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적 역사성은 기술적인가요 규범적인가요

최근 언어철학에 관심을 갖고 공부하다가 비트겐슈타인을 알게 되었고 '충돌과 창조 속의 언어 가다머와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언어세계'라는 논문을 읽게 되었습니다. 이 글을 그대로 인용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우리는 특정한 제약조건의 매개를 통해 세계를 파악하고 있다. (2) 우리는 결코 이 제약조건을 넘어서 세계 자체를 파악할 수 없다. (3) 이 제약조건 속에서 이루어지는 세계이해의 한계는 바로 우리의 언어사용의 한계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말하는 언어사용의 한계가 바로 언어에 반영된 역사적 유한성입니다.

그런데 저는 여기에서 가다머와 비트겐슈타인에 의해 모순되는 두가지 명제가 동시에 주장되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1. 인간은 역사성을 넘어설 수 없다.
  2. 인간은 역사성을 넘어서지 말아야 한다.

제가 보기에 '인간은 역사성을 넘어서지 말아야 한다'는 명제는 '인간은 역사성을 넘어설 수 있다'는 명제를 전제하고 있습니다. 애초에 할 수 없는 것은 굳이 하지 말라고 명령조로 얘기할 필요가 없잖아요. 가령 비트겐슈타인과 가다머가 비판하는 언어의 형이상학적 사용이나 계몽주의적 사용은 역사성을 넘어섰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인가요? 그렇다면 1번은 틀리게 됩니다. 반면 1번이 맞다고 가정해서 그것 또한 역사성을 넘어서지 않은 사용이라면 왜 문제가 되나요?
그러면 어찌되었든 1과 2중 하나를 포기해야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말할 수 없는 것에 침묵해야 한다' 이 문장도 같은 논리도 이해가 잘 안 갑니다. 말할 수 없는 건 어짜피 말을 못하는데, 다시 말해 침묵할 수 밖에 없는데 침묵해야 한다고 규범적으로 말하는 건 이상해 보입니다.

제 이해가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모르겠네요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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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거의 10년 전 석사 초년생 때 썼던 논문이네요;; 가다머의 입장에서 답만 간단하게 말하자면, 역사성은 현상학적 기술의 결과로 제시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언급하신 두 가지 명제 중에서 (1) "인간은 역사성을 넘어설 수 없다."라는 기술적 주장으로 이해되어야 하는 거죠.

"역사성을 넘어서지 말아야 한다."라는 일종의 규범적 주장은, "인간은 역사성을 넘어설 수 없으니, 마치 본인이 역사성 넘어의 절대적 진리를 본 것처럼 착각하지 마라."라는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종의 칸트적 의미에서 '규제'를 하는 것이죠.) 그러니까, 인간이 할 수 없는 일에 대해 하면 안 된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할 수 없는 일을 마치 할 수 있기라도 것처럼 허풍 떨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가다머는 『진리와 방법』 서두에서 명확히 이렇게 말하죠.

모든 이해에 생기가 얼마나 많은 작용을 하는지, 그리고 우리가 속해 있는 전통이 현대의 역사적 의식에 의해 거의 약화되지 않았다는 것이 아래의 연구에서 입증된다면, 그것은 결코 학문의 여러 분야 혹은 실천적 삶에 지침을 내리기 위함이 아니라, 이것들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고치려는 시도에서이다. (한스게오르크 가다머, 『진리와 방법』, 제1권, 이길우 외 3명 옮김, 문학동네, 2012, 12쪽 인용자 강조.)

즉, "이러이러하게 해야 해!"라고 규범을 제시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러이러해!"라고 잘못된 생각을 바로잡기 위해 현상에 대한 기술을 제시하려는 것이 가다머의 목표입니다.

그런데 이게 사실, 좀 복잡한 문제를 지니고 있습니다. '현상학적 기술' 혹은 '현상에 대한 기술'이라는 것은 과연 역사성으로부터 자유로운지에 대한 의문이 다시 생겨나거든요. 가다머의 주장대로라면, 가다머 자신의 논의도 역사적으로 제약된 기술이어야 하는데, 정작 가다머는 '해석학의 보편성 주장'이라는 것을 아주 강하게 내세우는 철학자이기도 해서요. 사족이지만, 이런 역설을 어떻게 해소할 것인지가 요즘 제가 쓰고 있는 박사 학위 논문의 주제입니다;; (그런데 글쓰기가 너무 힘드네요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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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감사합니다 혹시 실례가 안된다면 비트겐슈타인의 입장도 알 수 있을까요ㅜ 명시적으로 말한적은 없는건가요?
비트겐슈타인의 입장이 말씀하신것처럼 '일상언어를 넘어설수없으면서 넘어선척 하지말자' 인지 '일상언어를 넘어설 수 있긴 한데 그러지 말자' 인지 잘 구분이 안되네요ㅜ
가다머와 로티는 전자의 입장이라는게 확실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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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겐슈타인도 자신의 철학을 스스로 '현상학'이라고 명명할 만큼 사태에 대한 기술을 강조합니다. 또한 가다머가 "잘못된 생각을 고치려는 시도"를 강조하는 것처럼, 비트겐슈타인 역시 잘못된 생각에서 발생하는 '철학적 질병'을 치유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런 점에서 두 사람은 근본적으로 일치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1) 이해의 역사성

논문에서도 썼지만, 비트겐슈타인이 '역사성'이라는 주제 자체에 명시적으로 주목한 것은 아닙니다. 물론, 비트겐슈타인의 규칙 따르기 논의에는 가다머가 이해의 '역사성'이라고 표현한 사태가 기술되고 있기는 하지만, 비트겐슈타인 자신이 이 주제를 가다머만큼이나 부각시키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하버마스(J. Habermas)나 론(C. Lawn)은, 가다머와 비트겐슈타인이 거의 유사한 철학을 전개하고 있지만, 가다머가 비트겐슈타인에 비해 이해의 역사성에 더욱 주목한다는 점에서 특징이 있다고 평가하기도 합니다.

(2) 후설의 현상학과 비트겐슈타인의 현상학

이 점은 제가 저 논문을 쓸 당시에는 잘 주목하지 못하였던 주제이긴 한데, 동일하게 '현상학'이라는 용어를 쓰고 있지만 비트겐슈타인이 말하는 현상학과 (가다머가 의존하고 있는) 후설의 현상학에는 다소 차이가 있습니다. 후설은 의식에 필증적 명증성을 지니는 '직관'을 대단히 강조하지만, 비트겐슈타인은 이런 식의 직관에 호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차이는 투겐트하트(E. Tugendhat)가 강조하는 점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언어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현상학적 기술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에 대한 의문이 생겨날 수밖에 없는데, 이 점은 제가 이후에 쓴 「사용 이론과 회의주의를 넘어서: 비트겐슈타인의 정적주의」( 『철학논집』, 제69권, 2022, 143-178)라는 글에 부분적으로 설명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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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이 너무 명료해서 이게 정녕 제가 알던 비트겐슈타인과 가다머가 맞는지 의심이 될 정도입니다..

숱한 질문들에 항상 명쾌한 답변 달아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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