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방향을 설정해주거나 큰 영감, 감동을 준 구절, 명언이 있으신가요>

저는 개인적으로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바가바드 기따 2장을 읽고 묵상하는데요, 다음과 같습니다.

모든 존재의 밤에
자제의 소유자는 깨어 있으며,
존재들이 깨어 있을 때
[진리를] 보는 성자에게는 밤이다.

물이 바다로 들어가 채우나 
바다는 흔들리지 않는 것처럼, 
그렇게 모든 욕망이 들어간 자는 평안을 얻지만, 
욕망을 갈구하는 자는 그렇지 못하다. 

모든 욕망을 던져 버리고 

아무런 갈망 없이 행하는 사람,
내 것과 나라는 생각이 없는 자는
평안에 이르나니,

이것이 브라만의 경지이다, 프르타의 아들이여.
이것을 얻으면 미혹됨이 없나니,
마지막 순간(죽음)에라도 거기에 확고히 서면
그는 브라만의 열반에 이르노라.

올빼미 회원분들이 삶을 살아갈 힘을 얻고 영감을 얻으시는 구절, 명언있다면 궁금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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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체적인 방향을 정해 주진 않지만, 적어도 최근에는 제가 바랄 만한 모습을 보여준다고 생각하는 텍스트가 바울 서신 <빌립보서> 1장 6절에 나타난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선한 일을 여러분 가운데서 시작하신 분께서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그 일을 완성하시리라고, 나는 확신합니다 (필립비인들에게 보내는 편지 1:6 공동번역)“
그리고 이 구절이 단지 개인의 신념이나 신조로 머물지 않는다는 의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1) 리쾨르가 <악의 상징 해석>에서 그리스도교가 노예의지에 대한 체험을 바탕으로 죄 개념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를 아담 신화를 해석하면서 드러내는 반면, 2) 그리스도교가 개인 안에서 이루어지는 긍정적 변화(제가 신학적 견해가 부족해 단지 긍정적 변화라고만 표현하겠습니다)는 단지 <성령의 도우심>이라는 비교적 덜 세련된 개념으로만 담고 있다고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3) 따라서 이 구절은 신앙을 위한 제 탐구의 시작점인 동시에 실존적인 고민에 대한 한 가지 답변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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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악의 상징 해석과 희망의 신학: 리쾨르의 방법론적 해석학 : 네이버 블로그

  2. 기쁨의 이야기: 신앙의 기쁨에 대한 단상 : 네이버 블로그[quote="UnEstudiante, post:2, topic:5445, full:true"]

YOUN님의 두 가지 글을 언급해야 하는데, 인용 방법을 잘 모르겠네요. 링크만 걸어두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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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도르노의 문장들을 참 좋아합니다. "Es gibt kein richtiges Leben im falschen." 그 외에도 좋아해서 메모장에 남겨둔 글귀들이 많은데, 그 중 하나만 옮겨둡니다.

한참을 살다 보면 가해자가 누구이고 피해자가 누구인지 더 이상 분별하기 어렵다는 것을 사람들은 안다. 보편적 불의가 추상적으로 상정되는 상황 속에서 개개인이 져야 할 구체적 책임은 모호해진다. (…) 이전투구판에서 각별한 선인이라고 부각된 사람은 대개 이러한 '맑음'을 가불해서 쓰고 있는 사람들이다. 악하지 않은 인간이란 무균질 인간의 삶이 아니라 각별한 수치심을 가지고 안절 부절못하면서 곤궁한 삶을 사는 사람이다. 적절한 대상을 찾지 못하는 그의 사랑은 부당한 것에 대한 증오로밖에 -그 자신은 물론 이 증오의 대상에 스스로가 닮아갈 수밖에 없지만-표현할 길이 없는 것이다.

아도르노, 미니마 모랄리아: 41(강조는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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왠지 저도 종교적인 걸로 던져야 될 것 같은 강박에서 말씀드리면(?) 짧은 글귀 'as above, so below'가 영감을 자주 줍니다.

생각해 보니, 마키아벨리가 베토리에게 보낸 편지에서 말하는, 일이 끝나면 관복으로 갈아입고 옛사람들과 대화를 나눴다는 편지도 - 상당히 최근이지만 - 열정을 부어주는 역할을 하고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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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대세는 아니지만, 경제적 가치와 다른 것에서 행복을 찾는 한국인들도 있고, 학벌이나 사회적 평가 따위를 무시하면서 자기가 좋아하는 것, 즉 자기가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실천하는 한국인들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기생충이란 작품이 아카데미 상을 받은 것은 아주 대단하지만, 단지 이것 때문에 그 작품을 대단하게 평가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작품이 좋다는 것을 단지 아케데미상을 받았다는 것에서 찾는 것에 반대하는 것입니다. 작품이 좋다는 것을 우리 관점에서 이야기하는 것이 더 핵심적이라는 것입니다.

  • 김영건 선생님과 대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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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적인 구절이긴 하지만, 저는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쓴 다음 구절들을 인생의 지침으로 삼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내가 무엇에든지 얽매이지 아니하리라 (고린도전서 6:12)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니,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 (고린도전서 10:23-24)

이 문장은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를 그리스도인이 먹어야 하는지 먹지 말아야 하는지에 대한 사도 바울의 생각을 담고 있습니다. 1세기에 고린도 시장에서 유통되던 고기의 상당 수는 그리스 신전에 먼저 제물로 바쳐진 것들이었고, 교회 내에서는 이방 신들의 제사에 사용된 고기를 제의적으로 더럽혀진 고기라고 생각하여 먹어서는 안 된다고 본 사람들이 있었죠. (우리나라의 상황으로 따지자면, 제사 음식을 그리스도인들이 먹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의 문제에 대응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문제에 대해 아주 흥미로운 대답을 제시하죠

(1) 모든 것이 가하다.

흥미롭게도, 사도바울은 대다수의 윤리적-종교적 이슈에 대해 상당히 유연한 태도를 취합니다. '그리스도교'라고 하면 특정한 이슈에 대해 고정된 하나의 '정답'만을 인정할 것이라는 대중적인 오해와 달리, 사도 바울의 편지에는 '윤리적 자유'가 강조되는 경우가 훨씬 빈번합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이기 때문에 더러운 것이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고(고린도전서 10:26),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어떠한 상황에서도 자족할 줄 아는 법을 배운 사람이기 때문에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에 구애를 받지 않으며(빌립보서 4:11-13), 설령 부정의와 폭력 등 '악'이 발생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결국 그 모든 것을 다시 올바르게 바로잡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아무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로마서 8:28-30)는 것이 사도 바울의 사유에서 가장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 확신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방 신전에 바쳐진 제물을 그리스도인이 먹든지 말든지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봅니다. 대다수의 윤리적-종교적 문제에 대해서는 개인이 자신의 양심에 따라 자유롭게 선택을 해도 괜찮다고 선언하는 거죠.

(2)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윤리적 자유가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면서도, 자신은 그 자유 자체를 윤리적 선택의 근거로 삼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자유보다도 훨씬 중요한 가치가 있다는 것이 사도 바울의 강조점입니다. 즉, 이방 신전에 바쳐진 고기를 먹든지 말든지 아무 문제도 되지 않지만, 만약 누군가가 그 고기를 양심에 거리낌 없이 먹을 때, 그 모습을 지켜 보던 미숙한 사람이 시험에 빠지게 된다면, 그래서 (a) 양심의 거리낌을 느끼는 사람이 유혹에 빠져 자신의 양심을 속이고서 고기를 먹게 된다거나, (b) 양심의 거리낌을 느끼지 않는 사람과 거리낌을 느끼는 사람 사이에 그 문제를 둘러싸고 의견의 차이로 인해 갈등이 생겨나게 된다면, 그 상황에서 우리 자신의 '윤리적 자유'란 역설적이게도 윤리적이지 못한 방식으로 사용된 셈이라는 것이 사도 바울의 생각입니다. 우리의 윤리적 자유 때문에 타인이 윤리적 기만에 빠지게 되고, 타인이 윤리적 폭력을 행사하게 되는 상황이니 말입니다.

(3)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

그래서 사도 바울은 우리의 자유가 '타인을 위해' 행사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우리 자신에게 특정한 선택을 행할 윤리적 '권리'나 '자유'가 있는지 없는지보다도, 그 권리나 자유가 타인에게까지 '선한' 것인지가 사도 바울의 윤리학이 관심을 가지는 문제입니다. 실제로, 사도 바울은 이러한 윤리적 성찰을 바탕으로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는 문제에 대해 아주 흥미로운 결론을 내립니다. (a) 그 고기를 먹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는 '개인'이 자유롭게 선택하면 되는 사항이지만, (b) 만약 내가 그 고기를 먹어서 타인이 시험에 빠지게 된다면, '나'는 그 고기를 결코 먹지 않겠다는 것이 사도 바울의 선언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음식이 내 형제로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리라"(고린도전서 8:13)

저는 사도 바울의 이 사유 속에 아주 심오한 윤리적 함의가 들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별히, '자유'가 모든 윤리적 선택의 최종적 근거인 것처럼 여겨지는 우리 시대에는 사도 바울의 윤리학이 더욱 혁명적인 통찰을 줄 수 있다고 봅니다. 사도 바울의 윤리학은 (a) 윤리의 문제에서 일체의 초자연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요소를 배제한다는 점에서 오늘날의 자유주의적이고 (어떤 의미에서) 실존주의적인 윤리관과 상당 부분 공명합니다. 그러나 그의 윤리학은 (b) '나'라는 행위자에게 윤리적 '권리'나 '자유'가 존재하는지의 문제에만 초점을 맞추는 자유지상주의적 윤리학을 넘어섭니다. (c) 설령 '나'라는 행위자에게 어떠한 일이든지 행할 수 있는 윤리적 권리와 자유가 주어져 있다고 하더라도, '나'라는 행위자가 타인을 위해 그 자유를 기꺼이 제한할 수 있는 성찰적 인간이 되도록 자극하고 독려하는 것이 사도 바울의 윤리학입니다. 권리와 자유가 있다는 의미에서의 '윤리'보다도 더 근본적인 의미에서의 '윤리'가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 사도 바울의 이야기인 것이죠.

제 아버지가 개신교 목회자이신데, 저는 사도 바울의 이 이야기를 중학생 시절에 아버지의 일요일 설교를 통해 듣고서 굉장히 충격을 받았습니다. 적어도 저에게는, 제가 윤리에 대해 떠올리던 고정관념과 사고의 틀 자체를 부수는 이야기였거든요. 저는 그 전까지 "A가 옳은지 옳지 않은지"나 "A를 할 자유가 나에게 있는지 없는지"가 윤리적 문제의 전부라고 생각하였습니다. 하지만 설령 내가 특정한 문제에 대해 옳고, 나에게 특정한 행위를 행할 자유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런 상황에서조차 내가 내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 훨씬 심오한 의미에서 자유롭고 윤리적인 행위일 수도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습니다. 우리의 권리와 자유에조차도 얽매이지 않는 상태가 (그래서 우리의 권리와 자유조차 타인을 위해 기꺼이 포기할 수 있는 상태가) 진정한 권리이고 자유라는 대단히 역설적인 주장이 사도 바울의 이야기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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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많아서 문제인데요, 다자이 오사무의 사양 중 한 구절이 가장 먼저 떠오르네요.

맨 처음 올린 편지에 제 가슴에 걸린 무지개에 대해 썼습니다만, 그 무지개는 반딧불, 혹은 별빛처럼 그렇게 고상하지도 아름답지도 않습니다. 그토록 멀고 옅은 마음이었다면, 제가 이렇듯 괴로워하지 않고 서서히 당신을 잊을 수 있었겠지요. 제 가슴속 무지개는 불꽃의 다리입니다. 가슴이 까맣게 타들어 갈 만큼 그립습니다. 마약 중독자가 마약이 떨어져 약을 찾아 헤맬 때의 심정인들, 이 정도로 괴롭지는 않겠지요. 잘못하는 게 아니다, 불순한 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불쑥 제가 엄청난 바보 짓을 벌이는 게 아닌가 싶어 섬뜩해지기도 합니다. 미치광이가 된 건 아닐까 하고 뉘우치는 마음도 상당히 큽니다. 하지만 저는 냉정하게 계획하고 있습니다. 정말로 제게 한번 와 주세요. 언제든 좋아요. 저는 아무 데도 가지 않고 항상 기다립니다.

다자이 오사무, 사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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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더더욱 인용하신 아도르노의 글이 가슴 깊이 다가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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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어찌보면 고등학생 때 읽었던 도스토옙스키 덕분에 철학과에 오게 됐다고 생각하는데요, 그의 소설들을 읽으면서 한번도 생각치 못했던 여러 물음들이 떠오르고, 막연히 철학을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기억이 있네요. 정말 아무것도 모르던 고등학생이었는데 그의 소설에서 큰 충격을 받았고, 그때 형성된 주제의식들이 아직도 유효하게 남아있습니다. 물론, 철학은 제 생각보다 훨씬 방대하고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지만요. 다음은 제가 가장 좋아하는 구절입니다.

“아름다움-아름다움이라는 놈은 무섭고 끔찍한 것이야! 일정한 잣대로는 정할 수가 없거든. 그래서 무서운 거야. 왜 그런지 신께서는 인간에게 자꾸 수수께끼만 던져주신다니까. 아름다움 속에서는 양쪽 강 언덕이 하나로 만나고 모든 모순이 함께 살고 있어. 나는 교육이라고는 전혀 못 받았지만, 이건 꽤 연구를 많이 해서 생각해낸 거야. 실로 신비는 무한하다니까! 이 지구상에는 어지간히도 많은 수수께끼가 인간을 괴롭히고 있어. 이 수수께끼가 풀린다면, 그건 젖지 않고 물속에서 나오는 것 같은 일이지. 아아, 아름다움이라고! 게다가 내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건 아름다운 마음과 뛰어난 이성을 가진 훌륭한 인간까지도 왕왕 성모(마돈나)의 이상을 가슴에 품고 출발하였으나 결국 악행(소돔)의 이상으로 끝난다는 거야. 아니, 아직도 한참 더 무서운 게 있지. 즉 악행(소돔)의 이상을 마음에 품은 인간이 동시에 성모(마돈나)의 이상 또한 부정하지 않고 마치 순결한 청년 시절처럼 저 밑바닥에서 아름다운 이상의 동경을 마음속에 불태우고 있는 거야. 야아, 실로 인간의 마음은 광대해, 지나치게 광대할 정도지. 나는 할 수만 있다면 그걸 좀 줄여보고 싶다니까. 에이, 제기랄, 뭐가 뭔지 도통 모르겠네, 정말! 이성의 눈에는 오욕으로 보이는 것이 감정의 눈에는 훌륭한 아름다움으로 보이니 말이야. 애초에 악행(소돔) 속에 아름다움이 있는 건가?”
……그나저나 인간이라는 건 자신이 찔리는 것만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 거야.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3부 3장 치열한 마음의 참회 ― 시(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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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마르크스의 준칙 "Nihil humani a me alienum puto"을 제 준칙이라고도 할 수 있을 만큼 좋아합니다. 고대 로마 시대의 희극작가이자 시인인 푸블리우스 테렌티우스 아페르(기원전 195년 또는 185년 – 159년)의 희곡 <고행자 Heauton Timorumenos>에 나오는 이 경구는 흔히 "인간적인 것 가운데 나와 무관한 것은 없다"로 번역되는 데, "인간적인 것 가운데 나에게 낯선 것은 없다"로 직역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테렌티우스는 어찌 생각했는지 모르겠지만, 탁월한 것들만이 인간적인 것은 아닙니다. 저열한 것들도 인간적이고 그 무엇보다 인간적인 것은 취약/연약한 것입니다. 저는 그것들이 전혀 낯설지 않습니다. 제 자신과 남들에게서 매일같이 보고 삽니다.

이 라틴어 경구의 기원을 찾는 과정에서 마르쿠스 테렌티우스 바로 (기원전 116년 - 27년)도 발견했는데, 그는 자신의 온전히 전해진 유일한 저술인 <농업에 관한 3권의 책 Rerum Rustarum libri tres> 서문에서 "남자가 거품이라면 노인은 더욱 그렇다. 이제 80살이 되었으니, 저세상으로 떠나기 전에 준비해야 한다."라고 썼다고 합니다. 포악한 남자들이 워낙 많아서 동의가 잘 안 될 수도 있는데, '포악함'은 '거품같음'과 친화적인 성질일 수도 있습니다. 물론 '거품같음'은 '취약함/연약함'과 같은 계열의 성질입니다. 지탱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부풀어 오르고 터지기 쉽다는 것 - 여자보다는 남자가 더 그런 존재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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