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리철학논고 맨땅 헤딩중... 대상에 대해 제가 이해한 것이 맞나요?

제가 가진 책 중(원래도 몇 없지만) 유일한 철학 책으로 논리철학논고를 이번에 구매해서 읽고 있습니다.
문학이나 시는 비좁은 면에서 좋아하는 편이긴 했지만, 철학 서적을 읽는 것은 처음입니다.
읽은 책도 몇 없어 제 독해력이 형편 없을지도 모릅니다. '어린 왕자'와 '인간 실격'만 완독 해봤으니까요.

논고를 읽는 제 목표는 혼자의 힘(되..되도록이면..) 으로 책을 해독해내는 것입니다.
제가 철학이라는 문화에 대한 병아리라 멍청한 질문만 여러분께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의심도 돼요.
전 대충 철학이 어떤 흐름으로 전개됐는지에 대한 간략한 파악을 하고 있고, 윤리와 사상 지식이 있습니다. 논고 책만으로 독해가 잘 안되면 그의 스승 러셀과 프레게, 그가 작성했다던 철학 노트라도 찾아서 추리하는 작업을 하면 될 것 같은데, 이렇게 시간을 쏟아부어 이 책을 온전히 이해한다는 게 의의가 있을지 마음이 갑자기 흔들릴 때도 있네요. 아무튼 저는 논고를 함락 시키고 싶습니다.
그리고 도대체 훌륭한 철학을 만든다는 것이 이 책과 씨름 하는 과정에서 뭔지 이해할 수 있기를 바라네요.

그리고 본론으로 들어가서, 질문 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논고에서 말하는 '대상'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 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사태,사실,현실,세계,논리적 공간,표현,형식,구조와 배열...
제가 러셀의 기억을 가지고 비트겐슈타인과 대화하지 않는 한은 명확히 이해하긴 힘들어 보입니다.
대상이 실질적인 사물들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라고 하고...
그럼에도...
비트겐슈타인이 신문에서 사건을 진술하려고 모형을 사용하는 것을 본 뒤
이 그림이론을 고안했다는 것을 들어서 이 맥락을 바탕으로 좀 이해를 시도해본 것이 있어요.

대상은 단지 대상 연관인 사태를 기술하는 요소 명제 속에 있는 이름들과 짝 지어 집니다. 우린 명제를 읽는 순간에 사실을 보듯이 읽는 것 같습니다. 따라서 가능한 모든 사태가 모인 논리적 공간이 아니라 비존립과 존립이 확정된 현실의 범위에서 문장이 뜻을 가지는지 가지지 않는지 판단하고 있죠. 때문에 문장 속에 드러난 이름들은 실질적 속성을 가진 사물로써의 대상으로 이해됩니다. 근데 사태라는 것은 둘 이상의 대상으로 연관할 수 있는 가능성들이기 때문에, 대상은 '논리적으로 가능한'의 '논리'를 책임질 수 있는 존재일 것입니다. 예를 들어 '지금 시계는 5시를 가리키고 있다' 에서 '시계', '5시', '지금' 이 대상이고 이 대상이 연관되어 만들어진 '지금 시계는 5시를 가리키고 있다.'가 사실일 때 우리가 인지하는 친숙한 사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대상이 현실에 결과로 드러난 사물은 아닙니다. 사태의 다양한 구조를 결정할 형식을 대상이 가지고 있는데, '시계' 자체가 대상인 것은 아니고 시계가 가지고 있는 내부적인 속성들(논리적 작용이 가능한) (속성도 명제로 기술되면 사태의 영역이기 때문에 내부적 속성을 가지게 하는 또한의 무언가 까지가 대상의 개념?)이라는 검을 주조할 '주형'으로 생각한 것이 아닐까 싶어요. 현실에서 보이는 시계는 존립하는 사태구요. 단지 결과적인 사실에 드러난 그 어떤 대상을 시계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것입니다. 대상은 이런 논리적인 개념이라 사태를 동원하지 않으면 설명이 안되는지도 모르겠어요. 또한 시계의 외부적 속성(외양)은 연관 속에서 생겨나는 것이고 비트겐슈타인은 이런 것을 크게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내부적 속성을 형식으로 가지고 있는 대상들의 조합을 요리조리 고민 하는게(그 이상은 할 수 없는) 사람의 사고인 것입니다. 대상의 형식을 줄곧 따라가면 비트겐슈타인은 논리적으로 잘 사고할 수밖에 없다고 봤을 것이고 그에 맞게 배열을 다르게 하며 사태를 여러가지 상상하며 명제를 세운 뒤, 정말 세계 속에서 검증해봤을 때 짝지어지면 존립. 그렇지 않으면 비존립으로 판단하는 것이 인류의 학문이라고 생각한 것이 아닐까 싶네요. 대상은 사태를 논리적인 관계 위에 놓기 위해서, 또한 원자적으로 분해 할 때 반드시 필요한 구분이고, 다만 이 하위 구분된 모종의 어떤 것들이 사실 속에서는 감각되는 사물로써 드러나 직관적인'대상'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기에 그 이름을 붙인 것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가 잘 이해한 것 같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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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비트겐슈타인이 본인이 '대상'이나 '사태'나 '사실'에 대해 예시를 들지 않았다는 점을 기억하실 필요가 있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구체적으로 어떤 대상이나, 사태나, 사실이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지를 실제로 찾는 작업이 자연과학을 통해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 점이 비트겐슈타인의 전기철학이 지닌 결정적인 한계와도 관련이 되어 있다는 비판이 자주 제기되기도 합니다. 비트겐슈타인의 전기철학대로라면, 요소명제에 대응하는 가장 기초적인 사실이 무엇인지가 어떤 방식으로든 결국 지목될 수 있어야겠지만,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대상'이 의미하는 것들이 무엇인지도 결국 밝혀질 수 있어야겠지만,) 이런 기초적인 사실을 찾는 작업이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이후의 철학들을 통해 드러나게 된 결론이니 말입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저는 전기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에서 '사태', '사실', '대상'과 같은 개념들이 과연 정합적으로 이해될 수 있는지에 대해 꽤나 의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애초에 이 기획 자체를 비트겐슈타인 본인부터가 실패한 것으로 인정하였는데, 후대의 철학자들이나 비트겐슈타인 연구자들이 이 개념들을 유의미한 것으로 살려내려 한다는 것이 다소 역설적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요. (더군다나, '사태', '사실', '대상'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 주석적으로도 꽤나 해결하기 쉽지 않은 논쟁이 있습니다. 이 개념들이 철학적으로 정당한지도 의문스럽지만, 애초에 연구자들 사이에서 이 개념에 대해 주석적으로도 의견의 불일치가 있는 거죠.) 여하튼 이런 배경에서 몇 가지 코멘트를 달아보겠습니다.

(1) 대상이란 무엇인가?

대상의 예시로 거론하신 것들이 다소 적절하지 않습니다. 가령, '지금(now)'은 부사이기 때문에 이름으로 여겨질 수 없습니다. 저는 비트겐슈타인이 '지금'과 같은 부사적 표현으로 대상을 가리키려 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이런 부사적 용어들의 의미론에 관해서는 영미권 언어철학 내부에서 지금도 여러 가지 토론들이 있습니다. 또한 '5시' 같은 표현들도 과연 '사물(thing)'을 가리키는 이름이라 할 수 있을지 의문스럽습니다. 오히려 플라톤주의를 대단히 싫어하였던 비트겐슈타인이라면 추상적 대상들이 세계에 존재한다는 주장을 거부하였을 것으로 보입니다.

(2) 사태란 무엇인가?

'사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는 연구자들 사이에서 논란이 있고, 최소한 세 가지 서로 다른 해석들이 대립하지만, 그 어떤 해석에서도 시계는 사태가 될 수 없습니다. 즉, (a) 버트런드 러셀 등이 제시한 고전적 해석에서 사태는 '원자적 사실'을 의미하는 것으로 여겨지고, (b) 에리크 스테니우스 등이 제시한 표준적 해석에서 사태는 '기술적 내용(descriptive contents)'을 지닌 존재물로 여겨지고, (c) 피터 시몬스가 제시한 해석에서 사태는 '원자적 복합체(atomic complexes)'로 여겨집니다. (워낙 오래 전에 읽은 논문이라 제 요약이 부정확할 수도 있지만, Jimmy Plourde의 "States of Affairs, Facts and Situations in Wittgenstein’s Tractatus"라는 논문이 이런 해석의 차이들을 매우 잘 비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 해석은 모두 '사태'가 어떤 방식으로든 우리의 언어를 이루고 있는 문장 구조에 대응한다는 점을 주장합니다. 즉, (어떤 해석을 취하든지) 사태는 주-술 구조로 이루어진 문장에 대응하는 것이지, '시계'라는 단어에 대응하지는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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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리철학론 이렇게 읽어야한다. > 좋은책인데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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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틈나는대로 찾아보면서 논고 읽어볼게요

좀 늦은 질문이어서 죄송해요. 제가 뭘 모르는지 감으로만 가지고 있다가 이걸 문장화 시키는데에도 번뇌가 있었는데, 좀 시간을 묵혀두고 다시 찬찬히 봐보니 지금이라면 다시 질문할 수 있을거 같아서 올려봅니다. 영어공부도 틈틈히 하면서 자료도 찾아보고 논고도 계속 도전해보고 있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1. 지적해주신 사태의 부분에 대해서 제가 문장을 묘하게 쓴거 같아 다른 질문으로 가공해서 여쭈어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현실에서 시계를 묘사할 때 단어 만으론 확정적으로 드러나지 않아 이름이 어떻게 조합되든간에 문장으로 묘사되면서 진술 될텐데요. 결국 시계라는 현실이 주어져 있다면 시계는 사태의 꼴로 존재한다고 봐야 할것 같은데 그것이 맞는지 묻고싶어요. 비트겐슈타인을 따르면, 대상 홀로 덩그러니 놓여서 그런 사물들의 총체로 이뤄진 세계가 아니고 논리적인 속성을 가진 여러 존재자들이 결합 속에서 비로소 구체적인 면을 얻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현실이라고 이해했거든요? 원자와 원자의 결합이라는 느낌이 들었어요!! 우린 수소 하나가 가진 논리적인 정보는 알고 있지만 이게 구체적으로 어떤 실체인지 알 수가 없고, 단지 '수소' 하면 떠오르는 자잘한 연상들은, 수소가 사용된 여러 물질들 속에서 수소가 가진 추상적인(즉시적인)인식에 여러 번 더해지면서 의미가 풍부해지는 것 뿐이라고 생각했어요. 이를테면 수소가 물 분자와 같은 사태 속에서 얻은 실질적인 형태를 저는 기억했다가 개념을 풍부하게 확장시켜 가는 것이죠. 그래서 쉽게 생각하면 언뜻 보기에 세상은 대상들의 총체인 것 같아도, 그런 인식은 또 사태라는 것으로 여러 번 갈라질 수 있는 것이네요. 따라서 단어가 사태에 대응한다는 뜻으로 질문 드린 것은 아니고, 세계 속의 대상이 사태의 꼴을 가지고서 드러날 수 밖에 없다고 보면 맞을까요? 그리고 대상이란 그 대상이 가진 형식과 내용을 바탕으로 논리적으로 가능한 사태 속에서 실질적으로 정해지는 것이지, 그 자체만 두고 봤을 땐 구체적인 일상물로 이해할 수 없게되는 개념이 맞을까요?

이 대목에서 요소명제에 대응하는 가장 기초적 사실을 찾는 것에 실패했다는 것이 잘 와닿지 않는데요
시계가 손목에 걸려있고 나는 팔이 아프다. 라고 하는게 복합적인 명제이고 논리연결사를 떼어버린
'시계가 손목에 걸려있다.' '나는 팔이 아프다.' 의 각각이 요소명제가 되는게 아닌가요? 혹시 러셀과 프레게의 연구와도 관련이 있는 걸까요? 그 분들이 명제를 'x가 ~다. 어떤 ~하는 속성이 있는 x가 있다. x는 팔이다.' 이런식으로 분해하셨다고 들었는데 그 부분을 공부하면 이해가 가능한 부분일지요? 그 복합체 자체와 그 구성인 요소 각각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분해하면 요소명제도 끊임없이 분해된다는 얘기로 이해해야 할까요? 후기철학에서 그 결론이 드러났다고 하니 나중에 저서를 읽어보겠지만, 지금으로썬 잘 이해가 안되네요..ㅠㅠ

(1) 사물 존재론과 사태 존재론

언급하신 "시계는 사태의 꼴로 존재한다."라는 말을 어떤 맥락에서 말씀하신 것인지에 따라 '그렇다'라고도 할 수 있고 '아니다'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우선 '사태'란 언어에서의 '문장'에 대응하는 존재물이고, '대상'이란 언어에서의 '이름'에 대응하는 존재물입니다. 그래서,

(a) '시계'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대상 혹은 사물이 사태의 꼴로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은 다소 어색합니다. 비트겐슈타인의 표현을 사용하자면 이 말은 논리적 통사론을 위반한 주장, 혹은 언어의 문법을 위반한 주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적어도, 대부분의 비트겐슈타인 연구자들은 사태의 예시로 시계, 탁자, 나무 같은 대상들을 거론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고양이가 매트 위에 있다."라는 문장에 대응하는 [고양이가-매트-위에-있다The-cat-is-sitting-on-the-mat] 혹은 매트-위에-있는-고양이(cat-being-on-the-mat) 같은 것을 사태의 예시로 가장 많이 사용하곤 합니다. (이 예시는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에서의 사태 개념에 대한 예시로도 자주 등장하지만, 다른 분석형이상학 텍스트들에서도 매우 흔하게 등장합니다.)

(b) 다만, 시계처럼 얼핏 단일한 개체인 것처럼 보이는 대상이나 사물조차 실제로는 수많은 사태들의 결합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신 것이라면, 그 점은 정확히 이해하신 것이 맞습니다. 잘 말씀하신 것처럼, 비트겐슈타인은 세계가 '사물들의 총체'가 아니라 '사태들의 총체'라고 주장합니다. 어떤 연구자들은 이 사실로부터 비트겐슈타인이 '사물 존재론'이 아니라 '사태 존재론'을 옹호했다고도 해석하는데, 용어를 무엇으로 사용하든지 간에, 비트겐슈타인이 단순히 '이름'에 대응하는 대상이나 사물을 세계의 기초적 요소로 보지 않았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프레게가 '맥락 원리(context principle)'이라고 부른 원리에 따라, 의미란 특정한 맥락을 전제하고서만 이야기될 수 있다는 것이 비트겐슈타인을 비롯한 이후 많은 철학자들에게 통용되던 견해였으니까요. 단순히 "시계"라고 말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하고, "이것은 시계이다.", "이 시계는 정교하다.", "이 시계는 고장났다.", "이 시계는 멋있다." 같은 문장 단위부터만 유의미한 사유가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현대 논리학은 진리값을 지닌 문장들 사이의 함수 관계를 기초로 성립하다 보니, 문장이 아닌 단순한 이름만으로는 아무런 논리적 사유를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대상을 생각하려 하든지, 그 대상에 대해 기본적으로 문장 단위의 생각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더 나아가, 우리의 사유와 외부의 세계가 서로 대응해야 한다면, 그 대응은 문장과 사태 사이의 대응이어야 한다는 것이, 전기 비트겐슈타인의 주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사유가 단순히 '시계', '탁자', '나무' 같은 단어들이나 그 단어들에 대응하는 이미지들의 연쇄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전제에서 결론으로 이어지는 일종의 진리 함수 관계로 파악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2) 원자적 명제와 원자적 사실

비트겐슈타인이 사용하는 '원자적 명제'와 '원자적 사실'이라는 용어는 (더 정확히 말해 '요소 명제'와 '사태의 존립'이라는 용어는) 훨씬 더 엄격합니다. '원자적 명제'란 단순히 분자적 명제를 이루고 있는 요소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더 이상 분석될 수 없는 가장 단순한 명제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비트겐슈타인은 원자적 명제의 기준으로, 그 명제들이 상호 독립적이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가령,

서울은 부산보다 북쪽에 있고, 부산은 서울보다 남쪽에 있다.

라는 문장은 "서울은 부산보다 북쪽에 있다."와 "부산은 서울보다 남쪽에 있다."라는 두 명제의 연언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하지만 두 명제 중에서 어느 쪽도 원자적 명제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서울은 부산보다 북쪽에 있다."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부산은 서울보다 남쪽에 있다."라는 사실을 논리적으로 도출할 수 있고, "부산은 서울보다 남쪽에 있다."를 아는 사람은 "서울은 부산보다 북쪽에 있다."를 논리적으로 도출할 수 있으니까요. 두 명제는 상호 독립적이지 않다는 점에서 비트겐슈타인이 생각한 원자적 명제의 기준을 만족시키지 못합니다.

문제는 '상호 독립성'이라는 이 기준이 결국 비트겐슈타인의 전기 철학을 붕괴시키는 약점이 된다는 점입니다. 진리함수에 근거한 형식논리로는 분명히 상호 독립적인 것처럼 보이는 두 명제가, 실제로는 상호 독립적이지 않은 경우가 굉장히 빈번하거든요. 당장 위의 서울과 부산 예시도 그렇지만, 비트겐슈타인이 실제로 들었던 예시는 소위 '색깔의 배타성 문제(color exclusion problem)'라고도 불립니다. "이것은 빨갛다."와 "이것은 파랗다."가 형식논리적으로는 상호 독립적이지만, 실제로는 어떤 시공간 좌표점에 놓인 사물이 빨간 색이라면 그 사물은 파란색일 수 없다는 점에서 상호 독립적이지 않다는 것이 비트겐슈타인의 고민거리였죠. 바로 이 점 때문에 후기 비트겐슈타인은 완전히 상호 독립적인 개별 명제들로부터 세계를 구축하려는 시도를 포기하게 됩니다. 오히려 어떠한 명제들도 완벽하게 독립적이지는 않다는, 그래서 애초에 원자적 명제나 원자적 사실이란 존재할 수조차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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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2번째 질문의 답변에서 지적해주신 대로 제가 단지 분자적 명제를 이루는 요소로만 간편하게 이해했을 뿐, 심도 있게 몰두하여 섬세하게 보는 정신이 부족했습니다. 어느 부분에서 펑크가 났는지도 알았습니다.. 관찰력도 두뇌 회전도.. 늘 아쉬움이 남네요. 그래도 요즘 책 읽는 것 자체가 물 마시는 것처럼 편해지고는 있습니다. 항상 못난 결과만 나와도 글 쓰고 책 읽는 순간에만 있으면 근심이 쉽게 없어져서, 그게 좋아서 계속 합니다. 추상적인 서술에 혼자 다가가지 못하면 죽겠다는 각오로 임하겠습니다. 누군가 다 닦아놓은 레퍼런스에 변주만 주는 정도가 제 지혜의 전부니 항상 능숙한 사람들이 부럽습니다.. 여전히 제가 무능하다는 것만 알고 갑니다. 도와주셔서 고맙습니다. 수준 낮은 질문에 시간 써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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