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트철학에서 초월적 관념론의 체계 자체는 선험적 종합판단이 아닌게 맞을까요?

초보적인 질문만 올려 죄송합니다.
항상 서강올빼미 글보며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칸트철학에 있어 선험적 종합판단에 대해 몇 가지 여쭤보고 싶습니다.

  1. 칸트 철학에서 인식은 감성의 수용성과 지성의 자발성으로 가능하다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감성의 형식인 시, 공간의 제약 아래서 직관이 받아들인 다양을 지성의 범주가 판단함으로서 인식에 이르는 것 같습니다.

  2. 이때 감성의 시, 공간과 지성의 범주가 인식의 가능조건이라고 하는 명제는 그 자체는 선험적 종합판단이 아니라, 선험적 종합판단을 가능하게하는 초월론적 체계라고 이해하는 것이 맞을까요?

  3. 2)로 이해하는 것이 맞다면, 초월론적 관념론의 체계들은 연역(권리주장)에 그치는 것이고, 선험적 종합판단은 아니라고 이해해도 괜찮을까요?

  4. 칸트는 초월론적 관념론의 체계(개념체계?)를 구축한 뒤, 그 개념체계 아래에서 선험적 종합판단이 가능한가를 묻는 작업을 하는 것 같다고 느껴졌습니다..“”

철학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서 질문이 애매한 지점이 있을 것 같지만 관대하게 읽어주시고 도움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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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 철학의 난점 중 하나에 잘 도착하신 것 같습니다.

칸트의 선험철학은 대개 다음과 같은 조건문의 형태를 가집니다:

X: 경험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P 이다.
(예시): "경험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범주에 의한 종합이 있어야 한다"

여기서 P에 해당하는 것들은 대부분 순수이성비판 감성론이나 연역론에서 "선험적&종합적"인 것으로 증명되는 것들입니다.

문제는 (질문하신 것처럼), P의 "선험성&종합성"을 증명하는 명제 X 자체는 어떤 성격을 가지느냐 입니다. 칸트는 모든 명제를 분석적/종합적 2가지로 구분했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2가지 가능성이 있어 보입니다.

  1. X는 분석명제이다.
  2. X는 선험적 종합명제이다. (경험적 종합명제가 아닌 것은 자명하기에 배제했습니다.)

만약 1번이라면, P라는 선험적 종합명제가 X라는 분석명제에 의해 정당화되는 꼴이므로, 자기모순이 됩니다. X가 분석명제라면, X에서 선험적으로 도출된 P역시 분석명제여야 하죠.
만약 2번이라면, 무한퇴행이 의심됩니다. P의 (선험적) 종합성을 정당화한 것이 X였는데, X 역시 (선험적) 종합적이라면, X의 종합성 역시 어딘가로부터 정당화되어야 합니다. 만약 X가 X2로부터 도출된다면, 이번에는 X2가 분석적인지 종합적인지가 문제가 됩니다. X2는 X3에서 도출되고 ... 이렇게 무한히 퇴행하는 것이죠.

즉 역설적이게도 칸트의 분석/종합의 구별에 따르면 칸트가 제시하는 X꼴의 논변들이 도대체 어떤 종류의 논리적 필연성을 가진 것인지가 불확실해 보입니다. (지금도 합의가 되지 않은 열려 있는 문제라고 하겠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X 역시 선험적 종합명제라는 쪽을 방어하는 것이 더 그럴듯해 보입니다. 물론 어떻게 방어할 것인지가 쟁점이겠죠.)

유사한 문제가 "선험적 논변 transcendental arguments"라는 이름으로 20세기에 주목을 받았던 때가 있었습니다. 특히 회의주의 연관에서 중요한 논의를 구성합니다. 관심 있으시다면 다음을 참조해 보셔요:
https://plato.stanford.edu/archives/fall2023/entries/transcendental-argu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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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역시 Herb님을 비롯한 서강올빼미 여러 선생님으로부터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nodong님의 질문에 대한 Herb님의 위 답글에서 약간의 궁금한 점이 있습니다.

즉 Herb님께서는 위에서 칸트의 선험철학은 아래와 같은 조건문형태를 지닌다고 하셨습니다.

아 래

명제 X: 경험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P 이다.
(예시): "경험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범주에 의한 종합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위 명제 X가 선험적 종합명제라면 무한퇴행이 의심된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칸트는 통각의 근원적 종합적 통일이 선험철학이 정착해야만 하는 최고지점 (B133 이하 참조)이라고 합니다.

그냥 명제 X의 종합성이 통각의 근원적 종합적 통일로 정당화된다고 하면 안될까요?

질문이 너무 단순하고, 이렇게 쉬운 해답이 주어질리가 없겠지만, 한번 생각할 거리는 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어 용기내어 질문글을 올립니다. (물론 아마추어 수준임을 너그러히 보아 주셨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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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질문 감사합니다.

"통각의 근원적 종합적 통일" 역시 이미 잘 지적하셨듯이 "선험적&종합적"입니다. 즉 이것 역시 연역론에서의 증명대상으로서 등장하고, 이러한 연역론의 증명이 없다면 과연 타당한 것인지 의문인 것입니다 (데카르트의 코기토 이후 논쟁이 계속되었듯이요.) 따라서 "통각의 근원적 종합적 통일" 역시 P 자리에 위치합니다.

이렇게 본다면 X자리에 오는 것은 "통각의 근원적 종합적 통일"을 증명하는 논변(가령 B판 연역론 16절의 논의)입니다. 그렇다면 여전히 ("통각의 근원적 종합적 통일"의 "선험성&종합성"을 증명하는) X의 종합성이 어디에서 오는지가 불분명합니다. 단순히 X가 "통각의 근원적 종합적 통일"에 의해 정당화된다 라고 하는 것은, X에 의해 정당화되어야 하는 것(=P)이 X를 정당화하는 순환오류를 저지르는 것처럼 의심됩니다.

다른 한편으로, 칸트는 "통각의 근원적 종합적 통일"을 모든 지성의 사용에서의 "최상의 원리 (das oberste Prinzip)"라고 부르고 있으니, X의 종합성의 근원이 "통각의 근원적 종합적 통일"과 연관되어 있음이 또한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저 역시 통각 원리가 위 난점에 실마리를 가지고 있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다만 단순히 통각이 X를 정당화한다고 말하는 것보다는 좀 더 세련된 논변이 요구되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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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렵게 용기내어 올린 제 질문글에 정성들여 답변을 달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Herb님의 글들을 읽을 때마다 제 개인적 느낌은, 그 치밀한 논리에 경탄해 마지 않았습니다.

귀한 시간내어 답글달아 주신 점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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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럽네요... 도움이 되셨다니 다행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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