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적인 구절이긴 하지만, 저는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쓴 다음 구절들을 인생의 지침으로 삼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내가 무엇에든지 얽매이지 아니하리라 (고린도전서 6:12)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니,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 (고린도전서 10:23-24)
이 문장은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를 그리스도인이 먹어야 하는지 먹지 말아야 하는지에 대한 사도 바울의 생각을 담고 있습니다. 1세기에 고린도 시장에서 유통되던 고기의 상당 수는 그리스 신전에 먼저 제물로 바쳐진 것들이었고, 교회 내에서는 이방 신들의 제사에 사용된 고기를 제의적으로 더럽혀진 고기라고 생각하여 먹어서는 안 된다고 본 사람들이 있었죠. (우리나라의 상황으로 따지자면, 제사 음식을 그리스도인들이 먹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의 문제에 대응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문제에 대해 아주 흥미로운 대답을 제시하죠
(1) 모든 것이 가하다.
흥미롭게도, 사도바울은 대다수의 윤리적-종교적 이슈에 대해 상당히 유연한 태도를 취합니다. '그리스도교'라고 하면 특정한 이슈에 대해 고정된 하나의 '정답'만을 인정할 것이라는 대중적인 오해와 달리, 사도 바울의 편지에는 '윤리적 자유'가 강조되는 경우가 훨씬 빈번합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이기 때문에 더러운 것이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고(고린도전서 10:26),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어떠한 상황에서도 자족할 줄 아는 법을 배운 사람이기 때문에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에 구애를 받지 않으며(빌립보서 4:11-13), 설령 부정의와 폭력 등 '악'이 발생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결국 그 모든 것을 다시 올바르게 바로잡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아무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로마서 8:28-30)는 것이 사도 바울의 사유에서 가장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 확신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방 신전에 바쳐진 제물을 그리스도인이 먹든지 말든지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봅니다. 대다수의 윤리적-종교적 문제에 대해서는 개인이 자신의 양심에 따라 자유롭게 선택을 해도 괜찮다고 선언하는 거죠.
(2)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윤리적 자유가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면서도, 자신은 그 자유 자체를 윤리적 선택의 근거로 삼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자유보다도 훨씬 중요한 가치가 있다는 것이 사도 바울의 강조점입니다. 즉, 이방 신전에 바쳐진 고기를 먹든지 말든지 아무 문제도 되지 않지만, 만약 누군가가 그 고기를 양심에 거리낌 없이 먹을 때, 그 모습을 지켜 보던 미숙한 사람이 시험에 빠지게 된다면, 그래서 (a) 양심의 거리낌을 느끼는 사람이 유혹에 빠져 자신의 양심을 속이고서 고기를 먹게 된다거나, (b) 양심의 거리낌을 느끼지 않는 사람과 거리낌을 느끼는 사람 사이에 그 문제를 둘러싸고 의견의 차이로 인해 갈등이 생겨나게 된다면, 그 상황에서 우리 자신의 '윤리적 자유'란 역설적이게도 윤리적이지 못한 방식으로 사용된 셈이라는 것이 사도 바울의 생각입니다. 우리의 윤리적 자유 때문에 타인이 윤리적 기만에 빠지게 되고, 타인이 윤리적 폭력을 행사하게 되는 상황이니 말입니다.
(3)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
그래서 사도 바울은 우리의 자유가 '타인을 위해' 행사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우리 자신에게 특정한 선택을 행할 윤리적 '권리'나 '자유'가 있는지 없는지보다도, 그 권리나 자유가 타인에게까지 '선한' 것인지가 사도 바울의 윤리학이 관심을 가지는 문제입니다. 실제로, 사도 바울은 이러한 윤리적 성찰을 바탕으로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는 문제에 대해 아주 흥미로운 결론을 내립니다. (a) 그 고기를 먹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는 '개인'이 자유롭게 선택하면 되는 사항이지만, (b) 만약 내가 그 고기를 먹어서 타인이 시험에 빠지게 된다면, '나'는 그 고기를 결코 먹지 않겠다는 것이 사도 바울의 선언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음식이 내 형제로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리라"(고린도전서 8:13)
저는 사도 바울의 이 사유 속에 아주 심오한 윤리적 함의가 들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별히, '자유'가 모든 윤리적 선택의 최종적 근거인 것처럼 여겨지는 우리 시대에는 사도 바울의 윤리학이 더욱 혁명적인 통찰을 줄 수 있다고 봅니다. 사도 바울의 윤리학은 (a) 윤리의 문제에서 일체의 초자연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요소를 배제한다는 점에서 오늘날의 자유주의적이고 (어떤 의미에서) 실존주의적인 윤리관과 상당 부분 공명합니다. 그러나 그의 윤리학은 (b) '나'라는 행위자에게 윤리적 '권리'나 '자유'가 존재하는지의 문제에만 초점을 맞추는 자유지상주의적 윤리학을 넘어섭니다. (c) 설령 '나'라는 행위자에게 어떠한 일이든지 행할 수 있는 윤리적 권리와 자유가 주어져 있다고 하더라도, '나'라는 행위자가 타인을 위해 그 자유를 기꺼이 제한할 수 있는 성찰적 인간이 되도록 자극하고 독려하는 것이 사도 바울의 윤리학입니다. 권리와 자유가 있다는 의미에서의 '윤리'보다도 더 근본적인 의미에서의 '윤리'가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 사도 바울의 이야기인 것이죠.
제 아버지가 개신교 목회자이신데, 저는 사도 바울의 이 이야기를 중학생 시절에 아버지의 일요일 설교를 통해 듣고서 굉장히 충격을 받았습니다. 적어도 저에게는, 제가 윤리에 대해 떠올리던 고정관념과 사고의 틀 자체를 부수는 이야기였거든요. 저는 그 전까지 "A가 옳은지 옳지 않은지"나 "A를 할 자유가 나에게 있는지 없는지"가 윤리적 문제의 전부라고 생각하였습니다. 하지만 설령 내가 특정한 문제에 대해 옳고, 나에게 특정한 행위를 행할 자유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런 상황에서조차 내가 내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 훨씬 심오한 의미에서 자유롭고 윤리적인 행위일 수도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습니다. 우리의 권리와 자유에조차도 얽매이지 않는 상태가 (그래서 우리의 권리와 자유조차 타인을 위해 기꺼이 포기할 수 있는 상태가) 진정한 권리이고 자유라는 대단히 역설적인 주장이 사도 바울의 이야기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