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의 요소는 개념이고, 진리의 참된 형태는 학문이다.]
헤겔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진리의 참된 형태는 학문성 속에 정립되며, 따라서 '진리는 오직 개념에서만 자신이 실존하는 요소를 지닌다.' ¹
이는 당대에 퍼진 '확신이자 외람된 표상', 곧 참된 것은 한낱 '직관', '절대자에 관한 직접적 지', '종교라든가 존재('신적 사랑의 중심'이라는 존재 자체)'라 불리는 것과는 대비된다.
이는 이들이 철학의 서술을 위한 개념의 형식과는 전혀 다른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며, 따라서 그들에게선 "절대자는 개념적으로 파악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느껴지고 직관되어야 하므로, 절대자의 개념에 아닌 감정과 직관이 발언권을 쥐고서 표명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²
[현재 정신이 서 있는 지점]
헤겔은 이러한 요구(가 나타나는 현상)에 대해 좀 더 보편적인 연관에 따라 포착해본다. 당시의 자기의식적 정신이 서 있던 단계에서 주목하자. 지금은 그가 지금껏 사고의 요소 속에서 영위해왔던 '실체적 삶'을 넘어서 있다. 이 넘어섬의 단계 속에서 자신 안에서 실체를 결여한 채로 자신을 반성하는 극단으로 넘어섰으며, 게다가 이 넘어섬마저 넘어섰다.
따라서 정신은 자신의 '본질적인 삶'을 '상실'했을 뿐만 아니라, 이런 '상실'로서 이제 자신의 내용이 된 '유한성'을 자각하기에 이르렀다. 이제 정신은 이런 곤란한 처지에 놓여있음을 고백하고 비난하며, 철학으로부터 '과연 정신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앎/지(知)이 아닌 존재의 실체성과 견고성을 다시 회복하는 일을 요구한다.
이에 당대의 철학은 이러한 정신의 욕구에 대해 다음과 같은 것들을 거부한다: '실체를 그것이 지닌 폐쇄성을 열어젖힘으로써 자기의식으로 고양시키는 것' 그리고 '실체를 그것이 지닌 혼란스러운 의식에서 사유된 질서와 개념의 단순성으로 되돌려놓는 것'. ³
그리고 '오히려 분화(分化)된 사고들을 뒤섞어버리고 분별하는 개념을 억눌러서 본질에 대한 감정을 일으켜 세워야한다'고 말한다. "즉, 철학은 통찰보다는 감화(感化, Erbauung) ⁴ 를 제공해야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유혹에 대한 '아름다움, 성스러움, 영원함, 종교, 사랑'이라는 미끼, '개념이 아닌 몰아의 황홀(Ekstase)', '냉철하게 진전하는 사태의 필연성이 아닌 끓어오르는 열광'. 이것이 실체의 풍요로움을 보존 및 지속적으로 확대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감각적인 것·개별적인 것(지상)에 함몰된 상황'에서 사람들을 '구출'하여 '별(천상)으로 고개를 들어올리도록 하는 일'말이다. "마치 사람들이 신적인 것을 모조리 망각한 채 버러지마냥 먼지와 물로 흡족해하면서 한 군데에 머물로 있기라도 하는 듯이 말이다."
헤겔은 설명한다. 이전에는 사람들에게 풍부한 사고들과 형상들로 가득 찬 천상이 있었고, 존재하는 모든 것은 이 천상과 연결해주는 빛줄기(은총, 계시) 속에서 의미를 지녔다. 이 빛줄기를 따라 그들의 시선은 차안의 현전에서 피안의 현전으로, 곧 신적 본질을 향해 날아올랐다.
그래서 '정신의 눈으로 하여금 지상의 것을 향하여 고정되게끔 강제되어야'만 했는데, 그리하여 천상의 것만이 지녔던 명징함을 현세의 감각이 빠져있던 불분명함 속으로 이입시키게 되었다. 현전하는 것 자체(경험)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흥미롭고 타당한 일이 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소요된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정반대의 곤경이 놓여있다. 감각이 지상에 너무 고착된 탓에 천상으로 고양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정신은 쇠약해졌고, 사막에서 방랑자가 한 모금의 물을 갈망하듯 신적인 것에 대한 보잘것 없는 감정이라도 갈구하는 듯한 빈약함을 보이게 된 것이다.
즉, "정신이 무엇에 만족하는지에 따라서 곧 정신이 겪은 상실의 크기를 가늠할 수 있다." 즉, '감화'란 정신이 겪는 이러한 상실을 무마하고자 지상의 것(현존재 및 사고의 다양성)들을 흐리게하여 천상의 것을 추구하도록 속이는 장황한 수사에 불과한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열광과 혼탁함을 통한 '학문에 대한 검소한 포기'가 '학문'보다 더 고귀한 것이라 말할 수 있겠는가? "이런 예언자인 체하는 언설은 그렇게 함으로써 핵심과 심오함에 제대로 머무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규정성/한정(Horos)을 경멸의 눈갈로 바라보면서 개념과 필연성을 한낱 유한성에 안주하는 반성이라고 멀리하며 의도적으로 기피한다."
그렇기에 헤겔은 학문에게서 어울리지 않는 것은 이같은 주고받는 것에 인색한 태도며, 따라서 학문으로서의 철학은 이처럼 감화되려는 태도를 피해야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공허한 넓음만큼 공허한 깊이도 있다." 공허한 넓음, '잡다한 유한자들로 쏟아져 나오나 이를 묶을 힘이 없는 실체의 외연'. 공허한 깊이, '확장됨 없이 그저 스스로를 보존할 뿐인 힘이며 피상성과 다르지 않은 내실 없는 내포'. 그러나 정신의 힘은 그것이 표출되는 만큼 크고, 깊이는 그것이 펼쳐지는 가운데 스스로를 확장하면서 스스로를 상실할 용기를 지닌 만큼만 깊다. ⁵
이러한 '몰개념적인 실체적 지'가 자기(自己, das Selbst)의 고유성을 본질 속에 함몰시키고, 참되고 성스러운 태도로 철학(함)을 자처한다면, 이러한 지는 실제로는 신에게 헌신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한도/규정에 대한 거부로, 자기 자신 속에서 내용의 우연성과 자의(恣意)가 멋대로 활개치게 놔두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은폐이다.
헤겔은 실체의 무절제함에 자신을 내맡기며 자기의식을 뒤덮고 오성을 포기하여, 꿈속에서 신으로부터 지혜를 선사받아 '신의 자식'이 된 그들에 대해, 그들이 그처럼 '꿈속에서 수태하고 분만한 것은 바로 그렇기 때문에 꿈에 지나지 않는다'고 강하게 비판한다.
헤겔의 시대가 탄생의 시대(새로운 시대로 넘어가는 이행기)라는 사실은 어렵지 않게 간파된다. 정신은 '자신의 현존재와 표상으로 이루어진 기존의 세계와 단절하고 과거로 돌려보내 묻어버리는 와중에 곧 자신의 형태를 변혁하는 노동 중'에 있다. 물론 정신은 항상 전진하는 운동을 한다.
"그러나 마치 오랫동안 고요히 자양분을 섭취하던 태아가 마침내 최초의 숨결을 내쉬면서 지금까지 단지 양적으로 증대되기만 하던 전진의 점진성을 깨뜨리고는 (질적 도약) 마침내 신생아로 태어나듯이, 스스로를 도야하는 정신도 천천히 그리고 조용히 새로운 형태를 무르익게 하면서 기존 세계의 견축물을 구성하고 있던 작은 부분들을 하나하나씩 허물어버린다. 그런데 이런 기존 세계의 동요는 단지 개별적인 징후들을 통해 암시될 뿐이다. 기존 세계에 대한 만연한 경솔함이나 권태로움, 미지의 것에 대한 막연한 예감은 곧 무언가 다른 것이 도래하고 있음을 알리는 전조이다. 전체 골격은 변형시키지 않던 점진적인 와해가 마치 번갯불처럼 일거에 새로운 세계의 구조물을 드러내 보이는 해오름에 의해 중단되는 것이다."
"그러나 갓 태어난 아기가 그러하듯이 이 새로운 것도 완전한 현실성을 지니는 것은 아니다." 최초의 등장은 그것의 직접성 또는 그것의 단순한 개념에 불과하다. 건물의 기초를 놓는 것이 곧 건물의 완성인 것은 아니듯, 도토리 한 알을 보여주는 일이 잎이 무성한 참나무를 보여주는 것이 되진 않는다.
학문이라는 정신 세계의 왕관 또한 그 시초에서 이미 완성된 것이 아니다. 새로운 정신의 시초는 다양한 도야 형식들이 겪어온 장대한 변혁의 산물이며, 여러 갈래로 뒤얽힌 경로를 거치면서 온갖 노력과 노고를 들인 끝에 얻은 대가이다. ⁶
"그러한 시초는 연쇄의 과정으로부터 그리고 그 외연의 확장으로부터 자기 자신으로 복귀한 전체, 그런 전체의 생성된 단순한 개념이다." 헤겔은 이런 단순한 전체의 현실성은, 전체의 계기가 된 형태들이 새롭게 그러나 이제는 자신의 새로운 요소(새롭게 생성된 의미) 속에서 자신을 전개하면서 형태를 부여하는 데에 있다고 말한다. ⁷
각주
1. 즉, 진리의 요소는 개념이며, 따라서 진리는 개념을 통해서만 실존한다.
2. 칸트가 행했던 비판(특히, 이론 이성의 한계에 대한 비판)에 따라 개념적 사유에 따른 절대자에 대한 인식 가능성이 부정되었던 것과 연관된다. 이에 영향을 받은 당대의 신앙론 및 낭만주의는 직접적 직관과 종교적 감정을 통한 절대자와의 합일을 주장한다. 에쉔마이어, 괴레스, 야코비, 슐레겔, 슐라이어마허 등이 해당된다. "종교의 본질은 사유도 아니고 행위도 아니며 직관과 감정이다" –『종교론Über die Religion: reden an die gebildeten unter ihren verächtern』, 슐라이어마허F. D. E. Schleiermacher, Berlin, 1799, 126p
3. 칸트의 비판에 의해 이성은 한계에 봉착했다. 그러나 신앙을 위한 공간(예지계)을 열어놓았다는 칸트의 말에 의한 것인지, 당대의 사람들은 한계를 겸허히 수용하고 나아가는 학문적 자세 대신 불가지의 세계를 향한 열망으로 도피하는 신앙적 자세를 취했다. 그러나 헤겔이 반복하여 표현하는 것처럼, 이것은 '신앙'일 수는 있어도 '학문'은 아니다.
4. 'Erbauung'은 '경건한 신심을 복돋아 일으킴', '신앙심의 고취', '종교적 감화·교화'의 뜻을 지닌다.
5. 정신의 넓이(외연)와 깊이(내포)를 보장해주는 것은 줄곧 학문의 역할이었다. 학문이 지속적으로 행해왔던 작업을 포기한다는 것은 이러한 역할을 포기한다는 것이며, 학문을 통해 보장된 정신의 넓이와 깊이를 포기하는 것이다. 따라서 학문을 방기하는 자들은 역설적으로 자신들의 말과는 정반대로 나아가는 셈이다.
6. 이런 새로운 현존재에 대한 '질적 도약' 곧 새로운 시초는, 최초에는 개념으로서 단순하게 주어지는 것이며 그 개념이 현실 속에서 성숙하고 달성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인 것이다. 태내에서 '태아'로서 자라고 기한이 차서 태외로 '아기'로서 분만된 이후에도 '성인'으로 성장하기 위한 양육기간이 필요한 것처럼 말이다. 이처럼, 새로운 개념이 주어지는 그 순간은 단지 개념 자신의 직접성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당대가 겪는 곤혹은 당연한 혼란인 것이며, 헤겔은 이에서 도망치기보다는 직면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체계가 변동되는 혼란의 시대야말로 진정으로 새로운 것이 열리는 시대이며, 따라서 그러한 시대는 오히려 학문에 대한 열정과 처절한 갈고닦음이 요구된다.
7. 새로운 현존재로의 이행은 체계의 구조 자체가 변화하는 것이며, 따라서 전체가 변화하는 것이고 이에 속하는 계기들을 해석하는 방식도 변화하는 것이다. 그리고 구조의 성숙은 이러한 과정 속에서 차차 무르익게 된다.
참고: 이 글은 김춘수 역(2022, 아카넷)을 참조함.
참고 2: 대괄호''로 표시된 것은 소제목이다. 원문의 차례에 있었으나 본문에서는 생략된 것으로 역자가 삽입했다.
어우, 엄청 신랄하네요. 그래도 그렇게 이야기할만 합니다. '학문이기를 포기한 학문'이라니 말도 안되는 이야기니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