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리다와 에반게리온?

최근에 김민호 선생님의 『데리다와 역사』를 감명 깊게 읽고 글감이 생각나서 간단하게 끄적여 봤습니다. 데리다에 대한 이해도 부족하고 해서 어디 내놓기 부끄러운 글이긴 합니다만... 그래도 위의 책을 읽은 느낌만큼은 공유해 보고 싶어서 여기에 작게나마 올려봅니다. 앞으로 『비밀의 취향』과 『입장들』을 비롯한 데리다 관련 서적을 더 읽어볼 생각인데, 그때가 되면 이 얄팍한 글을 조금이라도 보충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해봅니다.

데리다와 에반게리온 - 인류 뒤에 남는 것은 무엇인가

"저는 거기에 하나의 종잇조각을 남겨놓고, 떠나서, 죽습니다. 이 구조에서 벗어나기란 불가능합니다. 제가 무언가를 떠나도록 남겨둘 때마다 매번 저는 글쓰기 속에서 저의 죽음을 삽니다. (...) 저는 이중적인 감정을 갖고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이 모든 것들이 드러나려면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하리라는 감정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제 죽음 이후 보름이나 한 달이 지나면 도서관에 있는 제출본으로 보관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남어 있지 않으리라는 감정입니다. 맹세컨대 저는 동시에 진심으로 이 두 가지 가설을 믿습니다."

  1. 서론
    위의 인용문은 프랑스의 현대 철학자 자크 데리다가 죽기 전 인터뷰에서 남긴 말이었다. 그는 언제나 에크리튀르를 사유했으며, 역사성과 삶-죽음을 사유한 사람이었다. 무상한 죽음 이후의 막연함과 죽음 이후에도 남을 글에 대한 그의 양가적인 감정은 에크리튀르 그 자체의 본질일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살아가야 하며, 그럼에도 우리는 죽을 것이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이 남기는 말은 의미심장하다.

"후유츠키: 인간이 신의 형상을 본떠 에바를 만든다라... 그게 진정한 목적인가?
유이: 네, 사람은 이 행성에서밖에 살 수 없어요. 하지만 에바는 무한히 살아있을 수 있죠. 그 속에 깃들어 있는 사람의 마음과 함께...
가령 50억 년이 지나 이 지구와 달과 태양조차 사라진다 해도 남아있겠죠. 오직 혼자일 뿐이더라도 살아갈 수 있어요.
무척이나 외롭겠지만, 살아갈 수만 있다면...
후유츠키: 인간이 살았던 증거는 영원히 남겨지는 것인가...
신지: 안녕히 가세요... 어머니."

"에바가 있으면, 인류가 존재했다는 흔적은 남으니까". 그녀의 인류보완계획은 멸망할 수밖에 없는 인류를 피신시키는 '방주'로서의 에반게리온을 통해 완수되는 것이었다. 그것은 곧, 설령 인류가 멸망하더라도 에크리튀르는 남는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데리다의 철학을 통해서 우리는 이 오래된 애니메이션을 다시 숙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과연 인류 뒤에는 무엇이 남는가? 이것이 본고가 다루고자 하는 궁극적인 물음이다. 본고는 먼저 데리다의 에크리튀르론을 사후성과 항구성이라는 표제 아래서 설명하고(2), 「신세기 에반게리온」중 이카리 유이의 인류보완계획을 그에 따라 해석할 것이다(3). 마지막으로는 위의 작업들을 통해 인류 뒤의 에크리튀르의 가치는 무엇인가 하는 물음에 답할 것이다(4).

  1. 데리다와 에크리튀르
    먼저 데리다가 에크리튀르를 통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를 알아보는 것이 중요하다. 데리다의 에크리튀르는 사후성으로 특징지어진다. 다시 말해서, "미리 만들어져 있는 텍스트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텍스트의 의미(시니피에)는 대리보충적으로 도래한다. 예를 들어 보자. "꿩 대신 닭"이라는 표현은 사전적으로 '적당한 것이 없을 때 그와 비슷한 것으로 대신하는 경우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그러나 원래부터 그랬을까? 그것이 '속담'으로 분류되는 것처럼, 그 표현의 기원은 실제로 옛사람들이 꿩이 없으니 그 댸신 닭을 먹겠다고 한 데에서 유래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이 옛 의미와 동일한 뜻으로 이 말을 사용하지 않는다. 이 속담의 의미은 말해진 사후(事後)에야 나타난 것이며, 원래의 의미를 대리하면서도 보충한다. 이때 이 대리보충은 원에크리튀르, 차연 등으로 불리고, 공통적으로 '근원의 부재'를 의미한다(서동욱 2002, 79쪽). 이와 연관하여, 데리다의 유명한 개념 "차연"(différance)은 바로 "차이 나면서" "연기됨"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그것은 계속해서 연기됨으로써 존재한다. 사후성은 따라서 에크리튀르의 기본 성격이다. 그러나 에크리튀르는 항구성으로도 특징지어진다. 다시 말해, "언어는 우리보다 선재하는 것이며 우리 이후에도 살아남는 것입니다"(데리다의 인터뷰 中;『데리다와 역사』 136쪽에서 재인용) 어떤 책이 작가의 죽음 이후에도 살아남는 것, 그것이 에크리튀르가 가지는 중요한 성격이다.

  2. '인류보완계획'과 에크리튀르
    「신세기 에반게리온」에서의 이카리 유이가 생각하고 있던 인류보완계획은 한마디로 말하면 인류의 구원이다. 그것은 인류의 방주로서 에반게리온을 만들어 인류가 존재했었다는 '흔적'을 남기는 것이다. 즉 인류가 멸망하더라도, "인간이 살았던 증거는 영원히 남겨지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흔적을 남김'이라는 유이의 보완계획은, 인류의 자기속죄나 마음의 벽인 AT필드를 허물고 타인과 하나가 되는 것을 근본목적으로 하는 제레나 이카리 겐도의 보완계획과는 다른 성격을 가진다. 이때 '흔적' 또한 특수한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 "흔적은 의미 일반의 절대적 근원이다. 즉 이것은 의미 일반의 절대적 근원이 없음을 의미한다." 인류의 흔적을 남긴다는 것, 그것은 바로 대리보충을 허용하는 것이며, 역사성 '안'에서 언어를 지속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유이의 인류보완계획은 포스트휴먼의 도래를 허용한다. 그들에 의해 인류의 문자가 비로소 해석되고 인류가 존재했음이 증명될 수 있도록 허용하는 것이 에반게리온이라는 인간의 흔적이다.** "언어는 우리보다 선재하는 것이며 우리 이후에도 살아남는 것"이니 말이다.

  3. 그렇다면 우리는 왜 쓰는가
    그렇다면 도대체 우리는 왜 글을 쓰는가? 삶과 죽음의 덧없음에서 왜 우리는 무엇을 남기고자 하는가? 왜 파괴적인 역사성의 파도에 저항하며 글을 남기고자 하는가? 우리는 이 답을 데리다에게서 찾아낼 수 있다. 궁극적으로 말하면, "텍스트 바깥은 없기 때문"
    이다. "기호의 운동을 영구적으로 정박시키는 그런 바깥은 없다"(김민호, 『데리다와 역사』 57쪽) 기호가 부단히 운동하고 그것을 막을 장애물은 아무것도 없기에, 우리는 기호가 계속해서 운동하도록 문자를 남긴다. 대리 보충을 허용하고, 계속해서 존재하도록 허용하면서. 인류보완계획 또한 우리처럼 역사성에 몸을 맡긴다. 부단히 움직이는,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역사성에 우리를 내맡기면서도 그 원폭력에 저항하는 것, 그것이 우리의 언어적 삶이다. 피츠제럴드가 쓰듯이, "그리하여 우리는 조류를 거스르는 배처럼 끊임없이 떠밀려가면서도 앞으로 앞으로 계속 전진하는 것이다."

  • 다음의 인용문은 서동욱, 『들뢰즈의 철학』(민음사, 2002)에서 재인용한 것임.

** 데리다의 "흔적"개념에 대한 더 상세한 논의는 아쉽지만 다음을 기약하기로 한다.

참고문헌
서동욱, 『들뢰즈의 철학』 민음사, 2002
김민호, 『데리다와 역사』 에디스코,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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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에반게리온에 관련된 글을 쓰며 인류보완계획 하면 겐도의 보완계획을 가지고 논의하는데, 유이의 보완계획과 데리다를 엮는건 흥미롭네요. 잘 읽었습니다.

다만 오지랖일 수도 있지만 후에 논의를 확장시키고자 한다면, 제 생각엔 겐도의 보완계획이 아닌 유이의 보완계획이 에반게리온의 주제의식과 어떤 관계를 맺고, 그것이 데리다를 통해 어떻게 해석될 수 있는지에 주목해서 쓴다면 더 좋은 글을 쓰실 수 있을것 같습니다.

(짤은 글 내용과 상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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