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데거의 1934년 강의록 『언어의 본질에 대한 물음으로서의 논리학』에서 그는 논리학의 철학적 근본물음을 "언어의 본질에 대한 물음"으로 제시하고 그것을 인간 본질 존재물음에서 찾고자 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 자신은 누구인가?"하는 이 누구-물음이 이 책의 주요 과제다.
언어는 "어떤 경우에서든 인간적인 활동이다"(51쪽). 따라서 언어의 본질에 대한 물음은 인간에 대한 물슴으로 이어진다. 그런데 인간의 본질에 대한 물음으로서 "인간이란 무엇인가"하는 이 무엇-물음은 잘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다양한 인종과 계통에 따라, 다양한 문화, 세계관, 시대에 따라 주어지는 인간의 다양한 삶의 형식과 외적 형식"(58쪽)에서 이루어지는 물음이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서는 외형적 다양성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더구나 이런 방식의 물음은 인간을 "앞서부터 사물 및 사태처럼 우리가 어딘가에서 만나고 있는 것, 많은 다른 눈앞에 있는 것들 중의 어떤 것으로서 앞서 발견하는 것으로 가정하고 있기 때문"(59쪽)에 부당하다. 이런 물음에서는 그 존재자에 가깝게 되는 대신에 그것으로부터 밀쳐내는 위험이 있다. 모든 본질이 항상 무엇임으로서 규정될 수는 없다. 따라서 "인간은 누구인가"하는 누구-물음이 다른 방식으로서 제기될 수 있다. 여기서 인간은 "자기-자신"으로서 제시된다(65쪽). 하이데거는 나와 너 그리고 우리가 모두 이 자기-자신임을 통해 규정되며 그것들의 공통근원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우리-물음은 곧 현존재의 실존론적 조건이 "결단성"임을 드러낸다. '우리'는 결단 속에서만 본래적인 우리이다(100쪽). 하나의 결단성이 우리의 자기-자신으로-거기에-있음을 형성하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결단으로 아해 현존재는 개별화된다. 그럼에도 그 뒤에는 '우리'라는 "은폐된 조화"가 배경적으로 존재하고 있다. 결단에서만 현존재는 나임과 동시에 우리이다. 따라서 '우리는 누구인가?'하는 물음에 대한 대답은 "우리는 민족이다"라는 것이다.
결단성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사건에 관여하기를 원함(119쪽)이다. 그는 강의실의 학생들에게 결단성이란 "교육사건에 관여하기를 원함"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결단성은 나의 존재를 선취한다. 다시 말해서, 현존재의 근본조건으로서 결단성이 있다. 이것은 하나의 사건(Geschehnis)이지만, 익숙한 의미에서의 그것인 '돌발사건'은 아니다. 그렇다면 이 '사건'이란 무엇인가? 이로부터 역사성이란 무엇인가 하는 또 하나의 근본물음으로 이끌린다.
역사적인(geschichtlich) 것은 역사기술적인(historisch)것과는 구별되어야 한다. 인간의 사건은 지식적이고 의지적임으로 규정되는데, 이러한 사건은 언제나 '알림'(Kunde), 즉 알려질 수 있다(그러나 가령 개미의 사건들은 역사박물관에 전시되는 그런 알림을 겪지 않는다고 그는 말한다. 하이데거의 인간중심주의적 존재론에 대해서는 더 자세히 후술할 것이다). 이렇게 사건이 알려지는 한에서만 그것은 역사기술적이다. 그런데 역사알림, 역사기술, 역사과학은 곧 역사(Geschichte)에 의존하지 그 역이 아니다. 따라서 역사성이란 무엇인가 하는 물음이 중요한 것이다.
역사성이란 무엇인가?—그 이전에, 또는 더 근본적으로, 우리는 역사적인가? 하이데거는 그렇다고 말한다. 더구나 우리는 누구인가 하는 물음에 그는 "우리는 민족(Volk)이다"라고 답한다. 우리는 민족으로서 역사적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역사적 사건에 처해 있기 때문이다. 역사성은 "민족의 사건, 우리의 사건"(180쪽)이다. 역사로서의 사건은 인간의 탁월한 존재방식이다(212쪽). 그러나 역사성은 시간성에 대한 이해 없이는 이해될 수 없다. 왜냐하면 "역사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시간적인 사건 안에 함께 출현하는 것, 그 주변에 내던져져 함께 움직이는 것"(173쪽)이기 때문이다. 여기, 이 역사성에 자리에서 우리는 결단함으로서만 존재할 수 있다. "역사적 존재는 비역사적인 것과 역사적인 것 사이에서 끊임없는 결단으로 고양된다."(179쪽) 이런 역사, 이런 시간성으로서의 '기재함'은 "이전부터 우리의 본질을 현성하고 있는 것"(180쪽)에 다름아니다. 과거는 기재성에 의해 규정된다. 미래는 그 기재성, 즉 "이전부터 현성하고 있는 것"에서 규정된다. 이것은 "우리 자신을 향해 다가감"(188쪽)이며, 이로부터 시간의 근원적 통일성이 구성된다. 이 한가운데에 "현재"가 있다. 이것은 곧 '넘어감'이다. 현재는 기재성으로부터 미래로 넘어감으로서만 존재한다. 이 넘어감으로서의 현재는 수행, 즉 순간 속에서 시간화한다(203쪽). 그리고 이 수행, 이 넘어감을 하이데거는 "노동"(Arbeit)이라고 명명한다. 이 노동은 현존재의 근본 규-정(Be-stimmung)이다. 노동 속에서, 그리고 노동을 통해 존재자는 우리에게 그것의 존재에서 개방된다(237쪽).
하이데거는 현존재의 근본규정으로서 근본기분, 노동, 사명을 제시한다. 노동은 앞서 살펴본 대로 "옮겨져 있음"이다. 사명은 우리를 우리 자신에게 다가가게 하는 것이다. 사명으로서 우리의 임무는 기재성으로부터 우리의 미래를 시간화한다. 즉 이것은 "앞을-향해-떠맏고-있음"이다. 근본 기분(Stimmung)은 좀더 근원적인 규정이다. 그것은 현존재는 언제나 기분지어져 있다(Gestimmtheit)는 사실에 의해 규정된다. 그러나 이것은 어떤 심적 표상, 그때그때 일어나는 슬픔 같은 일시적인 기분으로 오해되어서는 안된다. 오히려 이 기분은 "현존재가 근원적으로 가장 깊고 넓게 존재자에 개방되거나 닫히는 시간적 힘의 근본사건이다."(205쪽) 이러한 기분지어져 있음은 우리를 존재자 한가운데 "내어놓여져 있도록" 한다.
이런 규정 속에서 우리는 우리를 시간성에서 경험한다. 이때 인간은 "현존재"라고 불릴 수 있다.
지금까지는 하이데거가 말하는 현존재의 근본규정에 대한 요약이었다. 그러나 그는 왜 역사성을 현존재의 본질로서 강조하는가? 다른 동물들이나 식물들도 역사적이지 않은가? 하이데거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자연은 무시간적이기 때문에 무역사적이다"(212쪽). 하이데거는 여기서 내부시간성과 시간성을 구별하기에 이른다. 전자는 동식물과 사물, 즉 자연의 시간이다. 그것은 시간을 통해 그 고유적인 존재가 규정되는 것이 아니다. 반면 현존재는 시간성으로 규정된다. 여기서 하이데거는 인간중심주의의 존재론을 가져오는 것으로 보인다. 그에게 있어서 동물은 근본기분조차도 지니지 않는다. 그들은 언제나 "얼빠져 있다". 이로써 그는 현존재, 즉 인간에 존재론적 지위를 부여한다. 그러나 이것은 내가 보기에 하이데거 철학의 가장 큰 결함으로 남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하이데거는 그의 존재론을 통해 주-객 전통구조는 극복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인간 주체의 우위성은 극복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분석은 왜 중요한가? 그것은 우리가 '자기상실'의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언제나 본래적으로 존재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비본래적으로 존재할 때가 많다. 하이데거는 현존재 분석을 통해 우리를 그 본래적 존재로 열어밝히고자 한다.
강의를 마치며 그는 원래 물음으로 되돌아가, 언어의 본질은 무엇인가 하고 묻는다. 그리고 그의 대답은 다음과 같다. "근원적 언어는 시짓기이다."
이에 대한 설명은 그의 횔덜린 강의에서 더 자세히 읽을 수 있다. 간단히 말해서, 인간은 시적으로 거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술적 언어는 이런 우리를 자기망각에 빠지게 만든다. 이런 현대적 상황에서 그는 인간의 본질에 대해 묻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하이데거의 철학을 전기와 후기로 나누려는 시도가 존재한다. 물론 그의 사유의 분위기가 매우 다르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것이 두 시기의 단절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 책 『언어의 본질에 대한 물음으로서의 논리학』은 마치 그 두 시기, 즉 존재시성(存在時性)과 존재시성(存在詩性)의 두 시기를 잇는 징검다리 역할을 하는 듯 보인다. 과거는 근원적으로 이전부터 우리의 본질을 현성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후기의 하이데거가 말하는 존재를 현성하는 시적인 "존재의 소리"에 다름아니다. 다시 말해서 하이데거의 기초존재론에는 존재의 시짓기적 성격이 이미 잠정적으로 드러나 있다.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더 자세히 쓰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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