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르메니데스의 존재론 논증: 내용정리 및 문제제기(러셀 철학사)

철학사 스터디에서 공부한 내용을 공유합니다.

저희 스터디에서는 < 러셀의 서양철학사 >를 주요 텍스트로 삼아서 함께 살펴봅니다.
이 외에도, 스터디 리더가 다른 철학사 텍스트를 참고하면서 혹시 러셀의 해석과 다른 내용이 있으면 함께 소개합니다.

파르메니데스의 존재론에 대해 잘 아시는 선생님이시라면,
5.3.2 항목이나 5.4.2 항목에 대해 어떻게 보시는지 코멘트 남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모든 철학자의 원전을 동시에 살피는 것은 매우 힘들어 2차 문헌만 참고했음을 말씀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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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1. 러셀이 인용하는 파르메니데스의 주장

  1. “너는 비존재를 알 수도 없고 발화할 수도 없다. 비존재는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사유될 수 있는 것과 존재할 수 있는 것은 같기 때문이다.”

解1) 존재할 수 없는 것은 사유될 수 없다. 사유될 수 없다는 것은 어떤 존재자가 정신적으로 그것에 대해 알 수 없다, 혹은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우리에게 알려질 수 없거나 생각될 수 없는 것은 존재할 수 없다. ‘없음’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그냥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닌 것에 불과하다.(코플스톤, <그리스로마 철학사>, p.80)

解2) 혹은 다음과 같이 이해해 볼 수 있다. “상대방의 ‘당신은 지금 어떤 종류의 것을 생각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만일 내가 상대방에게 그것이 무엇인지 말할 수 없거나 그것에 관해서 전혀 아무 말도 할 수 없다면 상대방은 당연히 내가 아무것에 관해서도 생각하지 않거나 아예 생각 자체를 하지 않는다고 결론지을 것이다.” (Kenny, <고대철학>, p.329)

  1. “그러면 존재하는 것은 어떻게 미래에 존재하게 될 것인가? 혹은 존재하는 것은 어떻게 존재할 수 있었는가? 만일 존재하게 되었다면, 그것은 존재가 아니다. 또 만일 그것이 미래에 존재하게 될 것이라면, 그것 역시 존재가 아니다. 이렇게 생성(becoming)은 무효가 되며 소멸(passing away)도 성립하지 않는다.”

解3) “만약 어떤 것이 생성된다면, 그것은 존재로부터 생성되거나 또는 비존재에서 생성될 것이다. 만약 그것이 존재로부터 생성된다면 그것은 이미 존재하는 것이 되는데, 이 경우 그것은 생성되는 것이 아니다. 만약 그것이 비존재로부터 생성된다면, 그것은 무(無)이다. 왜냐하면 무에서는 무가 나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전화(轉化)와 운동은 환상이다. 복수성도 또한 환상이기 때문에, 존재는 단순히 있을 뿐이고, 일자이다.” (코플스톤, p.78)

  1. “사유될 수 있는 것과 그러한 사유가 있다는 것은 같다. 왜냐하면 너는 존재하는 어떤 것이 없는 사유를 찾지 못하고, 그것에 대해 발화하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問1) 과연 그러한가? [옥스포드대학교]라는 대상은 사유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옥스포드대학교]라는 대상은 그것에 대한 사유 그 자체와 같은 것인가? 가령, [옥스포드대학교]라는 대상과 “나는 옥스포드대학교가 좋다”라는 생각은 같은 것인가?

5.3.2. 필자의 파르메니데스의 논증 재구성, 그리고 문제제기

  1. 사유와 언어표현은 그것들이 지향하는 대상이 필요하다.
    (주의: 이 대상들은 사유 자체와 언어표현 자체와 구별되지 않는다.)

  2. 왜냐하면, 사유될 수 있는 것과 존재할 수 있는 것은 같기 때문이다. (1번 인용구)

  3. 우리는 언제나(이때나 저때나) 생각(사유)하거나 말(언어표현)을 할 수 있다.

  4. 그 때마다 사유와 언어표현이 지향하는 대상들이 실존한다.
    다시 말해, 그것들은 언제나 모든 시간에 걸쳐 실존한다.

  5. 변화는 ‘없음’에서 ‘있음’으로, ‘있음에서 ‘없음’으로 이행하는 과정이다. (변화에 대한 파르메니데스의 정의)

  6. 그러나 모든 것은 이미 존재하고, 또 실존하고 있다. (3.에 의해)
    다시 말해, 모든 것은 ‘있음’에 지나지 않는다.

  7. 따라서 변화는 일어날 수 없다. 이 세계는 시간에 종속되지 않고 영원히 실존해왔고, 실존하고 있으며, 실존할 것이다.
    다시 말해, [존재]는 영원하다.
    (#주의: 실제로 일어날 수 있는 변화는 대부분 존재의 변형일 뿐이다. (Kenny, 330))

問2) 사유될 수 있는 것과 존재할 수 있는 것은 동일한가? 사유능력과 언어능력이 없는 무기물로만 이루어진 세계가 있다고 생각해보자. 가령, 지구라는 행성이 탄생하기 이전의 우주를 생각해보자. 이 때의 우주는 사유능력이 분명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다면 파르메니데스는 이 때의 우주가 존재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인가?

問3) 또한 사유능력과 언어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몇년에 한번씩 80억 인구가 모두 말도 하지 않고 생각도 하지 않는 순간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파르메니데스의 주장에 따르면, 이러한 순간에는 찰나적으로 모든 존재자가 존재성을 상실하게 되는 것인가? 즉, 세계는 그 찰나에 한하여 순간적으로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인가?

問4) ‘변화’라는 단어의 의미를 지나치게 포괄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5.4.1. 파르메니데스의 주장에 대한 러셀의 지적

“우리가 어떤 것의 이름을 유의미하게 사용한다면(P), 그 이름을 가리키는 대상은 어떤 점에서 계속 실존해야한다.(Q)“ (러셀, p.94)
(P이면 Q이다)

註) 러셀은 1번 인용구의 내용을 위와 같이 해석한다.

“낱말은 불변하는 일정한 의미를 가진다.(R)” (러셀, p.95)

반론) 같은 낱말을 쓰는 두 사람이 마음속에 똑같은 생각을 품지는 않는다.(p.95)
가령, 2024년 7월 27일 오후에 “조지 워싱턴”이라는 낱말을 발화한 한국인과 1789년 미국이 독립하고 초대 대통령을 선출한 날의 오후에 “조지 워싱턴”이라는 낱말을 발화한 미국 성인 남성이 각자 이름에 대해 품는 생각은 전혀 다르다.

R이 성립하면, (P가 성립하면 Q가 성립한다.)

註) 러셀은 파르메니데스의 주장을 위와 같이 가능한 분명하고 명료하게 재해석한다. 그리고 그 주장의 이상하게 보이는 점을 보이기 위해 파르메니데스의 주장에 숨겨져 있는 전제(R)를 상정하고 그 전제에 대해 반론을 제기함(ㄱR)으로써 파르메니데스의 실존 명제가 성립하지 않음을 보이고 있다.

5.4.2. 러셀의 지적에 대한 질문

問) 러셀의 반론은 직접적 반론이 아니다. 왜냐하면 파르메니데스의 실존 명제를 직접적으로 반증하기 위해서는 어떤 것의 이름을 유의미하게 사용함에도 불구하고 그 대상이 모든 관점에서 실존하는 것은 아님을 보여야하기 때문이다. 러셀의 논증의 논리적 형식을 따져보면 다음과 같다.

R -> (P -> Q)

러셀의 전략은 위 논리식에서 ㄱR을 보임으로서 ㄱ(P->Q)을 이끌어내려는 것이다. 그러나 조건언을 실질함의로 이해하면 러셀의 전략은 성공할 수 없다. 이러한 전략보다는 직접적으로 반증하는 것이 더 효과적일 것으로 보인다. 가령, 전건이 참이면서 동시에 후건이 거짓인 경우를 제시하는 것이다. 즉, P와 ㄱQ가 동시에 성립함을 보이는 것이다.

5.5. 러셀이 말하는, 파르메니데스 논증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교훈

언어에서 형이상학적 결론(대부분 오류 논증)을 도출하는 일은 매우 쉽다. 따라서 언어에 대한 논리적 연구와 심리적 연구에 매진하는 것이 이러한 오류 논증을 피할 수 있게 해주는 유일한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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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셀이 해석한 파르메니데스는 지극히 러셀의 개인적인 해석이라는 글을 어디서 본 적이 있는데,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파르메니데스의 단편들을 직접 보시면 파르메니데스의 논증은 언어에서 형이상학적 결론을 도출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느끼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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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르메니데스의 단편 8.7-11은 다음과 같습니다.

In what way, whence, did [it] grow? Neither from what-is-not shall
I allow / You to say or think; for it is not to be said or thought / That
[it] is not. And what need could have impelled it to grow / Later or
sooner, if it began from nothing? / Thus it must either be completely
or not at all.
(여기에서 'it'은 'what-is'입니다.)
(Gallop의 번역본입니다.)

저는 이 단편 안에 두 개의 논증이 있다고 해석했습니다.

첫 번째 논증:

  1. If what-is came into existence from what-is-not, then what-is was
    once not—that is, it once was that what-is is not;
  2. It is not that what-is is not;
    Therefore,
  3. What-is did not come into existence from what-is-not.

두 번째 논증:

  1. If what-is came into existence from what-is-not, then what-is was
    once not—that is, it once was that what-is is not;
  2. Every event (or change) needs a sufficient reason;
  3. What-is-not contains no sufficient reason to cause something to
    come into existence at one time rather than another, for it simply is
    nothing;
    Therefore,
  4. If what-is was once not, then what-is could not have come into
    existence;
  5. What-is is;
    Therefore,
  6. What-is did not come into existence from what-is-not.

제 해석이 맞는지는 모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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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at-is" 또는 "what-is-not"와 같은 표현을 처음 접해서, 어떻게 답변을 해야할 지 갈피를 못 잡고 있다가 여러번에 걸쳐 읽어보고 생각을 조금 정리한 뒤에 이렇게 제 생각을 말씀드립니다.

일단 제가 참고한 번역본은 A. Coxon(R. Mckirahan)의 헬라어-영어 대조본입니다.

  • Coxon, A. H., 2009. The Fragments of Parmenides: A critical text with introduction, translation, the ancient testimonia and a commentary, revised and expanded edition with new translations by Richard McKirahan, Las Vegas/Zurich/Athens: Parmenides Publishing.

단편 8.7-11에 대한 Coxon과 Mckirahan의 영어번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1. How and whence grown?
  2. I shall not let you say or conceive, ‘from Not-being’,
  3. for it cannot be said or conceived that anything is not;
  4. and then what necessity in fact could have urged (10) it to begin and spring up later or before from Nothing?
  5. Thus it must either be entirely or not be at all.

제가 잠정적으로 내린 결론은 파르메니데스는 언어적 차원의 주장에서 형이상학적 주장을 도출하고 있다는 러셀의 해석이 적절해 보인다는 것입니다.

저는 영어가 모국어가 아니기 때문에 번역에 문제가 있을 수 있겠습니다만, 일단 단편 8.7-11에 대해 다음과 같이 번역해 보았습니다.

  1. 어떻게, 그리고 어디로부터 자라났나?
  2. 나는 네가 "비존재로부터"를 말하거나 생각하게 둘 수 없다.
  3. 왜냐하면 "모든 것은 아니다"(또는 Gallop을 따라 "있는 것은 아니다")가 말해지거나 생각될 수 없기 때문이다.
  4. 그리고, 그렇다면, 사실 어떤 필요성이, '있는 것'이 이전과 이후에(무엇의?) '없는 것'으로부터 시작하고 튀어나오게 할 수 있었겠는가?
  5. 그러므로 '있는 것'은 반드시 전체로 있거나 전혀 있지 않아야 한다.

위 텍스트를 살펴보면 파르메니데스의 논증이 2, 3, 5번 문장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1번은 말문을 트기 위해 청자에게 던지는 물음, 4번은 자신의 논거를 제시한 뒤 청자에게 보란 듯 생각해보라고 던지는 물음이라고 해석한다면 말입니다.
(이 대화가 이루어지는 상황에 있어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습니다. 헬라어도 할 줄 모르기도 하구요..)

전제지시어 및 결론지시어를 고려하면 3번 문장이 2번 문장을 지지하고, 3번 문장은 5번 문장을 지지합니다. 논증의 구조는 다음과 같습니다.

  1. "모든 것은 아니다"가 말해지거나 생각될 수 없다.
  2. 이에 따라, 나는 네가 "비존재로부터"를 말하거나 생각하게 둘 수 없다.
  3. 그러므로, 다음과 같은 문장이 참이다. < 있는 것은 반드시 전체로 있다. 그렇지 않으면 있는 것은 전혀 있지 않다.>

결론으로 이끌어낸 파르메니데스의 주장은 개인적으로 흥미롭게 느껴집니다만, 분명 형이상학적 또는 존재론적 주장이라고 생각됩니다. 왠지 2번 문장의 "모든 것은 아니다" 역시 개인적으로 흥미롭게 느껴지는 안긴 문장입니다만, 2번 문장에서는 해당되는 안긴 문장을 발화하거나 생각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으니 분명 화용론적 차원의 주장이라고 생각됩니다.

이렇게 정리해보면, 파르메니데스가 어떤 명제의 발화가능성을 근거로 존재론적 주장을 논증하고 있는 것이 비교적 분명해 보입니다. 따라서 5.5.에서 언급하는 교훈은 유의미하다고 생각됩니다.

이상입니다.

방금까지 논의한 내용을 다루는 또 다른 파르메니데스의 논증을 찾아볼 여력은 없었습니다. 파르메니데스의 논증에 대한 찬반 논쟁은 '존재하다'의 술어인가 라는 쟁점과 무관하지 않은 듯 합니다. 해당 논증에서 사용되는 헬라어의 의미를 적확하게 풀이한다면 제 생각이 바뀔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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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FunStudy님의 해석에 아주 작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anything'을 '모든 것'이라고 해석하시고,
'for it cannot be said or conceived that anything is not'을
'왜냐하면 "모든 것은 아니다"가 말해지거나 생각될 수 없기 때문이다.'라고
해석을 하신 것 같은데, 저 문장은
'왜냐하면 그 어느 것에 대해서도, "그것이 아니다"라고 말하거나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라고 번역하는 것이 조금 더 자연스러운 거 같습니다.

다음으로, Coxon과 Mckirahan의 번역에 문제가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for it cannot be said or conceived that anything is not"
이 부분이 저는 잘못된 번역이라고 생각합니다.

Gallop의 번역을 보면 이 부분은
"for it is not to be said or thought that it is not"이죠.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의 Parmenides 문서에서도
이 부분은 "for not to be said or not to be thought is it that it is not"
이라고 해석되어있습니다.

여기서 볼드체 it은 anything이라기 보다, (그 단편의 토픽인) what-is (to eon)를 칭한다고 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시말해, 제 생각에 파르메니데스의 주장은 "그 어느 것에 대해서도, '그것이 아니다'라고 말하거나 생각할 수 없다"가 아니라
"what-is 가 is not하다고 말하거나 생각하는 것은 자제되어야한다 (it is not to be said or thought that what-is is not)"입니다.

볼드체 it을 anything으로 해석하고, 파르메니데스의 주장을 '그 어느 것에 대해서도 "그것은 아니다"가 말해지거나 생각될 수 없다.'으로 받아들이는데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파르메니데스가 왜 그런 주장을 할까?에 딱히 좋은 답이 없습니다.
'He is not', 'She is not', 'a car is not'을 말하거나 생각하는게 왜 안 될까요?
'anything'을 '모든 것'이라고 해석해도 이해가 힘듭니다.
'모든 것은 아니다' 이 명제에 무슨 문제가 있어서 말해서도 안되고 생각해서도 안된다는 걸까요?

그런데 제 주장이 맞다면, 그러니까 파르메니데스의 주장이 "what-is 가 is not하다고 말하거나 생각하는 것은 자제되어야한다 (it is not to be said or thought that what-is is not)"라면, 파르메니데스가 왜 저런 주장을 하는지 바로 이해가 됩니다.

What-is (to eon) 자체가 something that is인데, 이게 is not하다고 말하거나 생각하는건 당연히 문제가 있어보이죠.

때문에 저는 Coxon과 Mckirahan의 번역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Coxon과 Mckirahan의 번역에는 또 다른 작은
문제점이 하나 있다고 생각합니다.
Coxon과 Mckirahan "for it cannot be said or conceived that anything is not"이라고 번역 했는데,
Gallop은 "for it is not to be said or thought that it is not"라고 번역 했습니다.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의 Parmenides 문서도 "for not to be said or not to be thought is it that it is not"라고 적혀있죠.

Coxon과 Mckirahan의 번역에 따르면, 파르메니데스의 주장은 그 명제 (제 주장이 맞다면, 'what-is is not')가 cannot be said or conceived, 그러니까 말하거나 생각하는게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what-is is not이라고 말하는게 불가능하지는 않습니다.
그냥 what-is is not이라고 말하거나 생각하는건 문제가 있으니 하지않는게 좋죠.
그러니까 그 명제를 말하거나 생각되는게 자제되어야 하는 것이죠.
Is not to be said or thought이 그런 뉘앙스를 잘 전달하는 것 같습니다.

결론적으로 저는 파르메니데스가 어떤 명제의 발화가능성을 근거로 존재론적 주장을 끌어낸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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