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현상학』,「서문」, 정리 (1)




서문: 학문적 인식에 대하여



헤겔은 서문 시작부터 철학서에 걸맞는 서문에 대해 논한다. 그는 단순히 저서의 목적, 연구 동향 및 연관, 집필 동기 등을 설명하거나 역사적으로historisch 진술하는 것은 철학적 진리에 타당한 방식이 아니며, 따라서 철학서의 서문에 적합한 것이 아니라 말한다.

또한 "철학은 본질적으로 특수한 것을 내포하는 보편성이라는 요소 속에 존립한다." 그렇기에 '최종적인 목적·결론에선 사태 자체가 그 완전한 본질에서 표현되나, 그 과정은 비본질적이다'라는 가상은 철학에서 더 쉽게 생겨난다. 이는 철학에서 쉽게 나타나는 '실재(목적·결과) 혹은 가상(과정)'이라는 이분법에 대한 비판적 고찰로 보인다. ¹

그렇기에 헤겔은 해부학의 예시를 들어 철학을 생명과학으로 비유한다. 즉, 해부학만의 지식은 생명이 없는 생명체에 대한 지식이므로 생명체에 대한 올바른 지식(생명과학)일 수가 없으며, 따라서 생명체의 기능을 올바르게 설명할 수 없다. ²

그리고 헤겔은 또다른 예시로 꽃봉오리, 꽃, 열매가 꽃봉오리, 꽃이라는 과정을 거쳐 열매라는 결과로 이어지는 것이라 이야기한다. 이는 해부학의 예시와 정반대로 헤겔이 추구하는 바람직한 학문적 인식에 대한 예시인 셈이다. 다시 말하자면, 여러 철학의 체계들을 순서와 무관한 것들의 나열로 보는 것은 생명과학의 지식들을 생명의 본질에 대해서는 무관한 시체의 단순한 부검 결과로 바라보는 것과 같다. ³


따라서 상이한 것들이 지니는 유동적 본성은 유기적인 통일의 계기이다. 유기적 통일 속에서 그것들은 상충하지 않으며 하나가 다른 하나에 못지 않게 필연적이다. 즉, 각각은 계기로서 동등한 필연성을 지니며 그렇기에 전체를 이룬다.
지금껏 체계에 대한 이론異論(다른 논변)은 이를 포착하려는 의식이었으나, 통상적으로 그 일면성에서 해방 혹은 자유를 얻진 못했다. 서로 투쟁·배치하는 듯 보이는 형태(상이성) 속에서 상호 필연적인 계기들을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⁴

그러므로 상이성을 전체의 계기로서 다루지 못하는 것은 현실적인/참된(wirklich) ⁵ 인식이 아니며, 목적은 혼자만으로는 생명없는 보편적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상이성은 사태가 중지되는 곳(사태의 한계)이며 사태가 그것이 아닌 바(사태가 지닌 현존재 간의 차이)이다.

그렇기에, 목적·결과와 함께 그에 대한 과정(수행 과정, Ausfürhrung)을 다루어야만 현실적인/진정한 전체를 이루는 것이다.



헤겔은 다시 지금까지의 논의에서 다룬 철학함이라는 방법에 있어 그것을 쉬운 순부터 나열한다.

  1. 내용·내실을 가진 것을 파악하는 것.
  2. 내용·내실을 가진 것을 비교하고 평가하는 것.
  3. 1번과 2번을 통일하여 동시에 다루는 것.

헤겔이 다루고자 하는 것은 3번으로 이에 대한 서술(Darstellung)을 다루고자 한다. ⁶

그러므로 헤겔은 실체적 삶의 직접성/무매개성(Unmittelbarkeit)에서 벗어나 도야(陶冶)를 시작 하는 단초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1. '보편적 근본 명제(원칙)와 관점에 관한 지식을 획득하는 것.': 원리·원칙과 관점에 대한 지식을 획득함으로써 학문의 논리적이고 현실적인 기반을 마련해야한다.
  2. '그리고 스스로를 사태 일반에 관한 사고(思考)를 향해 끌어올리고 가다듬는 것.': 사태를 개별적으로 보는 협소한 사고를 극복해야한다.
  3. '이에 못지않은 근거를 가지고서 사태를 뒷받침하고 논박하는 것.': 사태에 대하여 말할 때 확실한 근거를 통해야한다.
  4. '구체적이며 내용이 풍부한 대상을 그 규정성들에 의거하여 포착하는 것.': 구체적인 대상을 파악할 때 규정성들을 통해야한다.
  5. '이에 관해 제대로 된 결정과 진지한 판단을 내리는 것.': 결정과 판단을 내림에 있어 흐지부지하지 않고 엄밀하게 해야한다.
  6. '여기에 덧붙여, 개념의 진지함으로 깊이를 더하는 것.' ⁷

"진리가 실존하는 참된 형태는 오로지 진리의 학문 체계일 수 있을 따름이다. 철학이 학문의 형식에 더욱 다가가는 데에, 즉 (知)에 대한 사랑이라는 이름을 탈피하고서 현실적인/실현된 지가 되고자 하는 목표에 좀 더 가까이 도달하는 데에 조력을 기울이는 일. 이것이 내가 의도하는 바이다. "

지의 본성에는 '지는 곧 학문'이라는 내적 필연성이 놓여있는데, 이는 오직 철학적 서술만이 잘 설명할 수 있다. 또한 외적 필연성은 우연성(인물의 개성, 개인적인 동기 등)을 도외시하고 보편적인 방식으로 파악하면 내적 필연성과 동일하다.

그것은 시대가 자신의 계기들이 지닌 현존재를, 표상하는 방식(이라는 형태) 속에서 관철되는 필연성이다. ⁸ 이 점을 보여주는 것이 목적을 지닌 시도들에 관한 유일하게 참된 정당화이다. 이는 목적이 지닌 필연성을 밝히고, 동시에 그 목적에 대해 수행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각주]

1. 보편자와 개별자, 예지체(물자체)와 현상체, 목적과 과정 등 철학 속에서 나타나는 거친 이원론은 어느 한쪽을 실재로 그리고 다른 한쪽을 가상으로 쉽게 확언하는 성급함으로 이어지곤 한다. 헤겔은 이러한 성급함에 대해 '그러한 태도야말로 가상'이라며 신랄하게 비판하는 것이다.

2. 이를 해석하면 이렇다: '철학자가 과정을 도외시하고 목적만을 다루는 것은 생명과학자가 생명 없는 생명체(시체)만을 다루는 것과 같다. 그런데 과연 이러한 방식, 과정을 도외시 하고 목적으로 곧장 나아가는 방식을 철학에 걸맞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러므로 '생명('과정') 없는 현존재(현존하는 것)에 대한 일반적인 표상('지식')만으로는 사태 자체가 되는 내용('목적·결과')을 손에 넣은 것이 아니며, 다른 것(=생명)을 필요로 한다'는 설명은 동시에 철학에 그대로 적용할 수 있다. 즉, 헤겔은 과정이나 비본질적인 것에 속한다고 여겨지는 것을 도외시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이다.

3. 헤겔은 이러한 학문적 인식에 부적절한 태도를 '사념Meinung(私念, 사사로운 생각)'이라고 말한다. 사사로운 디테일에 신경쓰느라 큰 그림을 놓치는 분석적 태도인 셈이다.

4. 지금까지 살펴보았듯, 헤겔에게서 '현실적인 것(das wirkliche)'은 외적 본질과 내적 본질이 일치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현실태(energeia)'에 상응한다. 때로는 이 용어를 일상적 의미인 '경험적으로 지각할 수 있는' 또는 '구체적으로 실존하는' 등의 의미로 사용한다.

5. 즉, 헤겔이 여기서 비판하는 것은 지금까지의 철학자들은 상이성을 유기적 통일의 계기로서 바라보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철학자들은 전통적으로 목적을 본질적인 것으로 보고 과정을 비본질적인 것으로서 소홀히 하였다. 그렇기에 철학자들은 각각의 상이성들을 따로 다루거나, 새로운 상이성을 주장하는 것에 그치게 된 것이다.

6. 따라서, 헤겔이『정신현상학』에서 의도하는 것은 단순히 체계들 각각을 다루거나 비교하는 것이 아닌, 그것들을 포괄하여 전체 속에서 각각을 서로에 대한 필연적 계기로 만든 다음, 목적·결론을 과정으로서 서술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철학의 상이한 체계들을 철학사적 연계로서 다루어 전체라는 더 큰 체계로서 바라보는 이러한『정신현상학』의 방법을 종종 '정신사史'라고도 부른다.

7. 이와 같은 도야의 시초(1~5번)는 사태 자체의 경험으로 인도하는 충만한 삶의 진지함에 자리를 내어주게 된다. 6번은 이에 대한 심화로 보다 진지한 학문을 가능케 한다. 즉, 이러한 도야를 통해야 헤겔이 말하는 학문적 인식과 거기서 비롯되는 진정한 학문이 비로소 가능하게 될 것이다.

8. 앞서 말한 것과 동일하다. 즉, 각 시대의 상이한 철학은 철학 전체의 현존재이자 계기이다.


참고: 이 글은 김춘수 역(2022, 아카넷)을 참조함.



재차 읽는 것이지만, 서문 몇페이지 정리하는데 3000자가 빡빡하네요... 역시 헤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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