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올로기란 무엇인가?

요즘 럭키비키크립키를 읽는데 너무 어려워서 비판이론으로 도망쳤다가 그런 김에 요약문을 작성해봤습니다.

1장 이데올로기(27-63)

1절. 기술적인 의미의 이데올로기

1.1. 순수히 기술적인 의미에서의 이데올로기

기술적인 의미에서의 이데올로기란 연구의 편의를 위해 집단의 사회문화적 체계 중 하나의 부분을 지칭하는 개념이다. 이때의 이데올로기란 말에는 집단 구성원이 가진 신념, 사용하는 개념, 나타내는 태도나 심리적 경향성 등이 포함된다. 이러한 이데올로기를 ‘매우 넓은 의미에서의 이데올로기’ 혹은 ‘순수히 기술적인 의미의 이데올로기’라고 한다. 이것은 다음의 세 특징을 지닌다.

(A) 신념, 습관, 태도, 습속 등만을 포함하지 않는다.

(B) 한 집단의 구성원 모두가 이것들을 함께 공유하지는 않는다.

(C) 평가적인 것도 가치 판단적인 것도 아니다.

1.2. 신념을 지칭하는 기술적인 의미에서의 이데올로기

하버마스는 한 사회의 행위자들이 가지고 있는 신념을 지칭하는 개념으로 이데올로기를 사용한다. 이 점에서 하버마스는 위와 달리 ‘좁은 의미에서의 이데올로기’를 말하는 것이다. 하버마스는 모든 신념을 구분하는 두 가지 방식을 주장한다.

첫째는 ‘무엇에 관한 신념인가’를 기준으로, 즉 ‘신념의 내용’을 기준으로 구분하는 것이다. 어떤 신념이 경제적 거래에 대한 것이라면, 그 신념은 경제적 이데올로기이다.

둘째는 ‘행위에 영향을 미치는 이데올로기의 요소’, 즉 ‘기능적인 속성’에 따라서 구분하는 것이다. 어떤 신념이 경제적 행위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라면, 그 신념은 경제적 이데올로기이다. (사실 이 두 번째 구분은 난점을 가진다. 어떤 행위가 종교적 의식인지 경제적 관례인지 명확히 분류하기란 쉽지 않기에, 이러한 행위에 영향을 미치는 신념이 어떠한 신념인지 분류하기도 쉽지 않다)

두 구분에 따라 이데올로기는 (1) 어떤 내용을 가지고 (2) 어떤 행위 영역에 영향을 미치는 신념인지에 따라 달라진다. 그리고 한 집단은 다양한 이데올로기를 가질 수 있다. 즉, 한 집단은 종교적인 이데올로기도 가지면서도 경제적 이데올로기를 동시에 가질 수 있다. 이 점에서 어떤 좁은 의미의 이데올로기를 어떤 집단은 가질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1.3. 세계관을 지칭하는 기술적인 의미에서의 이데올로기

사회 이론가들은 ‘집단의 이데올로기’라는 말을 사용하기도 한다. 이때 해당 용어는 그 집단의 세계관 혹은 세계상을 의미한다. 이러한 용례는 개인이나 집단이 신념, 태도, 인생의 목적 등의 다발이 임의적이지 않고 어떠한 정합성을 지니고 있다는 생각에 착안한다. 세계관을 지칭하는 기술적인 의미에서의 이데올로기는 다음의 성질을 가진다.

(A) 이 부분에 속한 요소들을 그 집단의 행위자들이 널리 공유하고 있다.

(B) 이 부분에 속한 요소들은 체계적으로 서로서로 관련을 가지고 있다.

(C) 이 요소들은 콰인이 사용한 의미에 있어서와 같이 행위자들의 개념 도식에 있어서 핵심적인 구실을 한다. 달리 말해 행위자들은 그것들을 쉽게 포기하지 않는다.

(D) 이 부분에 속한 요소들은 행위자들의 행동에 넓고, 깊은 영향을 미치거나, 특히 어떤 행동의 기본적인 활동 영역에 커다란 영향력을 행상한다.

(E) 이 부분에 속한 신념들은 그것들이 인간 삶의 중심적인 문제 뿐만 아니라 중심적인 형이상학적 문제와 관련을 맺고 있기에 중요하다.

세계관을 지칭하는 기술적인 이데올로기는 ‘순수히 기술적인 의미에서의 이데올로기’와 다르다. 후자가 한 집단 구성원의 모든 신념을 포함한다면, 전자는 모든 신념을 포함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1.4. 프로그램적 의미에서의 이데올로기

프로그램적 의미에서의 이데올로기는 이념을 행동으로 전환하는 구실을 수행하는 이데올로기를 뜻한다. 프로그램적 의미에서의 이데올로기는 ‘전체적 이데올로기’를 구성하는 특징 두 가지 (1) 전체로서 사회의 급진적인 개혁이나 재구성을 목적으로 하며 (2) 이론이나 모델을 정당화하는 증거에 근거하여 주장되지 않고 확신(정열)에 의해 주장된다를 제외한 것이다. 이 둘을 제외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1)을 포함하면 기술적인 의미에서의 이데올로기가 아니게 되고, (2)를 포함하면 해당 이데올로기를 논한 다니엘 벨을 위시한 자유주의자들은 이데올로기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말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상의 둘을 제외한 프로그램적 의미의 이데올로기는 다음 두 가지 특징을 지닌다.

(A) 행동에 관한 프로그램 또는 계획이다.

(B) 어떻게 사회가 움직이고 있는가에 대해 명백하고 체계적인 모델이나 이론에 근거하고 있다.

2절. 경멸적인 의미에서의 이데올로기

경멸적인 의미에서의 이데올로기란 사실상 ‘(이데올로기적) 기만’ 혹은 ‘(이데올로기) 허위의식’을 지칭한다. 이러한 이데올로기 개념을 다루는 이론은 특정 사회 구성원들의 신념, 태도 등이 기만당하고 있음을 폭로하고, 그 신념 등을 비판한다. 따라서 이러한 이데올로기 개념을 다루는 이론은 그들로 하여금 그들이 속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여 자유롭게 만드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그렇다면 쟁점은 어떤 의미에서 또는 어떤 성질에 의해 의식의 형태[신념, 태도, 경향성 등의 집합]가 허위에 빠지냐는 것이 된다. 이에 대해 세 가지 답변이 가능하다.

(1) 의식의 한 형태는 그것을 구성하는 신념들의 인식론적 성질 때문에 이데올로기적으로 허위이다.

(2) 의식의 한 형태는 그것의 기능적 성질 때문에 이데올로기적으로 허위이다.

(3) 의식의 한 형태는 그것의 발생적 성질 때문에 이데올로기적으로 허위이다.

2.1. ‘인식론적 성질 때문에 이데올로기적으로 허위이다.’

2.1-1. 의식의 한 형태가 그것을 구성하는 신념의 인식적 지위에 대해 오류를 범하고 있다면 이데올로기적 허위이다. 예를 들어, 가치 판단을 사실의 언명으로 위장하는 의식의 형태는 이데올로기이다.

2.1-2. 의식의 한 형태가 객관화의 오류를 포함한다면 이데올로기적 허위이다. 예를 들어, 사회 현상을 자연 현상으로 생각하거나 다른 방법으로 해석하는 잘못된 신념을 가지고 있다면, 주체는 그들 자신의 활동이 자신의 통제를 벗어나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는 점에서 이데올로기적 허위로부터 고통을 받는다.

2.1-3. 의식의 한 형태가 어떤 부분 집단의 특수한 이해를 집단 전체의 이해로 생각하는 잘못된 신념을 가지고 있다면 이데올로기적 허위이다.

2.1-4. 의식의 한 형태가 자기-정당화(self-validating) 또는 자기-성취적(self-fulfilling) 신념을 그렇지 않은 신념으로 잘못 생각하고 있다면 이데올로기적 허위이다.

2.2. ‘기능적 성질 때문에 이데올로기적으로 허위이다.’

2.2-1. 한 의식의 형태가 부당한 사회적 제도나 관례를 지지하고 영속적으로 뒷받침하고 정당화하는 기능을 수행한다면 그것은 이데올로기이다. 이때 유의해야 할 것은 ‘지배권 지지, 조장, 안정’과 ‘지배권 정당화 및 합법성 부여’는 다르다는 점이다. 피지배 계층이 이데올로기에 빠져 이데올로기적 신념을 용인하는 경우, 그들은 분명 지배권을 지지하고 안정화하지만, 그렇다고 정당화한다고 볼 수는 없다.

cf) 지배란 무엇인가?

a) 인간의 어떤 욕구에 반대되는 행동을 강요함으로써 욕구를 좌절시키는 힘의 행사

그러나 한 의식의 형태가 단지 이러한 개념의 지배를 뒷받침하여 이데올로기라는 점을 보인다고 하여, 그것이 제거되어야 할 이유를 제공하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강요하는 힘이 정당하고 시비의 여지가 있느냐 없느냐이다.

b) 규범적 억압을 행사하는 힘의 행사

그러나 한 의식의 형태가 단지 이러한 개념의 지배를 뒷받침하여 이데올로기라는 점을 보인다고 해도, 그 지배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주장이 타당하다면 지배에 어떠한 잘못도 없다.

c) 한 집단의 다른 집단에 대한 지배

그러나 억압하는 지배의 힘이 평등하게 분배된 사회에서 지배가 행사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이상하게 들린다. 또한 만일 어떤 힘의 분배가 필연적이라면 그 힘의 정당성을 문제 삼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d) 사회 유지와 재생산을 위한 필요 이상으로 구성원의 바람을 좌절시키는 과잉 억압의 부과

그러나 한 의식의 형태가 과잉 억압을 지지하고 정당화하여 이데올로기라는 점을 보인다고 하여, 왜 그러한 의식은 항상 정당하지 못하고 거부해야만 하는지 충분히 답변하지 못한다.

2.2-2. 한 의식의 형태가 물질적 생산력의 최대한의 발전을 지연 혹은 방해한다면 그것은 이데올로기이다.

2.2-3. 한 의식의 형태가 사회적 모순의 은폐를 돕는다면 그것은 이데올로기이다. 이때 ‘사회적 모순의 은폐’는 그 모순으로부터 사람들의 관심을 딴 데로 돌리게 하는 요소를 포함하기에, 이 은폐를 돕는 의식의 형태는 거짓 믿음을 포함하지 않을 수 있다. 이 (2.2-3) 이데올로기에서 논해지는 ‘사회적 모순의 은폐’에서의 ‘모순’이 만일 생산관계와 생산력 사이의 모순이라면, (2.2-3) 이데올로기 비판은 (2.2-2) 이데올로기 비판으로 연결된다.

2.3. ‘발생적 성질 때문에 이데올로기적으로 허위이다.’

의식의 발생론적 성질에 주목하는 이 주장은 주장하는 자들에 따라 세부적인 내용이 달라진다. 예를 들어, 만하임에 따르면 한 의식의 기원이 특정 계급의 특정 경험으로 소급된다면 그 의식은 이데올로기이다. 프랑크푸르트 학파에 따르면, 행위자가 받아들이는 신념과 태도의 체계가 그들이 인지할 수 없는 것이라면 이데올로기이다.

그런데 의식 형태의 기원이나 동기 등에 대해 알았다는 사실은 그 의식이 허위의식이라든가 기만이기에 거부해야 한다는 주장보다 강한 주장을 펼치지 못한다. 게다가 발생적 측면에서의 이데올로기 비판은 발생론적 오류를 겪는다. 단지 불미스러운 연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그 의식의 형태를 거부해야 할 충분한 이유가 되진 못한다. 신념의 발생 기원을 밝히는 ‘발견의 맥락’과 신념의 참 거짓을 밝히는 ‘정당화의 맥락’은 구별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자아도취적인 동기나 이유에 의해 도덕적인 어떤 행동을 습관화했고, 그러한 동기나 이유를 지금 내가 받아들이지 못한다고 해도 그 습관적 행동은 도덕적 행동이다. 따라서 나는 잘못된 이유에 의한 것이라도 옳은 일을 계속하는 것이다.

그래서 발생론적 성질로 인해 이데올로기를 허위라고 말하기 위해서는, 그 이데올로기가 행위자들이 인정할 수 없는 동기에 의해 채택된 것이어야 한다. 혹은 한 의식의 형태가 그것을 받아들이는 행위자들의 참된 동기의 측면에서 본다면 무지나 거짓 믿음을 요구할 때, 그것은 거부되어야 하는 이데올로기이다.

3절. 긍정적인 의미에서의 이데올로기

긍정적인 의미의 이데올로기란 어떤 사회문화적 체계나 세계관이 그것을 받아들이는 집단에 대해 가장 적당한 경우 사용되는 표현이다. 즉, 집단 구성원의 욕망과 필요를 가장 용이하게 만족시킬 수 있고, 이해관계를 진작시킬 수 있는 이데올로기는 긍정적인 의미의 이데올로기일 것이다. 이러한 이데올로기는 절실한 요구 사항의 영역에 있기에 설명을 위해 상정된 기술적 의미의 이데올로기와도 다르고, 비판하기 위한 경멸적 의미의 이데올로기와도 다르다.

그런데 긍정적 의미의 이데올로기는 단지 행위자의 필요와 욕구를 효과적으로 충족하기만 해서는 안 된다. 만일 그렇지 않은 경우, 타인을 지배하는 이데올로기를 비판하는 경멸적 이데올로기로 여겨질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긍정적 의미의 이데올로기는 (1) 만족시켜야 하는 욕망, 욕구, 이해관계에 대한 제한과 (2) 이를 충족시키는 방식에 대한 제한도 갖추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긍정할 만한 이데올로기는 역사적 상황과 개인적 선호에 따라 복잡해지기에, 한 인간 집단에 대해 적당히 긍정적인 의미의 이데올로기의 양태를 결정하는 것은 매우 복잡하다. 이런 이유로 긍정적인 의미의 이데올로기와 경멸적인 의미의 이데올로기 사이의 구분도 명확하지 않을 수 있다.


출처: 레이몬드 게스, 2006: 27-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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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요약문을 보게 되다니 저 완전 럭키비키네요 :smi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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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롭게 잘 읽었습니다. 고이스(게스? 규스? Geuss를 어떻게 읽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가 쓴 아도르노 관련 논문을 보고서 굉장히 중언부언하고 난해하다는 인상을 받은 적이 있는데, 올려주신 요약을 보니 이 『비판이론의 이념』은 굉장히 명쾌하게 쓰인 글인가 보네요.

괜찮으시면 2.3에서 기술된 입장에 대한 비판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여쭙고 싶습니다. 이데올로기 개념은 사실 계보학을 수행하는 학자들(아도르노, 니체, 푸코, 넓게 보면 데리다나 들뢰즈도)이 명시적으로든 암시적으로든 채택하게 되고, 그에 따라 계보학자들은 발생적 오류에 빠진다는 비판에도 쉽게 맞닥뜨리게 되는 것 같습니다. 아도르노처럼 비판이론의 전통에 서 있는 사람은 계보학적 비판과 더불어 규범적 비판을 같이 수행하니까 이런 비판을 피해가는데(그리고 규범적 비판의 태도를 버리지 않기 때문에 일종의 아포리아 문제에 맞닥뜨리는데), 굳이 비판이론처럼 (그 스스로 일종의 이데올로기인) 규범과 더불어 이데올로기를 비판하려 하지 않는 니체와 같은 철학자들은 이런 비판에 어떻게 대응할지가 궁금해서요. 발생의 층위와 정당화의 층위라는 구별을 비판하는 전략을 취하려나 싶기도 한데, 발생과 정당화라는 이 구별이 저에게는 상당히 설득력 있게 보여서 물리치기가 어렵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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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단 제가 읽은 책중에서 하버마스의 책을 제외하면 비판이론을 다루는 책 중에 (흔히 말하는) 분석철학 스타일로 가장 매끈하게 쓰인 책 같아요. 어떤 글을 예전에 읽으셨는지 가르쳐주셨으면 좋겠어요.

<2>
간단하게 말하자면, 저는 니체가 계보학을 통해 단지 도덕의 발생 기원을 따져보니 'A'여서 거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말씀하신 규범적 비판이 오히려 니체의 플라톤주의 비판의 핵심이라고 생각해요.

니체가 계보학을 통해 플라톤주의-도덕주의-기독교의 기원을 파해치면서, 그는 단지 그것의 발생 기원이 'A'라는 이유만으로 비판하지 않아요. 잘 언급되지 않는데, 니체는 거의 전 저작을 거쳐 플라톤주의-도덕주의-기독교가 인간 삶과 진보에 엄청난 도움을 줬다는 점을 강조해요.

다만 (1)니체는 그 도움의 방향이 '건강함'이라는 규범적 요소를 빼먹은 것이 아니냐고 비판하며, (2)플라톤주의-도덕주의-기독교의 기원을 따져보니 그것의 핵심인 신에 대한 우리의 입장이 필연적인 것이 아닌데, 마치 필연적인 것처럼 계속 우리의 인식을 억압한다고 주장해요.

그래서 니체의 비판은

이 조건에 잘 부합하는 발생론적 비판이라고 생각해요.

간단히 썼는데, 도움이 됐을련지 모르겠네요. 푸코의 경우도 시간나면 생각해보고 써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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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이름 발음이 궁금할 때

  1. 영문 위키페디아에서 검색되는 이름이면 이름 옆에 발음기호가 나와 있는 경우가있습니다.

'레이먼드 고이스'가 발음기호에 가장 부합하는 발음이군요.

  1. 다음 사이트를 이용합니다.

'레이먼드 게스'로 들리는군요.

  1. 해당 인물이 거론되는 유튜브 클립에서 이름이 어떻게 발음되는지 잘 들어봅니다.

'레이먼드 고이스'로 들리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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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이 양반 이름을 처음 접했을 때는 '레이먼드 게우스'로, 최근 몇년 동안은 '레이먼드 저스'로 알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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