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서적으로 박치기하며 공부했는데, 이런 좋은 한국어로 쓰인 책이 있었네요. 책의 2장에 해당하는 부분으로, 숙의 민주주의 이론에 대한 입론 정도의 포지션입니다.
심의 민주주의 이론은 공동선 증진을 위해 민주적 의사결정 과정에 이성적 토론을 결부한다. 이러한 시도는 기본적으로 투표 중심의 이론에서 토론 중심의 이론으로의 전환으로 해석된다. 이에 더해, 이러한 움직임은 공적 이성이나 공적 타당성에 관심을 기울이게 만든다.
심의 민주주의라는 용어는 조셉 비세트에 의해 고안된 후, 버나드 매닝과 조슈아 코헨에 의해 가속력을 얻었다. 이 심의 민주주의 이론이 등장하기 이전에 민주적 이상은 투표와 대표 등의 장치를 통해 선호나 이익을 집약해 집단적 결정으로 전환하는 관점에서 이해됐다. 심의 민주주의 이론은 바로 이 관점에 도전한다. 해당 이론은 민주적 정당성의 본질이 단순한 투표에 의한 결정보다는 집단적 결정 과정에서 개인들이 진정한 심의에 참여할 수 있는가의 여부에 관심을 둔다.
심의 민주주의 이론이 투표 중심의 민주주의를 반대하는 결정적 이유는 다음과 같다: 그것은 자기(사적) 이익이나 편견 또는 무지에 의한 주장을 정의의 원칙과 근본적 필요에 입각한 주장과 구별할 기회조차 마련하지 않는다. 이는 곧 정치과정에 사실상 공적 차원이 실종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구체적으로 심의 민주주의 이론이 자신 이전의 민주주의 이론에 반대하는 그들의 가정은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1) 정치는 주로 경쟁적 이익들 간의 갈등의 입장에서 이해돼야 한다. 그렇기에 공적 이성보다는 경쟁적 이익들 간의 협상으로 이해돼야 한다.
(2) 합리적 선택의 틀이 합리적 의사결정에 적용되는 유일한 모델이다.
(3) 정당한 정부란 원자적 개인들의 소극적 자유를 보호하는 것에 주력하는 최소 정부여야 한다.
(4) 민주적 결정은 투표로 귀결된다.
심의 민주주의 이론은 위와 같은 가정에 반대하며 탄생한 이론이면서도, 동시에 두 가지 현대 민주주의 정치의 근본적 문제를 지적하는 이론이기도 하다. 그 두 가지란 ①시민들의 사적 이익 우선주의 ②현실로 다가온 다원주의로 인한 도덕적 불일치. 이 문제를 적절히 해결하는 방도로 심의 민주주의 이론가들은 숙고를 내세운다. 그들이 보기엔 개인의 입장에서 어떤 정책이 정당하다고 생각하는 좋은 이유가 집단적 시민으로서 우리가 입법하기 위해 주장하는 정당화의 충분한 근거가 아니며, 후자를 위해선 계속되는 심의가 필요하다.
이러한 심의 민주주의 이론은 두 가지 이론적 근원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자유주의이고, 다른 하나가 비판이론이다. 근원이 되는 두 이론 모두 왜곡 없는 정치적 대화가 심의 민주주의의 본질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차이도 존재한다.
자유주의자들은 그 왜곡에 대처하기 위해 헌법적 및 법적 제도를 고안하는 데 관심을 둔다. 반면, 비판이론가들은 자유주의자들의 방법이 문제 해결을 위한 충분한 방법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들이 보기에 자유주의자들은 제도적 수단을 통해 쉽게 해결할 수 없는 비제도적인 억압 및 왜곡 요인, 예컨대 지배적 담론과 이념들 그리고 이것들과 결합한 구조적인 경제적 세력을 충분히 인지하지 않고 있다. 그래서 비판이론가들은 억압 및 왜곡을 인식할 수 있는 시민들의 힘을 기르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리고 그 힘은 진정한 민주 정치에의 참여를 통해 함양될 수 있다는 것이 비판이론의 주요 골자다.
출처: 심의 민주주의, 2012: 9-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