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실천적 민주주의(171-185)
공공영역에 생명을 불어넣기: 4가지 질문
숙의 민주주의 설계에서 핵심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정치적 평등(수용)과 심사숙고(숙의)가 결합될 수 있냐이다. 관련된 질문으로 네 가지가 제시될 수 있다.
첫째, 둘의 결합이 이루어졌을 때, 그것은 얼마나 수용적인가?
둘째, 둘의 결합이 이루어졌을 때, 그것은 질 높은 숙의를 보장하는가? 왜곡을 피하고 경합하는 논변의 장점을 제대로 고려할 수 있는가?
셋째, 둘의 결합이 이루어졌을 때, 숙의 참여자와 세계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되는가?
넷째, 둘의 결합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어떤 사회·정치적 조건이 마련되어야 하는가?
얼마나 수용적인가?
이는 얼마나 많은 사람을 수용하냐는 문제다. 지금까지 무작위추출법을 수용의 도구로 사용했는데, 이 경우 소우주와 전체 사이의 관계가 대의적이라는 한계를 지닌다.
이에 더해, 소우주의 숙의적 여론과 전체 비정제 여론 사이의 갭은 정당화 문제를 제기한다. 무엇이 전자에게 정책결정자와 더 큰 공중에게 권고할 힘을 부여하는가? 이에 대한 대답은 소우주의 숙의적 여론이 행하는 신중한 판단이 공중이 이 사안을 고려할 좋은 조건 하에서라면 지지할 바로 그 판단이라는 추론의 신뢰성에 달려 있다. 이렇게 보편화 가능성 혹은 일반화를 보장하기 위해서는 사회과학의 도움이 필요하다. 그것이 주어진 소우주 설계를 따지고 소우주 숙의의 활용을 정당화한다.
다른 문제도 제기된다. 만일 수용의 범위를 넓혀 모두를 실제 참여로 이끌고자 한다면 결국 국민투표제적 민주주의와 다를 바 없게 되고, 결과적으로 합리적 무지, 불관여, 무관심한 공중의 이미지 정치를 초래하게 된다는 것이다.
무작위추출법과 소우주 숙의에 대해 대안으로 공적 포럼 개최가 제시되곤 했다. 그러나 이 대안은 수용적이지도 못하고 조직화된 이익집단의 지배로 이끄는 한계를 가진다. 왜냐하면 포럼에 참여하는 자들은 특정 주제에 대한 이해를 지닌 이슈 공중에 불과하기에 대표성이 낮고, 그 결과 숙의를 해친다.
얼마나 사려 깊은가?
이는 얼마나 질 높은 숙의가 가능하냐는 문제다. 이는 기본적으로 참여자가 심사숙고할 좋은 조건은 무엇이냐는 것이다. 앞서 논한 숙의의 질과 관련된 기준을 염두에 두면, 사려 깊은 소우주 토의는 ‘정보’, ‘실질적 균형’, ‘타산적 참여’가 아닌 ‘성실한 참여’, ‘관점의 다양성’, ‘논변에 대한 동등한 고려’를 규범적으로 요구한다. 그런데 모두의 견해에 대한 동등한 고려를 기반으로 하는 숙의 민주주의의 정당성에 관해 문제 제기가 있어 왔다.
우선, 특권을 가진 자들이 사실상 숙의 과정을 지배한다는 비판이 있다. 어떤 소우주 숙의라도 일상생활의 사회·경제적 불평등에서 자유롭지 않기에, 이런 불평등을 차단하고 평등하게 숙의하는 상황은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비판자들이 보기에 숙의 민주주의자들은 이 사실을 숨기고 있다.
아이리스 매리언 영에 따르면 숙의에서 내적인 배제 문제는 다음의 이유로 발생한다. 일상생활에서 이점을 누리는 데 익숙한 사람들은 자신 견해를 내세울 때 더 자신만만하고 타인의 견해에는 덜 개방적일 수 있고,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자신 견해가 무가치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전자는 논리정연한 주장을 내세우는 데 익숙하고, 후자는 아닐 경우가 많다. 한마디로, 듣거나 말하는 태도가 외관상 평등한 숙의를 내적으로 망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더해, 불평등과 상관없이 집단 토의 과정 자체가 왜곡을 가져올 수 있다는 비판도 제기됐다. 카스 썬스타인에 의하면, 어떤 차원이 있고 거기에 중간 지점이 있으면, 한 소그룹의 평균이 중간 지점의 어느 한 편에서 시작할 때 그 소그룹은 같은 방향으로 중간 지점으로부터 점점 멀어진다. 즉, 집단 분극화가 일어난다. 그렇다면 숙의에는 왜곡이 발생하는 것인데, 이러한 왜곡이 발생하는 이유로 두 가지가 제시된다. 첫째, 어느 한 편에서 시작하면 이슈의 그쪽으로 논변 풀에 불균형이 생기게 되고, 그 방향으로 더 움직이게 만들 더 많은 논변이 제기된다. 둘째, 사람은 타인의 의견과 자신의 것을 비교하고, 합의하는 방향으로 순응할 사회적 압력을 느낀다.
어떤 효과를 기대할 수 있는가?
숙의 민주주의가 정치적으로 우열이 없는 사람들 사이의 어떤 종류의 대화라면, 그것은 참가자와 세상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되는가? 다음의 것들을 잠정적으로 제시할 수 있다. ①정책에 대한 태도의 변화 ②투표 의도에서의 변화 ③시민 역량의 변화 ④집단적 일관성의 변화 ⑤공적 대화(미디어 등)에서의 변화 ⑥공공 정책에서의 변화
어떤 조건에서 숙의 민주주의가 실행되는가?
숙의가 이루어지기 위해서 어떤 조건이 갖춰져야 하는지는 탐구되어야 할 주제이다. 민족, 언어, 상호 신뢰와 존중의 정도, 발전된 민주주의 체제의 유무 등등의 물음이 연구 아젠다에 포함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