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이라는 이름 아래에 정말 무엇이든 허용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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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배경 설명

뒤샹의 <샘>과 워홀의 <브릴로 박스>는 흔히 현대미술의 시작을 알리는 작품으로 거론되곤 한다. 두 작품은 예술이 더 이상 비예술과 구분되지 않게 되었다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즉, 예술은 자신만의 고유한 본질을 지니고 있지 않다. 예술이 마땅히 지향해야 하는 '이념'이나 예술이 반드시 따라야 할 고정된 '형식'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공장에서 찍어낸 소변기와 비누 상자조차 '예술계(artworld)' 속에서 해석될 경우 '예술'로서 인정받는다. 따라서 예술과 비예술을 지각을 통해 식별하고자 하는 시도는 더 이상 성공할 수 없다. 오히려 오늘날 예술은 미적 체험의 활동이 아니라, 예술이 무엇인지를 질문하는 개념적 활동으로 존재하고 있다.

  1. 문제 제기

그러나 모든 행위와 대상이 '예술'이라는 이름 아래에 무비판적으로 허용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모든 것이 예술이 될 수 있다."라는 주장과 "모든 것이 공적 가치를 지닐 수 있다."라는 주장은 서로 구별되어야 한다. 즉, 특정한 행위나 대상이 예술로서 해석될 수 있다는 사실로부터 그 예술이 사회 속에서 인정되고, 보호되고, 유지되어야 할 가치를 지닌다는 결론은 도출되지 않는다. 때때로 "모든 것이 예술이 될 수 있다."라고 강조하는 진영은 너무나 손쉽게 "모든 행위와 대상이 '예술'이라는 이름 아래에 사회에서 용납되어야 한다."라고 주장하는 것처럼 보인다.

  1. 관련 연구

아서 단토는 예술과 비예술 사이의 지각적 '식별불가능성(indiscernibility)'을 주장한 철학자이다. 그는 <샘>과 <브릴로 박스> 이후 시대를 '예술의 종말(the end of art)'이라고 규정할 만큼 예술이 아무런 본질을 지니고 있지 않다고 강조하였다. 그러나 단토조차 모든 행위와 대상을 '예술'이라는 이름 아래에 무비판적으로 옹호하려는 태도를 거부하였다.

가령, 리처드 세라가 1981년에 맨하탄 패더럴 플라자에 설치한 <기울어진 호>라는 작품을 생각해 보자. 이 작품은 광장 한 가운데 서 있는 거대한 규모의 철벽이다. 당시 광장 인근의 주민들은 광장을 가로지르는 이 흉물스러운 철벽을 철거해 달라고 정부에 요청하였다. 그러나 비평가들은 세라의 작품이 지닌 예술적 가치를 강조하며 철거에 반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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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롭게도, 이 논쟁에서 단토는 <기울어진 호>가 아무리 예술가 공동체 속에서 인정된 뛰어난 작품이라고 하더라도 대중에게 좋지 않은 설치물일 경우 철거되어야 한다고 지적하였다. '예술계', 곧 '예술가 공동체'의 견해를 일방적으로 대중에게 강요한 채 "당신들은 이 작품을 예술로서 받아들여야 한다!"고 요구하는 태도는 권위주의적이라는 주장이었다. 즉, 예술계는 사회가 왜 그 작품을 인정하고, 보호하고, 유지해야 하는지를 대중에게 설득력 있게 해명해야 할 책임이 있다. 이러한 해명을 거부한 채 단순히 그 작품이 '예술'이라는 사실만을 내세우는 논리는 정당화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1. 나의 주장

단토의 입장은 예술이 단순히 '예술계'에 호소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공적 가치를 정당화할 수 없다는 사실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 특히, 그는 <샘>과 <브릴로 박스>를 통해 일어난 '예술의 종말'을 적절하게 강조하면서도 '예술의 종말'이 결코 모든 행위와 대상을 무비판적으로 정당화하기 위한 표어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따라서 우리는 무엇이나 '예술'이 될 수 있다는 사실로부터 무엇이나 '공적 가치'를 지니지는 않는다고 결론내릴 수 있다. 즉, 예술계가 해석하고자 하는 모든 대상은 '예술'이 될 수 있다. 다만, 그 예술이 과연 사회가 인정하고, 보호하고, 유지해야 할 '가치'를 지니는지는 또 다른 층위에서 논의되어야 한다. 예술계는 그 대상이 '예술'이라고 강조하는 태도를 넘어 그 대상이 왜 사회 속에서 '가치'를 지니는지를 해명해야 할 책임이 있다.

  1. 참고 자료

김혜영, 「단토의 예술철학 논쟁」, 『철학』, Vol. 138, 한국철학회, 2019, 25-49.
민주식, 「현대미술에 대한 아서 단토의 비평적 논의」, 『美術史學報』, Vol. 32, 미술사연구회, 2009, 5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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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견 상식적인 말같아 보여도 위험성이 내포된 주장이라고 생각합니다.

1."공적인 가치"란 말이 모호합니다. 그것이 특정한 도덕적 내용일 수도 있고, 자본의 관점에서 본 효용일 수도 있고, 여러가지 기준이 있을겁니다. 그것이 명확하지 않다면 또다시 공적인 가치의 기준에 대한 또다른 공적 기준이 요구되는, 무한퇴행의 문제에 빠지게 되는게 아닌가 싶습니다.

  1. 보다 실천적인 차원에서는 예술이 공적인 가치를 지닌다고 주장할 때 그것을 해명해야 한다는 것이 적극적인 방식으로, 가령 "특정한 공적 가치를 충족시키지 못한 예술은 전부 사적인 장난에 불과하다"는 주장으로 이행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가령 일정 수준 이상의 금액으로 판매돼야만 그 예술품이 공적 가치를 지닌다고 하면, 자연스럽게 주객이 전도돼 예술이 자본에 종속돼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게 될 것입니다. 또 이 예술품이 비도덕적이기에 파괴하거나 추방해야한다는, 일종의 공적 반달리즘이 자행될 수도 있는 것이고요. 예술작품의 내재적 가치를 강조하는 입장이 왜 그렇게 하는지에 대한 고찰이 덧붙여졌으면 더 좋았을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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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적 가치’라는 개념이 모호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공적 가치를 평가하는 데는 여러 가지 기준이 있을 것이지만, 그 사실이 "우리는 공적 가치가 무엇인지 명확히 알지 못한다."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으니까요. 즉, 우리는 이미 다양한 공적 가치가 무엇인지 알고 있죠. 물론, 때때로 우리는 그 가치들 중 무엇을 우선해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하긴 하지만, 그 고민이 ‘공적 가치’ 자체를 의심하거나 회의하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은 아니라는 거죠. 마치 상점에서 물건을 살 때 '가격’을 우선시 해야 하는지, '질’을 우선시 해야 하는지, '브랜드’를 우선시 해야하는지를 고민하는 것처럼, 우리의 고민이라는 건 이미 공적 가치를 전제한 상황에서 이루어지는, "어떠한 가치가 더 중요하냐?"의 고민인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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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사회 속에서 종교적 가치가 공적 가치보다 앞서서는 안 된다.”
“시민사회 속에서 예술적 가치가 공적 가치보다 앞서서는 안 된다.”

이런 종류의 주장은 아마도 시민사회가 종교공동체나 예술가공동체의 선제조건 혹은 가능조건이라는 전제를 받아들일 때 큰 설득력을 갖는 것 같습니다. 밴다이어그램으로 그리자면 시민사회가 종교공동체나 예술가공동체를 품고 있는 그림이겠지요.

논쟁이 될만한 요소는 "공적 가치"의 개념일텐데, 사실 "공적 가치"는 단순히 "해당 시민사회 구성원 다수가 지지하는 가치"로 치환 가능해 보입니다. 그리고 이 공적 가치는 시민사회를 구성하는 하부집단의 규모에 따라 하부집단의 가치와 동일해질 수도 있겠지요. 예술이 지상가치로 인정받는 예술가들의 국가에서는 통행을 방해하는 예술품을 방치하는 것이 오히려 공적 가치에 합치하는 일이지 않을까요?

딱히 이 주장에 반대하실 것 같지는 않지만 그냥 적어봅니다. ㅋ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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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말한 '공적 가치’는 예술적 가치나 종교적 가치를 포괄하는 넓은 의미의 가치라기보다는, 아주 단순하게 “광장을 독차지하려면 왜 독차지해야 하는지를 시민들에게 납득시켜라” 정도의 의미에요. 그러니까, 어떤 공적 영역이 되었든지, 거기서 활동하려는 사람은 그 영역의 사람들에게 납득이 되는 가치를 보여줘야 한다는 거죠.

사실 이게 당시의 예술가 지원금 논쟁하고도 관련이 있는 주제에요. 공공기관이 예술가들을 돈을 줘서 보조하려고 할 때, 예술가는 공공기관에 대해 자신의 작품이 왜 중요하고 의의가 있는지를 제대로 해명해야 한다는 거죠. 그런데 '형식주의’에 매몰되어 있던 당시의 비평가들은 정부로부터 지원을 받아 예술 활동을 하면서도, 자기 작품에 대한 해명도 없이 시민들의 편의를 방해하거나 사회의 기존 도덕관을 단순히 부정하기만 하는 작업을 했다는 게 문제가 되었죠.

한 마디로, "돈을 받고 예술을 하려면 돈 주는 사람한테는 그 예술이 뭔 의미가 있는지 정도는 해명해 주는 게 예의 아니냐?"라는 게 핵심 문제였던 거죠.

물론, 이 문제와는 별개로, 말씀하신 것처럼 예술이 그 자체로 지상 가치로 인정받는 사회에서는 "이게 예술이다!"라는 주장만으로도 공적 가치가 성립하겠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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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쵸. 저도 딱 그 정도 의미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이를 기반으로 새로운 주장을 해보자면 다음과 같을 수 있겠습니다.

  1. 공적 가치는 결국 다수성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2. 다수성은 곧 시민사회 내 하부집단의 권력을 상징하는 핵심 지표이다.

  3. 그러므로 시민사회 내 하부집단의 가치와 공적 가치의 우선순위는 해당 하부집단이 시민사회 내에서 가지는 권력에 따라 결정된다.

이런 식의 주장에는 찬동하시나요?

저는 결국 권력 싸움이라고 생각해요. 많은 사람들이 광장에 철벽을 두는 걸 옹호하면 철벽을 둬도 되는 거고, 옹호하지 않으면 두면 안 되는 거죠. 다만, 그렇다고 쪽수가 적은 집단은 사회에서 정당성을 가지지 못한다는 공리주의식 논리까지는 아니고, 결국 모든 가치 논쟁이 자기-집단중심적인 가치 기준을 내세워 상대편을 설득하려는 부단한 과정이라는 정도로 생각해요.

근데 이미 부러진 호를 전시했다는 건 작품에 대한 작가의 생각을 다 밝혔으니 전시가 된 것이고
이 당시 예술가 지원금 논란 문제도 이름만 가져다 올린다고 지원금을 준다기 보다는 적어도 어느 작품을 하는지는 알고 준다는 거죠. 우리나라에서는 사실상 일어나기도 힘든 일이고요.
우리나라 사상은 돈을 받았음 돈 값을 해야 하는 나라니까 허무맹랑한 작품 따위는 니 돈으로 해라 가 맞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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