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설 연구를 위한 1차 문헌들

Husserl

후설은 정말 공부하기 쉽지 않은 철학자입니다. 그가 다루는 주제들이 복잡하고 섬세하기도 하지만, 일단 후설이 글을 명료하게 쓰는 철학자에 속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상당한 배경지식이 없으면 후설이 글에서 의도하는 바가 정확히 무엇인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독일어 원문을 읽어도 이해가 어려운데, 번역본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다수의 국내 번역본은 오역도 많을뿐더러 원문 이해가 선행되지 않은 경우가 많아서, 후설이 대강 어떤 얘기를 하는지는 알 수 있지만, 디테일하게 들어가면 곡해를 피할 수 없게끔 되어 있습니다.

게다가 후설은 40,000쪽 가량의 방대한 원고를 남겼는데, 이 원고가 생전의 저작, 강연 등과 함께 『후설 전집』으로 계속 출간되고 있습니다. 현재 약 50권 정도까지 출간되었지만, 모든 유고가 출간되려면 아직 멀었고, 이미 출간된 유고들을 섭렵하고 있는 연구자도 극소수입니다. 그래서 '권위자'라 불리는 사람들조차 스스로 후설 철학의 전모를 파악한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후설을 연구하려는 사람들은 막막할 수밖에 없습니다. 진입장벽이 너무 큽니다. 학계에서 연구를 인정받으려면 어느 정도 1차 문헌에 정통해야 하는데, 이를 위해 감내해야 하는 비용이 너무 큽니다. 전문 연구를 희망하지 않는 입문자의 경우도 대체 무엇을 어떻게 공부해야 하는지 갈피를 잡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제 경험상 후설을 연구하려는 분들이 이 정도를 읽으면 좋을 것이라고 생각되는 1차 문헌들을 뽑아서 간단한 소개를 붙여 봤습니다. 대단한 가이드라인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의 공부가 필요한지 대략 감을 잡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입문

아래는 후설의 현상학이 대강 어떠한 것인지 파악할 수 있게 해 주는 문헌들입니다. 특히 「현상학」, 『성찰』, 『위기』 중 하나만 정확히 독해해도 충분합니다. 물론 그 정확한 독해가 어렵기는 하겠지만요.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현상학」: 전집 9권(『현상학적 심리학』) 부록. 후설이 현상학을 일반인에게 소개하기 위해 쓴 글이라서 접근성이 좋고, 현상학의 목적과 주제들이 압축적으로 잘 서술되어 있습니다.

『데카르트적 성찰』: 전집 1권. 후설의 파리 강연(1929년)을 바탕으로 쓰였습니다. 입문용으로 가장 많이 사용되는 저작입니다. 데카르트의 『성찰』과 관련하여 현상학의 목적과 현상학에 이르는 길, 의식의 구조, 이성비판, 상호주관성(의식의 상호관계) 등 굵직한 주제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유럽 학문의 위기와 초월적 현상학』: 전집 6권. 후설의 빈 강연과 프라하 강연(1935년)을 바탕으로 쓰였습니다. 근대 철학사를 비판적으로 해설하고, 실증주의(방법론적 자연주의)를 학문의 위기를 낳은 주범으로서 비판합니다. 그 대안으로서 현상학을 제시하고, 학문적 세계에 앞서는 '생활세계'를 통해, 그리고 심리학을 통해 현상학에 이르는 길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엄밀학으로서의 철학」: 1911년에 『로고스』 지에 실린 논문으로 당대의 자연주의와 역사주의를 비판하고 있습니다. 현상학의 출범 동기를 이해하는 데 좋은 글입니다. 네이버 지식백과에 이남인 교수님의 해제가 제공되어 있습니다.

  1. 기초

아래는 어느 정도 전문적인 연구를 희망하는 분들에게 필수적인 문헌입니다.

『논리연구』 2권: 전집 19권. 1901년에 출간. 현상학을 출범시킨 가장 중요한 저작입니다. 많은 통찰을 담고 있을 뿐만 아니라, 후설의 현상학의 기본 구도는 이 책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논리학을 철학적 토대 위에 세우기 위한 여섯 개의 연구로 이루어져 있는데, 1연구는 언어와 의미, 2연구는 보편자, 3연구는 부분전체론, 4연구는 문법론(통사론), 5연구는 의식과 지향성, 6연구는 인식을 다룹니다. 이 중 5연구와 6연구가 본격적인 현상학적 연구에 속합니다.

『순수 현상학과 현상학적 철학의 이념들』 1권: 전집 3권. 1913년에 출간된 두 번째로 중요한 저작입니다. 『논리연구』에서 제시된 현상학의 내용이 어느 정도 발전함과 함께, '현상학적 환원'의 방법, 그리고 현상학을 통해 철학과 학문을 엄밀한 토대 위에 세운다는 '초월철학'의 구상이 본격적으로 제시됩니다. 현상학이 자연학, 심리학, 정신학(사회문화학)에 어떻게 기초를 제공하는지 보여주고자 하는 『이념들』 2권(전집 4권)을 함께 읽으면 좋습니다. 단 이 책은 미완입니다.

  1. 심화

이미 위의 문헌들이 구체적인 연구들을 담고 있기는 하지만, 이 연구들은 아직 기초에 속합니다. 아래는 후설의 심화된 연구들을 담고 있는 문헌들입니다. 물론 여기에서 소개되지 않은 다양한 주제의 연구들이 출간되고 있지만, 아래에서는 모든 후설 연구자에게 공통적으로 요구된다고 생각되는 문헌들만 추렸습니다.

『내적 시간 의식의 현상학』: 전집 10권. 후설의 1905년 강의를 중심으로, 의식의 시간성에 대한 초기 연구들을 담고 있습니다. 후설은 '흐름'을 의식을 이루는 가장 기본적인 구조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의식의 시간성에 대한 연구는 보통 후설의 연구의 가장 심층에 자리하고, 거기에서 의식의 구조 전체에 대한 조망이 이뤄지곤 합니다. 이 책은 의식의 구조에 대한 연구에서 빼놓을 수 없으며, 의식의 시간성에 대한 이후(1910-1930년대)의 연구들인 『베르나우 원고』(전집 33권), 『C 원고』(『후설 전집 자료』 8권)와 함께 다뤄지곤 합니다.

『수동적 종합 분석』: 전집 11권. 후설의 1920년대 '발생적 논리학' 강의와 관련 연구들을 담고 있습니다. 이 강의에서 후설은 지각에서 일어나는 인식, 긍정과 부정, 감각 자료들의 종합 같은 현상들을 분석하고 이를 통해 논리학의 기본 개념들의 발생을 추적하고자 합니다. 특히 이 강의의 3부는 '발생적 현상학'의 관문이 되는 연구들을 담고 있습니다.

『경험과 판단』: 1920년대 강의와 유고들을 바탕으로, 후설 사후 그의 조교인 란트그레베가 편집 출간했습니다. 『수동적 종합』과 마찬가지로 경험으로부터 논리적 판단의 발생을 추적하고, 특히 지각, 판단, 선험적 판단의 구조를 구체적으로 다룹니다. 후설이 생전에 출간한 『형식논리학과 초월논리학』(전집 17권)의 후속편인데, 이 책(『논리학』)은 현상학이 제공하는 토대 위에 논리학을 세워야 한다는 구상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1. 고급

지금까지 소개된 문헌들을 섭렵했다면 이미 전문가에 준하는 이해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후설 철학의 전모에 접근하는 데는 아직 부족한데, 앞서 말했듯이 방대한 양의 유고들이 남아 있을 뿐만 아니라, 이 유고들에서 더욱 심화된 버전의 연구가 수행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래는 후설의 이러한 후기 연구들을 이해하기 위해 중요한 문헌들입니다. 아래의 문헌들에 산발적으로 실려 있는 유고들의 상당수가 심화된 '발생적 현상학'의 주제들, 이를테면 주체의 본능, 습성, 행동, 무의식 등을 다룬다고 보시면 됩니다.

『상호주관성』 1, 2, 3권: 전집 13, 14, 15권. 모든 시기에 걸친 후설의 상호주관성에 대한 연구들을 담고 있습니다. 특히 2권과 3권에는 발생적 현상학에 속하는 여러 연구들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C 원고』: 전집 자료 8권. 부제는 '시간 구성에 대한 후기 문헌들'이지만, 시간성뿐만 아니라 본능, 행동 등을 다루는 연구들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의식의 시간성을 다루는 만큼 의식의 구조에 대한 많은 연구들을 담고 있습니다.

『생활세계』: 전집 39권. 생활세계와 그 속에서 일어나는 삶에 대한 연구들을 담고 있습니다. 무의식, 탄생, 죽음 같은 주제들도 다뤄집니다.

※ 4번에서 소개된 문헌들을 제외하면 모두 영역본과 국역본이 있습니다. 하지만 총론이 아닌 각론이 다뤄지는 곳에서는 오해의 여지가 크기 때문에, 정확한 독해를 지향할 경우, 번역본은 보조로 활용할 것을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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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현상학은 항상 언젠가 읽어봐야지, 읽어봐야지 하면서도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몰라 막막했는데, 시간이 나면 1에 소개된 입문부터 찬찬히 읽어봐야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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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정보 감사드립니다! :slightly_smiling_face: 머학원 강의에서도 못 배운 내용을 올빼미에서 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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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나중에 한번 공부해 보고 싶네요. 국역본 뿐만 아니라, 영역본도 오해의 여지가 큰 편인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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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철학자나 그렇지만, 후설은 유독 원문과 번역의 괴리가 큰 편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영어 번역이 너무 안 읽혀서 차라리 독일어가 낫긴 했습니다. 그래도 영역본은 국역본보다 사정이 좋은 편입니다. 본문에서 번역본에 대해 부정적으로 말하긴 했지만, 사실 전공자 수준으로 후설을 공부할 게 아니라면 노력 대비 효율을 고려할 때 번역본을 읽는 게 최선일 것 같습니다. 단 후설은 연구서에서 아주 세세한 기술과 분석을 수행하는데, 번역본으로 이 과정을 꼼꼼히 따라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 점을 염두에 두시고 본인의 독해를 확신하지 않는 태도를 가지기만 하면 괜찮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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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감사합니다. 혹시 '엄밀학으로서의 철학'과 함께 번역되어 실려있는 '현상학의 이념'을 적어두지 않으신 이유가 있을지요?

'현상학의 이념'도 좋은 글이지만 다루는 내용이 대부분 '성찰' 안에 포함된다고 보아서 제외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