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사렛 예수의 열정적인 아들 미겔 데 우나무노(번역 의뢰)

(한국에는 잘 알여지지 않은 스페인 철학자 미겔 데 우나무노에 대한 소개글입니다. 번역 의뢰 받은걸 번역해서 올렸습니다.)

철학자:우나무노

저자: Miguel Ángel Malav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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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구엘 데 우나무노 (1864 빌바오 출생 1936 살라망카에서 서거)는 스페인의 근본을 흔들었을 뿐만 아니라 항상 돈키호테의 창을 준비한체 모든 중요한 문제들을 다루었던 인물이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그 모든것들은 경련이자 한계없는 전투이며 더욱이 자기 스스로를 향한 투쟁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나무노에게 그 모든 전투중 가장 본질적인 전투는 단 하나 였는데 바로 "신앙을 위한 전투였습니다."

스페인 역사상 가장 슬펐던 스페인 내전으로 인하여 나라가 찢어진 1936년 12월 31일날에 그가 죽은지 90여년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우나무노가 기독교인임을 인정하지 않고있습니다.. 지금의 스페인에서거든 다른 나라에서거든 현대의 가장 중요한 작가중 한명인 그가 나사렛의 예수를 고뇌속에서 받아들였으며 또한 그의 가장 중요했던 열망은 그 예수를 완전히 움켜지는것이었음에도 기독교의 참된 정신에서 너무나 멀어진 모든 교리 앞에서 진실하고 자유로운 탐구를(나사렛 예수) 추구한 그의 죄로 인하여 그가 기독교인이라고 인식한 교회 지도층들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우나무노는 항상 분류표에서 도망쳤으며 특히 "지식인" 이라는 분류를 회피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저자 스스로의 자아에만 관심을 갖으며 다른 타인들에게 긍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는 그저 관념적이고 방관자적인 태도임을 이해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에 반해 우나무노의 철학은 항상 관념적이지 않은 깊은 의미로서 삶을 위한 철학이었으며 인간들이 그들의 목적인 "행복한 삶"을 성취 하게하는것이 우나무노 철학의 동력이자 진정한 핵심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참된 삶을 살기 위하여 우나무노는 누군든 그 큰 질문을 피할수 없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눈을 완전히 감게되었을때 우리는 진정 영원히 사라지는것인가?

결국 모든것이 무(無)의 지배아래에 편입될거라는 그의 직감은 그를 무한한 위기로 몰아갔습니다. 만약 그 무엇도 우나무노라는 존재를 존립시키거나 심지어 기억조차 못한다면 그 또한 무에 편입될테니 말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것에 대항하기 위하여 온힘을 짜내어 믿음에 매달렸습니다. 비록 자유 사상가로서 스스로의 영적인 질문에 했던 지적인 답변들은(자기 스스로 거짓을 말할수는 없는법입니다) 거의 항상 염세적이었지만 그는 결코 자신과의 싸움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를 행복한 신앙으로 이끌 나사렛 예수로 향한 길을 찾아나섰기 때문입니다.그리고 그는 결코 해독할수 없는 신비앞에 완전히 엎드린체 나사렛 예수로의 길을 찾았습니다. 그가 스스로를 기독교라는 분류표에 속한다고 말하든 말하지 않든 그는 모든 매개변수에서 항상 기독교인으로 살고,생각하고,탐구하고,고동쳤으며 예수를 통해 신에게 도달하고 신 안에 있고자 했습니다.

어떤 과학자나 지식인들이 뭐라고 하든지 그 누구도 인류의 기원 이래로 가장 근본적인 질문에 절대적인 확답을 할수는 없었습니다: "진리는 무엇인가?" 이 질문을 불가해한 신비로 받아들이고 타인이 설정한 모든 길에서 도망치는 우나무노의 기독교는 끝없는 걸음이며, 마음속에서 우러나온 매혹적인 경험에 도달하기 위하여 삶을 느끼면서 사는것이며,죽음의 순간까지 모든 힘을 다해서 이 모든걸 받아들이며 마치 죽고나서 우리를 기다리는것이 무(無)가 아닌 것처럼 사는것이었습니다.

우나무노는 항상 우리에게 자유롭게 사고할수있는 성인으로 살라고 소리쳤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영원한 삶과 신에 대한 믿음에 질문하지 않으며 그저 자연히 삶을 영위함으로서 행복한 삶을 획득한 그럼으로 참으로 행복한 어린 아이가 되고자 하는 소망을 그의 마음속에 품었습니다...

거장 우나무노가 쓴 압도적인 환상으로 충만한 열정의 시집이 아이들이 거의 확실히 잠자리에들 시간쯤에 성공적으로 SNS와 휴대전화로 수취된것을 스페인의 많은 사람들이 크리스마스 시즌의 12일 밤에 발견하게된답니다."문을 넓혀주십시오, 아버지 왜냐하면 제가 들어갈수 없나이나 당신은 이것을 아이들을 위해서 만들었나이니 그러나 제가 너무 자라서 들어갈수가 없나이다. 만약 문을 크게 만들실수 없으시면 저를 작게 만들어 주십시오.자비의 이름으로 ;사는것이 꿈꾸는것이었던 그 시절로 되돌아가게 해주소서

스페인의 그 사상가는 기독교인이었습니다. ( "지식인"이라는 단어보다는 이것이 훨신 심오하며 따듯한 분류일것입니다.) 주일 미사에 참여하지도 않았으며 성찬식도 받지 않았으며 (비록 그가 늘 십자가를 그의 주머니에 넣고 다녔지만 말입니다.) 수많은 스페인 성직자들의 분노를 일으켰지만 (심지어 살라망카의 주교는 우나무노를 총장에 해임시켜달라고 정부에게 요청했었습니다),

그는 그럼에도 망설임없이 출렁거리는 믿음의 물속으로 뛰어내렸습니다. 그리고 그는 결코 복음과 또한 그에게 최대의 영향을 준 인물이자 자신 스스로가 그의 제자이자 아들이라고 선언한 인물에게 매달리는것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나사렛의 예수

'Vida Nueva'잡지에서 출판된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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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나무노는 키에르케고르, 하이데거와 샤르트르 사이에 있는 철학자다는 일반적인 평가를 직접 확인하는 과정에서 번외 활동으로 <안개>를 직접 번역하며 읽고 있는데, 여기서 언급되어서 상당히 놀랍습니다.
(그런데 저자 사진으로 다른 건 없나요? 우나무노 옹은 아주 경건해 보이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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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나무노가 마이너하니 놀라는게 정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저자의 사진의 경우에는 이게 제일 폼나서 가져왔습니다... 사실 번역 글을 더 올릴 생각이랍니다. 연구 잘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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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교회 내에서는 우나무노가 다소 논쟁적인 지위에 있는 사상가인가 보네요. 우나무노의 책을 직접 읽어본 적은 없지만, 몰트만 같은 현대신학자들에게 상당히 긍정적으로 인용되어서 당연히 ‘신학자‘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고뇌‘ 같은 우나무노의 사상은 ‘하나님의 파토스‘(아브라함 헤셸), ‘하나님의 고통‘(위르겐 몰트만), ‘하나님의 아픔‘(기타모리 가조), ‘하나님 안의 비극‘(니콜라이 베르쟈예프)이라는 현대신학의 중요한 논의점들과 공명하면서 ‘신의 수난불가능성‘이라는 전통적 신학의 논제를 극복하는 새로운 신론을 제시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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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몰트만 선생하고 우나무노가 궁합이 잘맞습니다. 우나무노에게 신이란 궁극적인 '희망'이며 모든 만물과 인간들을 영원화 시키는 그러니 죽음과 무에서 구출하는 '인격적 유일신'이기 때문이죠. 사실 몰트만에 대한 글을 읽다가 우나무노가 예전에 한 주장들과 비슷해서 정말로 친밀감이 느껴졌습니다. 근데 진짜로 몰트만 선생이 우나무노 알았네요? 와우. 하나님의 고뇌의 경우에는 제가 기독교의 고뇌를 안읽어봐서 구체적인 코멘트는 힘들지만 우나무노가 신의 수난불가능성에 대한 논리적인 해답에 별 관심이 없다는것 입니다. 우나무노에게 있어서 신앙이란 논리적이거나 합리적인 '관념'이 아닌 일종의 갈증이자 욕구 그러니 '사랑'이기 때문이죠. 우나무노는 신에 대한 사랑을 마치 해어진 첫사랑인 연인을 계속 기다리는 소녀의 마음에 비유합니다. 이런 결론에 도달한 이유는 '스피노자의 신'의 존재가 큽니다. 스피노자가 가톨릭의 논리주의적 스콜라 신학의 방법론을 역으로 이용하여 인격적이지도 않고 그저 논리적 관념에 불과한 '신'을 증명하는것으로 인하여 우나무노는 어떠한 논리적 주장으로 그리스도교의 신에 도달할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기에 우나무노가 볼때 기독교의 신(예수)에 도달하는 방법은 논리적 사색이 아닌 근본적으로 '사랑'입니다... 흠... 근데 이거 왠지 일본 만화영화 같은 표현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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