외의 경우에는 길을 지나가지 못한다. 이처럼 두 당사자가 같은 종류의 선택을 할 경우에만 이익을 보는 게임 형태를 조정 게임이라고 한다. ‘순수’라는 수식어는 왼쪽이나 오른쪽을 확률적으로 선택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을 생각해보자. 그렇다면 의사소통이 성공하는 경우는 찬말로 하고 찬말로 받을 때와 빈말로 하고 빈말로 받을 때일 것이다. 반대로 서로의 의도가 어긋나는 경우에는 의사소통이 실패할 것이다. 이 경우 각각에게 –1의 효용이 있다고 생각하고, 찬말로 의사소통을 할 때가 빈말로 의사소통을 할 때보다 조금 더 높은 효용이 있다고 해보자. 그리고 상황을 단순하게 만들기 위하여 각자는 어떤 말로 말하거나 이해할 지 미리 정해놓는다고 하자.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표가 만들어질 것이다.
이 때 각자가 취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으로 이루어진 조합은 (찬말, 찬말)과 (빈말, 빈말)이다. 이는 앞서 의사소통의 성공조건과도 같다. 그런데 두 조합을 비교해보면, (찬말, 찬말)의 결과가 (빈말, 빈말)의 결과보다 훨씬 낫다는 것을 쉽게 관찰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빈말, 빈말) 조합이 두 사람의 최선의 선택으로 이루어진 조합인 이유는 무엇일까?
한 가지 설명 방법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임의의 n명 중 2명이 무작위로 위와 같은 상황에 처한다고 해보자. 그리고 n명 중에 찬말 전략을 취하는 사람의 비중이 p라고 해보자. 그렇다면 내(P1)가 임의의 대화자(P2)와 만났을 때 그 사람이 찬말 전략을 취할 확률은 p(0<p<1)이다. 이 상황에서 내가 찬말을 했을 때와 빈말을 했을 때의 기댓값을 각각 구해보면 다음과 같다.
E(찬말) = 3p + -(1-p) = 4p-1
E(빈말) = -p + (1-p) = -2p+1
그렇다면 두 기댓값이 같아지는 조건은 p=1/3인 경우이고, 따라서 p<1/3인 경우에는 빈말을 할 때의 기댓값이 찬말을 할 때의 기댓값보다 높아진다. 즉, 찬말을 하는 사람이 3명 중 1명꼴보다 낮은 경우에 빈말을 하는 게 의사소통이 성공할 확률이 높기 때문에 사람들은 “언제 식사 한 번 하시죠.”라는 말을 빈말로 쓰는 전략을 택할 것이다.
물론 이와 같은 분석 도구가 빈말이라는 현상을 이해하는데 부분적으로 도움을 줄 수는 있다. 그러나 여전히 본질적인 물음은 남는다. 단순히 ‘사람들이 많이 쓰기 때문에’라는 이유는 혼동이 생길 수 있는 언어 표현을 사용하는 그 자체의 비합리성을 설명하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Ⅲ
이상은 나의 어질러진 머릿속의 한 장면이었다. 이것들 중 확실한 것은 거의 없다고 생각한다. 빈말이라는 현상에 대해 내가 파악하지 못한 부분들도 있을 것이고, 개념 적용이 아예 잘못 되었을 수도 있다. 또 어쩌면 이 현상 자체가 은유(metaphor)와 같이 이미 연구되고 있는 특수한 언어 현상의 한 부분으로 간주될 수도 있을 것이다. 설령 그렇다고 해도 여전히 이런 방식의 ‘철학하기’가 흥미롭게 전달되었다면, 보잘 것 없는 이 글이 나름의 역할을 한 것이라 생각한다.
참고문헌
Grice, H. P. (1991) Studies in the Way of Words, Cambridge: Harvard University Press
Plato (2013), 정준영 옮김, 『테아이테토스』, 서울: 이제이북스
Levinson, Stephen (1993), 이익환·권경원 옮김, 『화용론』, 서울: 한신문화사
Lewis, David K. (2002), Convention, Oxford: Blackwell Publishing
이상은 제가 학부생 때 지역 대학 연합학술대회에서 자유기고 요청을 받아 제출, 발표한 원고의 전문입니다. 올빼미 시즌 1때 제출한 원고이기도 하죠ㅎㅎ 문득 생각이 나서 읽어보았는데 역시 다시 보니 좀 부끄럽긴 합니다. 하지만 부끄러움을 견디는 것이 발전의 정도(正道)라고 생각하여 Postscript를 첨부하여 올려봅니다.
비록 내용은 빈약하지만 저에게는 많은 가르침을 준 글이자 경험이었습니다. (적어도 제가 찾아본 바로는) 누구도 그 본성에 관해 묻지 않았던 주제에 관해 몇 개월간 고민하고 알기 위해 새로운 분야를 공부해보기도 하면서, 응용 학문의 소스를 끌어와보기도 했었습니다. 이 짧은 글에 실린 방법론과 분야들, 그러니까 화용론과 non-standard한 언어현상, 게임이론 등은 지금 저의 희망연구 분야가 걸쳐있는 영역이기도 합니다. 또 기말 과제로 억지로 써서 내야 하는 글이 아니라 내가 즐거워서, 꾸준히 고민해보고 쓴 글은 비록 그 내용이 분명치 않더라도 좋은 영감을 줄 수 있다는 걸 깨달은 경험이기도 했습니다.
지금에 와서 그 내용을 다시 보자면, 접근 방식이 틀려먹은 것 같진 않다고 생각합니다. 빈말을 통한 의사소통은 분명히 화용론적 현상이고, 따라서 맥락의존적이며, 개별문장이 특정 맥락에 의해 결정되는 단순한 상황이 아니라 화자가 청자가 서로의 의도를 계산하는 과정이 포함된 복합적인 현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선생님께서 지적해주신 바처럼 speech act의 성격이 두드러진 것이기도 하고 말입니다. 다만 위 글에서 취했던 접근 방식보단 common ground로서의 전제(presupposition)와 맥락이 어떻게 작동하는 지에 대한 더 깊은 고찰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공부하는 주제이기도 하구요)
주제는 재밌는데 이게 어떤 깊은 통찰을 줄 것 같냐는 질문에 처음에는 아마도 그렇지 않을 것 같다고 답했었습니다. 일종의 표면적 퍼즐이라고 할까요. 그런데 문제를 바꾸어 이런 언어 현상들이 다이나믹한 맥락 변동에 근거를 두고 있다고 한다면 어떤 의의가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일반화할 순 없지만 특히 한국어의 강한 맥락의존성을 고려해볼 때 우리에겐 매우 흥미로운 주제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최근에 든 물음인데, "눈치"라는 말이 가리키는 건 무엇일까요? 어떤 심적 능력일까요? 무엇인진 모르겠지만 모종의 맥락 학습성과 강한 관련이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의견 남겨주시면 좋은 자극이 될 것 같습니다ㅎㅎ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