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포용적인 정치적 소통(85-131)
1절. 외적 배제와 내적 배제
민주주의라는 규범은 포용과 정치적 평등을 요구한다. 정치적 결과는 그 결과를 준수하거나 결과에 적응해야 하는 사람들이 그 결과 형성의 일부일 때 정당성을 가지기 때문이다. 이 정당성을 해치는 방식으로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외적 배제
-정의: 마땅히 포함되어야 하는 개인과 집단을 고의적으로 혹은 우연히 토론과 의사결정 포럼에서 배제하는 방식. 즉, 토론과 의사 결정 과정 밖에 사람들을 남겨두는 방식.
-대표적인 양상:
(1) 사전 담합(back-door brokering)
(2) 시공간의 제약을 통해 형식적으로 접근을 막는 경우
(3) 사회적으로 힘 있는 자들이 미디어 시간을 매수하거나 투자 위협을 통해 정치적인 지배력을 행사하는 경우
-제시된 해결 방법: 민주적 과정 참여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부나 지위의 영향을 제한하기, 투명성·소명 책임성·심의적 공중이라는 규범적 접근.
■내적 배제
-정의: 사람들이 공론장과 의사 결정 절차에 접근 가능하지만, 타인의 생각에 영향을 실질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없도록 배제하는 방식. 즉, 명목상 포용하나 사실상 배제하는 방식.
-대표적인 양상:
(1) 논리적 주장은 공유된 전제를 요구하는데, 그러한 전제는 정치적 갈등 상황에서 항상 존재할 수는 없기에 사실상 목소리를 일축하는 경우.
(2) 논리적 주장은 논리정연함이라는 규범을 요구하는데, 이는 그렇지 않은 방식(예를 들어 몸짓, 감정, 비유적 표현)으로 주장을 하고 근거를 대는 사람들 주장의 내용이 아닌 스타일을 문제 삼아 배제하는 경우.
(3) 논리적 주장은 질서 있음을 강조하는데, 이를 근거 삼아 주장을 펼치는 데 꽤 효과가 있는 소란스럽고 감정적인 표현을 배제하는 경우.
-앞으로 제시될 해결 방법: 논리적 주장뿐만 아니라 호감 인사, 레토릭, 내러티브를 유의미한 정치적 소통방식으로 인정하기. 세 가지 방식은 토론과 심의의 저변을 강화한다. 셋은 논리적 주장만으로 불가능한 이해와 상호작용을 가능케 하고, 또 논리적 주장에 힘을 실어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들이 남용 및 조작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지만, 이는 논리적 주장도 마찬가지다.
2절. 호감 인사, 즉 공적 인정(Greeting, or Public Acknowledge)
공적 토론 참여자들은 타인이 받아들일 수 있는 적절한 논거를 갖고 있어야할 뿐만 아니라, 그들이 설득하고자 하는 타인을 명시적으로 인정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내적 배제가 이루어지면 포용이라는 민주적 규범은 성취되지 않는다. 앞으로 ‘호감 인사’라는 이름으로 명명할 공적 인정은 민주적 실천에 있어 중요하고 구체적인 소통 제스처 중 하나이다.
■호감 인사
-정의: 사람들이 서로의 개별성(particularity)을 인정하는 일상 소통의 모멘트. 타인을 토론에 포함된 것으로 인정하는 소통적인 정치적 제스쳐.
-예시: ‘안녕’ 같은 인사, 칭찬, 존중하는 태도, 포옹, 음식이나 마실 것을 권하기, 본론 직행 전 사소한 담화
-이론적 근원: 레비나스는 소통을 두 가지로 나눈다. 하나는 내용을 표현하는 소통이고, 또 하나는 인정 과정으로서의 소통이다. 레비나스에 따르면 세상에 대해 언급하려는 내용을 매개하지 않고도 타인에게 마음을 열고 직접적으로 인정하는 것(후자)이 주장과 논거 제시(전자)에 선행하는 것이자 조건이다. 바로 이 후자가 호감 인사이다. 즉, 전달하려는 생각과 언급하고 행동하며 공유하려는 세상에 앞서, 화자가 상대에게 당신을 위해 ‘여기 있어요’, ‘당신이 있다는 것을 알아요’라고 이야기하는 곳에서 다른 인격체의 마음을 여는 제스처가 존재한다.
-기능:
호감 인사가 없다면, 즉 상대에 대한 존중과 정중함의 제스처가 없고 단지 내용을 표현하는 소통만이 있다면, 사람들은 서로에 대한 경청을 중단하려 할 것이다. 호감 인사 없는 소통은 자신의 진리나 옮음을 추구하며 세상일을 처리하기만 하는 소통으로 여겨질 것이다.
호감 인사는 사실 정보를 제공하지도 않고. 근거나 비판점을 가지고 직접적으로 논리적 주장을 진척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정중함, 경의, 타인의 특별하고 각별한 관점에 대한 인정 등을 표현하는 모멘트가 없다면, 토론은 와해될 가능성이 높다. 그 결과 도래하는 것은 힘의 정치(power politics)뿐이다.
하지만 호감 인사를 통해 토론 참여자들은 그들이 대하는 타인이 정치 과정의 일부임을 인정하고, 그들을 대하는 우리는 그들이 우리에게 대하듯 그들에게 소명 책임이 있음을 인정할 수 있게 된다. 호감 인사가 기능하는 인정은 정치적 상호작용과 경합을 위한 기본 출발점의 역할을 한다.
3절. 레토릭의 건설적 사용(Affirmative Use of Rhetoric)
많은 민주주의 이론은 합리적 말하기와 레토릭을 구분하고, 또 우열 관게를 부여하며 합리적 말하기에 치중되어 있다. 하지만 이 구분은 허구다. 중립적·보편적·감정적이지 않은 표현이라고 여겨지는 것은 사실 특정하게 위치 지어진 사회적 지위와 관계에 대한 레토릭적 뉘앙스를 수반한다. 따라서 논리적 주장을 중시하여 비-레토릭적 말하기에 기반해 심의 민주주의를 구상하려는 노력은 폐기되어야 한다. 심의 민주주의는 레토릭을 인정해야 한다. 이에 더해 레토릭 정치적 소통에 긍정적으로 기여하기도 한다.
-하버마스 비판:
레토릭으로부터 합리적인 논리적 주장을 분리하려는 최근의 시도는 하버마스의 <의사소통행위이론>에서 드러난다. 그는 ‘언표’, ‘언표적 행위’, ‘언표효과행위’를 구분한다. 그 후, 그는 언표효과행위를 본인 목적에 복무하도록 타인을 조종하는 전략적 행위와 연결한다. 그가 보기에 언표효과행위와 같은 것은 소통적 상호작용을 방해하기에, 언표효과행위를 배제하고자 한다.
하지만 의미하는 것만을 전적으로 소통하고 이해에 도달하려는 발화행위의 기능과, 청자에게 특정한 효과를 끌어내려는 화자의 어떤 전략적 목표에 이바지하는 발화행위를 구분한다는 것은 자의적이다. 그러한 분리는 언표와 언표효과행위 모두를 모든 발화행위의 측면으로 이론화하는 오스틴과 설의 발화 이론에서 벗어난다. 제각각의 모든 의사소통 노력은 하고자 하는 주장에 유리한 맥락화된 힘을 의도할 뿐만 아니라 이는 소통하는 사람들에게 특정한 효과를 유발하려는 목적을 갖는다. 게다가, 이와 같은 언표효과행위의 효과는 어떤 표현을 성공적으로 이해하고 응답하는 데 흔히 결정적이다.
-기능:
(1) 심의 의제를 이슈화하는 데 도움이 된다: 시위와 규탄과 같은 레토릭은 때에 따라 정당한 공적 관심 사안을 이슈화하는 데 적절하고 효과적인 방법이다. 특히, 레토릭이 없다면 힘 있는 자들로 인해 배제되는 목소리를 표출하는 데 도움이 된다.
(2) 특별한 상황에서 각별한 공중에게 맞는 적절한 방식으로 요구와 논리적 주장을 맞춰낸다: 현대 사회는 다문화 사회다. 이 상황에서 일부 공중은 주변화된 사회적 지위를 중심으로 조직되며, 일부는 각별한 가치나 문화를 공유하는 이익집단이나 공중이다. 크고 자유로운 사회의 많은 하위 집단들이 때때로 갈등을 해결하거나 문제를 풀기 위해 서로가 소통해야 한다면, 레토릭은 이들 많은 하위 집단들을 관류하는 통역에 일조함을 목표로 한다.
(3) 이성에서 판단으로의 움직임에 동기를 부여한다: 정치적 논쟁은 제대로 마련된 제안, 논의, 원칙의 집합으로 단순히 결론을 낼 수 없다. 실리적인 결과로 판단하기 위해, 정치적 공중은 요구나 논리적 주장을 믿고 수용해야 할 뿐만 아니라, 그 결과에 신경을 쓰고 자신의 의지를 함께 할 것이라는 마음을 담아야 한다. 이 마음 담음에 레토릭은 기여한다.
4절. 내러티브와 위치 지어진 지식
정치적 공중들 사이에 충분히 공유된 전제, 경험, 가치가 없고, 특정 구성원들이 담론을 지배할 때에도 내적 배제가 발생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논리적 주장은 담론에서 배제된 사람의 공적 목소리를 담아낼 수 없다. 왜냐하면 논리적 주장을 위해서는 (1) 문제를 파악하는 서술 방식, (2) 대안적 제안이 표명되는 고유한 관용구, (3) 증거와 예측의 규칙, (4) 규범적 원칙을 공유해야 하는데, 바로 이것들이 공유되지 않은 상황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내러티브는 무엇이 중요한지에 대해 매우 이질적인 경험이나 다른 전제를 갖고 있는 구성원들 간의 이해를 높이는 기능을 한다.
-정치적 내러티브가 기능하는 방식:
(1) 쟁론에 응답하기: 부당하게 해를 입은 사람들이 지배적 담론 속에서 부정의를 표현하는 적절한 말하기 방식을 갖추지 못한 경우, 자신의 내러티브를 말하는 것(스토리 텔링)은 음소거 당한 자신 경험과 정의에 관한 주장 사이의 가교 역할을 한다.
(2) 지역적 공중들 부양하기 및 집합적 친연성 표현하기: 오늘날 민주 사회에서 벌어지는 정치적 논쟁은 시공간적으로 광범위하게 분산되며, 수많은 작은 공중들의 내부에 그리고 그들 사이에서 생긴다. 즉, 지역적인 공중의 안팎에서 생긴다. 스토리텔링은 흔히 그러한 집합체의 구성원들이 서로를 확인하고, 자신 친연성의 기반을 규명하는 중요한 수단이다. 내러티브를 주고받는 것은 위치 지어진 경험을 반영하는 목소리를 제공하며, 친연성에 기반한 집단들이 자신의 사회적 위치와 관련된 자신 고유의 정체성 및 다른 집단들과의 친연성을 논의할 수 있게 하는 데 일조한다.
(3) 타인의 경험을 이해하기 그리고 기존 이해에 대항하기: 스토리텔링은 특정한 사회적 위치에 있는 사람들(예를 들어, 장애인)의 각별한 경험을 이해하는 유일한 수단이 되기도 한다. 우리는 우리의 기존 이해가 옳다고 믿고 또 그에 근거하여 생각하기에 그들의 경험과 주장을 이해하지 못할 경우가 많다. 하지만 내러티브는 흔히 이와 같은 기존 이해를 겨냥하고 이를 바로 잡는 데 도움이 된다.
(4) 가치, 우선시하는 것 혹은 문화적 의미의 원천을 드러내기: 다원화된 사회에서는 가치 있다고 여겨지는 것의 전제, 의미, 그에 관련된 관행에서 상당한 간극이 있기에 갈등, 무감각, 모욕, 오해가 발생한다. 이 상황에서는 공유된 전제가 없기에 이성적인 논리적 주장만으로는 소통이 불가능하다. 내러티브는 관행, 터전, 상징이 그것들을 지켜온 사람들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왜 그것들이 가치 있는지를 외부인들 에게 설명하는 데 기여한다.
(5) 사고를 확장하는 사회적 지식을 구성하는 데 일조하기: 공유된 전제가 없는 상황에서 정치적 의사소통이라는 규범은 사회적으로 다른 상황에 위치 지어진 특별한 경험과 의미에 대해 배움으로써 모든 사람은 자신의 사회적 이해의 폭을 넓힐 것을 요구한다. 즉, 배움을 통해 포용적이길 요구한다. 내러티브는 이 목표를 수월하게 해준다.
5절. 조작과 기만의 위험들
앞서 소개된 세 가지 의사소통 방식을 강조하는 시도는 그것들이 조작과 기만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는 비판과 논리적 주장을 우대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참/거짓, 정직/기만, 합리적 동의/조작 구분을 무화한다는 비판을 받는다.
실제로 세 가지 의사소통 방식은 조작적으로 이용당한다. 하지만 논리적 주장 또한 조작적으로 이용되고 있으며, 단지 이러한 이유로 긍정적 기능을 지닌 세 가지 의사소통 방식을 배제할 수는 없다. 단지 오류가 있거나 유효하지 않은 논리적 주장들을 비판을 통해 교정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호감 인사, 레토릭, 내러티브를 비판함으로써 그것들이 악용되는 경우를 방지할 수 있다.
또한, 지금까지의 주장은 호감 인사, 레토릭, 내러티브를 논리적 주장의 대체제로 내세워야 한다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들이 논리적 주장에 선행하고, 또 논리적 주장에 동반됐을 때 긍정적 기능을 자아낼 수 있다는 것을, 동시에 논리적 주장이 전제하는 바가 없는 경우에 유의미한 기능을 한다는 것을 주장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