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막 철학이라는 학문에 입문하게 된 고등학생입니다. 러셀서양철학사(버트런드 러셀 저/서상복 역)을 읽던 중 질문이 생기게 되어 이렇게 글을 올립니다.
“러셀 철양철학사”에서 선대 사상가들을 다루는 부분을 보면, 해당 인물이 정초한 형이상학적 개념과 윤리학적 개념의 연결을 굉장히 중요시하는 듯한 논조로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플라톤의 이데아론에서 이상국가관으로 갈 때, 칸트의 이성에 대한 개념에서 정언명령으로 갈 때 뭔가 개념의 단절이 존재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A는 B다” 식의 담론에서 “A가 B여야만 한다”라는 식의 담론으로 이전되는 부분이 설득력있게 다가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철학자들이 이러한 방식으로 형이상학에서 윤리학적 개념을 이끌어내는 방식으로 자신의 의견을 형성하는 것이 어떤 합의에 기초하여 이뤄지는 것인가요?
좋은 논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소위 '체계적(systematic)' 혹은 '구성적(constructive)' 성향을 지닌 철학자들은 자신들의 모든 사유가 거대한 건축물처럼 아래에서부터 위로 차곡차곡 쌓아올려져야 한다고 생각하곤 합니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아퀴나스, 칸트 같은, 철학사에서 '거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에게 이런 성향이 강하게 나타나죠.
하지만 형이상학과 윤리학 사이의 연결점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철학자들도 많습니다. 현대철학자 중에서는 그 대표적인 인물이 힐러리 퍼트남(Hilary Putnam)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그의 유명한 책 제목부터가 '존재론 없는 윤리학(Ethics without Ontology)'일 정도로, 퍼트남은 윤리학이 반드시 '존재론' 혹은 '형이상학'이라는 별도의 철학적 기초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강조하니까요.
그래서 윤리학이 형이상학에 기초해야 한다고 볼 것인지, 아니면 윤리학은 형이상학이 제공하는 토대 없이도 성립할 수 있다고 볼 것인지는 그 자체가 철학적 이슈이고, 어느 쪽을 옹호할 것인지는 철학자들 각각의 판단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1)
몇 가지 보론을 하자면
통상 "윤리학"에서 사용되는 개념 (선함 등등)의 형이상학적 위치, 인간이 이걸 어찌 인식하는지 등등에 대한 논의는 메타윤리학(metaethics)에서 다루는 주제입니다.
넓게 보면, 퍼트남의 논의도 메타윤리학이라 할 수도 있겠지요.
이 역시도 오래된 규범/사실 구분에 따른 논제인데, 메타윤리학 상에서도 여러 입장들이 싸우고 있습니다.
(2)
다만 이런 논의에 "관심이 없는" 학자들도 존재합니다.
말 그대로 메타 윤리학에서 어떤 형이상학적 기초에서 윤리학적 담론을 쌓을 수 있는지 논쟁한다면, 오늘날 규범 윤리학(normative ethics)에서는 이런 논의에 큰 관심 없이 우리가 흔히 아는 윤리학적 논쟁 ("사형제를 찬성할 것인가 말 것인가?" 등)을 여전히 지속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마도 메타 윤리학과 규범 윤리학은 오늘날 철학계에서는 "같은 윤리학"이라 부르기에는 꽤 큰 갭이 있다는 생각이 자주 듭니다.
메타 윤리학자들은 형이상학/인식론/언어철학과 함께 간다면, 규범 윤리학은 응용윤리학/인지과학/신경 윤리학/생물학의 철학/사회존재론-사회인식론/인지과학 등등과 함께 간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그 분야와 다 함께 엮이는 행위 철학과 심리 철학도 있긴 하지만요.)
여튼 제 보론이 더 큰 혼란을 가져온 것이 아니었으면 좋겠습니다.
정성스러운 답변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우연히 이 사이트를 알게 되었는데 가입하길 정말 잘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