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나무노와 두개의 "자아들"과의 싸움(번역의뢰)

저자:Miguel Ángel Malav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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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우나무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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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나무노의 신앙을 향한 투쟁은 또한 또 다른 더욱더 깊은 인간의 이중성의 싸움이기도 했습니다.

우나무노는 "내적 자아"와(개인의 내면속에 그 자신에 의해서 때로는 무시되거나 인지하지못할정도로 숨겨진 진정한 자아) "외적 자아" 를 (세계와 상호작용하는 모든것이 그저 "보여지기식"인 가면무도회와 같은 자아)들을 동시에 갖는 이중성을 개별성을 초월하여 모든 인간들이 갖고있음을 확신했습니다.

우나무노는 그의 작품의 지속적인 주제외에도 인간의 이중성을 그 자신안에서 인간의 이중성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가 거울앞을 주의깊게 관찰할때마다(거울은 우나무노가 쓰는 훌륭한 상징들중 하나입니다.) 반대편의 자기 자신을 '이방인' 으로 보는 그 거울의 상이 '또다른 자신' 으로서 신체를 가진 나 자신과 얼마나 다른지 명확하게 인식할수있었습니다.

공인으로서의 그의 지위로 인하여 그의 개인적 견해가 엄청난 사회적 반향을 일으킨다는것을 알았기에 우나무노는 '캐릭터"를 잘알고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연설을 마치고 집으도 돌아갈때 그는 깊은 후회를 느꼈습니다. 비록 성공적인 연설이었다해도 그가 진정으로 존재하는 자신과 다른 종류의 자신을 보여줌으로서 참석자들을 "배신"했음을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군사정권에 반대한 죄로 유배형을 당한 지칠줄 모르는 활동가이자 시의원이자 국회의원인 살라망카의 총장 우나무노는 마음속 깊이 자기 속으로 빠저들고 싶었으며 수도원안의 수도사가 되고자했습니다. 그러나 독방에 틀어박힌 수도사가 아니라 기도하기 좋은 산과 강들과 같은 자연과 하나가 되어 사는 수도자의 삶을 영위하고자한것입니다.(오직 그곳에서만 그는 평화에 있을수있었으며 그의 검을 다시말해 그의 글을 자신을 위해 쓸수 있었습니다.)그러나 동시에 현실에 압도당해버린 이 명상적인 작가는 그가 태어났을때부터 이미 그 자신 자체를 전인류에게 바치기로 결정한 삶을 살기로 결정했습니다.

'내적 자아'와 '외적 자아'간의 투쟁과 명상가와 활동가간의 투쟁은 종교적인 우나무노의 진정한 중심축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늘 이 투쟁들에서 불멸에 향한 욕망을 향한 영적인 전투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그의 희곡 '스핑크스'(역자주:스핑크스는 그의 책인 비극적 삶의 감정에서도 언급되는데 풀수 없는 질문(불멸의 문제)을 하며 사람을 잡아먹는 죽음을 스핑크스에 비유했다)에서 완벽하게 감상할수있는것입니다. 그 이야기의 주인공 앙헬(앙헬은 스페인어로 천사를 의미한다.또한 이 글의 저자의 이름이다/)은 이 개인적 드라마의 반영입니다. 그는 기성질서에 대항하는 혁명을 일으키고자 대중들을 단결시키고 그들을 무장시킬수있는 능력을 가진 사회 지도자입니다. 그는 그의 동료들로 인하여 혁명을 일으키는 자리로 떠밀리게됨니다. 그러나 그를 가장 떠민것은 사회 정의와 같이 칭찬할만한 명분을 가진 그들의 반란이 성공하게되어 역사책에 자신의 이름이 앙헬의 승리와 함께 기록되어 그녀의 이름이 불멸이 되는것을 마음속 깊이 염원하던 그의 아내 유페미아였습니다.(역자주:이거 듣고 어떤 만화영화의 분홍 머리의 아가씨가 생각났습니다::)

긍정적인 목적에(그들의 동료 인간들의 현실의 삶을 개선시키기 위하여 그들을 악의적으로 억압하는 구조를 해체하기 위한 투쟁) 의해서 감동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앙헬은 자신을 배신자처럼 느낍니다.기성질서를 급진적으로 뒤집을수없음을 아는것은 그 느낌과 그다지 관련이없었습니다. 그러나 주된 이유는 그가 이것이 본질적인 전투가 아님을 알았기(느꼈기) 때문이었습니다. 오직 그가 말하는 그 본질적이면서 영적인 그것이 우리를 인간으로서 특별하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죽고나서도 계속 살고자 하는 열망
(역자주:혁명을 부추기는 유페미아를 보면 알겠지만 이런 갈등의 근원에는 불멸을 향한 인간의 욕망이 있다고 우나무노가 주장하는걸로 보입니다)

이것은 앙헬의 드라마입니다...그리고 우나무노의 드라마이기도 하죠. 둘다 '의견 없음'을 열망하는 '캐릭터'들입니다. 그들 모두 시끄러운 삶에서 은퇴하여 신의 진정한 창조물인 자연안으로 도피하고자하는 꿈을 꿉니다. 그리고 그들 모두 마음속 깊이 그들의 동료앞에서 소란을 피지않으며 평화롭게 '내적 자아'가 번성하던 어린아이 시절로 돌아가는것을 동경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스핑크스'란 희곡에서 이 개인적인 위기는 어떻게 해결되게될까요?

주인공의 죽음으로 해결됨니다.

그가 혁명의 도화선에 불을 붙이기를 염원하며 자신을 둘러싼 군중들 앞에서(인생의 본질적인 질문들에 몰두한과 동시에 그것들을 자유인의 합리성으로 답변함으로 인해 어린시절의 믿음을 잃어버린 인물로서) 앙헬은 우리를 무(역자주:죽음)에서 구해줄 비합리적인 전투(역자주:기독교 혹은 실존적 질문)에(비록 그는 이것이 불가능할것임을 직감했지만 말입니다.) 우리의 시선을 집중시켜야한다고 애원합니다.그가 받은 반응은 앙헬의 진실에 자신들이 속았다고 느낀 대중들의 분노였습니다... 결국 이로인하여 앙헬은 죽임을 당하게됨니다.
(역자주:우나무노의 작품은 '절대적' 비극입니다. 어떠한 해결책도 없고 희망도 없이 작품이 끝납니다. 근데 그런 '절대적' 비극은 샤르트르나 카뮈와 같은 부조리 문학에 많이 등장하지만 우나무노의 작품은 '진정한 절대적 비극'입니다. 투쟁? 실존적 도약? 안나와요. 그러니 완벽한 절망이 우나무노 작품의 결말입니다. 근데 이것이 우나무노가 무신론자라서 그런것이라기보다는 파스칼의 팡세 처럼 기독교 실존주의 특유의 '용감함'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러니 쉽게 말해서 ㅇㅇ 그러니까 이제 성경을 읽어야될 이유를 알겠지? 라는 밑밥이랄까요?)

이렇게 눈물겨운 내밀적인 전투에 직면한 우나무노는 죽음을 이 전투(역자주:인간들의 실존적 투쟁)의 해결책으로 여겼습니다. 그는 인간이 본성적으로 마주하게될 그 미스터리의 뒤에 무엇이 숨어있는지 바로 알기 위하여 그의 자살에 관해서 여러번 공상하고는했습니다.그러나 우리가 죽음앞에 있게될때 궁극적으로 '외적 자아'의 완전한 소멸과 개인에 대한 '내적 자아'의 최대 통제의 순간이 나타나게됨니다. 그리하여 우나무노에게 죽음이란 진실로 최고로 빛나는 섬광이며 영적인 절정입니다. 죽음이 영원한삶을 향한 문이길 바라는 그의 열망에(그의 합리성이 포용하지 못하게 만든 그 열망) 의해 그는 이 대담한 문구로 죽음을 설명했습니다."죽음은 태어나지 않음이다." 그것은 귀환입니다. 어린시절이 아닌 하늘의 신이 우리를 각자 하나 하나 창조했던 참된 그 시절로의 귀환말입니다.(역자주:우나무노는 삶의 비극적 감정이나 기독교의 고뇌 같은 철학책이 안개,아벨 산체스 같은 문학책보다 더 희망차답니다. 근데 재미는 없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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