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정녀 마리아 혹은 야훼 혹은 플로지스톤의 존재론?: 레이 브라지에와 그레이엄 하먼의 논쟁


왼쪽부터 해밀턴 그랜트(Hamilton Grant), 그레이엄 하먼(Graham Harman), 퀑탱 메이야수(Quentin Meillassoux), 레이 브라지에(Ray Brassier)

우연히 그레이엄 하먼의 『사변적 실재론 입문』을 뒤적여 보게 되었는데, 여기에 아주 재미 있는 논쟁이 하나 나오네요. 동정녀 마리아와 야훼를 과연 플로지스톤과 존재론적으로 같은 위치에 놓을 수 있는지에 대한 레이 브라지에와 그레이엄 하먼의 논쟁입니다. 브라지에는 그 셋 모두가 '상상적 객체' 혹은 '허구적 존재자'라고 주장하고, 하먼은 그런 브라지에의 입장이 과학주의를 내세워 종교와 종교적 경험을 단순히 경멸하고 있을 뿐이라고 비판하네요.

"여기서 호빗과 쿼크는 어떻게 구분됩니까? 이것은 매우 진지한 형이상학적 물음입니다!" 브라지에는 계속해서 우리가 실재적인 것과 감각적인 것을 구분할 수 있는 방식에 관한 물음을 제기한다. "동정녀 마리아 혹은 야훼 혹은 플로지스톤 같은 상상적 객체들 혹은 허구적 존재자들이 실재적 효과를 더할 나위 없이 산출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을 우리가 알고 있다는 사실을 참작하면… 사람들이 이들 사물의 존재를 믿고 자신들의 그런 믿음에 의거하여 세상에서 이런저런 일을 하는 한에서 그것들은 충분히 실재적 효과를 생성할 수 있습니다." (그레이엄 하먼, 『사변적 실재론 입문』, 김효진 옮김, 갈무리, 2023, 36쪽.)

브라지에의 두 번째 물음에 관해 말하자면 우리는 그가 어떻게 해서 그토록 확신을 갖고서 야훼와 동정녀 마리아를 플로지스톤과 같은 층위에 위치시킬 수 있는지 의아스럽게 여길 수 있다. 종교에 대한 합리주의적 경멸에 전적으로 부합되는 이것은 브라지에를 추종하는 집단들에서는 언제나 잘 수용될, 종교적 경험에 대한 일종의 멸시를 나타낸다. 하지만 그것은 아빌라의 성녀 테레사 혹은 부처 혹은 잘랄루딘 루미 같은 인물들의 이력을 올바로 평가할 수 없다. 이들 인물이 한낱 허구적 존재자에 불과한 것—'그런데도' 그들의 삶에 실재적 영향을 미치는 것들—과 관련되는 일은 언제나 가능하다. 그런데 대부분의 종교적 삶에 내장된 취약한 확실성은 실정적인 존재론적 현상으로, 브라지에가 자신의 무신론적 확신에 의거하여 단적으로 무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레이엄 하먼, 『사변적 실재론 입문』, 38-39쪽.)

제가 책의 앞부분만 읽어서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더 자세한 내용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 다소 아쉽습니다. 윌프리드 셀라스의 철학을 옹호하는 브라지에의 입장에서는, 셀라스가 강조하였듯이, '과학적 이미지(scientific image)'야말로 실재의 구조를 올바르게 나타내주고 있다고 생각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과학적 이미지 속으로 포섭될 수 없는 대상들에 대해서는 실재성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것이겠죠. 반면, 하먼은 객체(object)를 물리학적 요소로만 환원하려는 입장에도 반대하고, 객체를 행위 관계망으로 환원시키려는 입장에도 반대합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Vereenigde Oostindische Companie) 같은 인공물조차도 그 자신만의 고유한 삶을 지닌 독립적인 객체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하먼의 입장에서는 야훼나 동정녀 마리아가 '허구적'이라는 브라지에의 주장이 존재론의 문제를 과학에게 위탁하는 무책임한 태도라고 보일지도 모르겠네요.

사실, 저는 저 두 사람 중 어느 쪽에도 찬성하지 않고, 애초에 저 두 사람을 묶고 있는 '사변적 실재론(speculative realism)'이라는 입장 자체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긴 합니다만, 두 사람에게서 드러나는 논쟁의 양상은 흥미롭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두 인물 모두 동정녀 마리아와 야훼가 (허구적 대상이든 실재적 대상이든) '실재적 효과'를 지닌 대상이라는 점에 동의하고, 이 대상들의 존재론적 지위를 논의하는 것이 매우 진지한 철학적 문제라고 생각하고 있으니까요. 제가 종교인이라서 더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저는 이런 논쟁이 과학의 시대에도 종교적 대상과 종교적 경험의 존재론적 지위가 그렇게 손쉽게 무시될 수 없다는 점을 방증하고 있는 것 같아 반가웠습니다. 스스로 철학의 최첨단에 있다고 자부하는 인물들조차 이런 논의를 하고 있는 것이 흥미로웠던 거죠. (물론, 그러면서도 마음 한 구석에서는, 사변적 실재론이 이런 문제를 논의하는 방식이 마치 '바늘 위에 몇 명의 천사가 앉을 수 있는가?' 같은 중세의 사변적 고민들과 매우 유사해 보여서 불만족스럽기는 하였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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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표현하는게 옳은지 모르겠지만 가상적 존재자가 현존하며 세상에 영향을 끼치는 방식에 대해 그것은 라캉의 '대타자(큰 타자)'라고 지젝이 설명했던 것 같습니다. 중세 시대, 유럽에서는 신(하느님/하나님)이 확고한 대타자의 모습으로 나타나 마치 전쟁과 죽음, 처벌을 몰고다니는 절대군주처럼 행위했던 것처럼요.

그런데 오늘날의 신론이 그런 대타자로서의 신을 옹호하는가? 오늘날의 신 개념은 단지 믿음의 효과인 것을 (이론적으로든 실천적으로든) 은폐한 것에 불과한가?에 대해서는 모르겠습니다. 역설적으로 지젝의 신학을 통해 최근 신앙을 얻은 입장에서 물론 그러한 신은 우리가 믿어오던 신과는 결이 다를 수도 있으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신은 대타자도 단순한 가상적 존재자도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그것은 또 다른 주제입니다.

본론으로 돌아와, 제 부족한 식견이나마 말씀드리자면 합리주의자를 자처하는 자들의 생각이 놓치는 지점이 바로 이런 타자의 효과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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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지젝의 기독교 이해가 상당히 정곡을 찌르는 면이 있다고 봅니다. 특히 기독교야말로 가장 철저한 무신론의 한 형태라는 지젝의 주장은, 어찌보면 역설적이고 또 지나치게 과감하기도 하지만, 십자가 사건이 지닌 하나의 측면를 대단히 잘 부각시키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저는 지젝보다 지젝의 중요한 대화 상대자 중 한 사람이었던 존 밀뱅크의 입장에 더 동의합니다. 영국의 급진 정통주의 신학자인 밀뱅크는, 지젝의 기독교 이해가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라고 인정하지만, 지젝의 입장이 기독교에 대한 충실한 독해로 보기에는 다소 ‘이단적‘이라고 비판해요. 기독교의 십자가가 무신론적 저항과 상통하는 면이 많긴 하지만, 지젝은 기독교의 무신론적 측면만을 지나치게 과장한다고 지적하면서요. 기독교가 단순히 그런 측면만을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거죠. 『예수는 괴물이다』가 그 두 사람의 논쟁을 집약하고 있는 책입니다. 언젠가 이 책을 꼼꼼하게 다루어 보고 싶은 마음이 항상 있어요.

슬라보예 지젝·존 밀뱅크, 배성민·박치현 옮김,『예수는 괴물이다』,「옮긴이의 글」中
https://blog.naver.com/1019milk/220025106448

대항 존재론을 향하여: 존 밀뱅크의 『신학과 사회이론』에 대한 단상
https://blog.naver.com/1019milk/221593812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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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젝의 입장은 정말 흥미롭습니다. (제가 선생님 앞에서 말하는건 정말로 '공자 앞에서 문자 읽기'겠지만 부디 용서해주십시오...) 그래도 제 신앙을 깨닫게 된 지점을 전해드리고자 합니다. 저의 신앙은 비로소 지젝이 '사랑은 철저한 2자관계이므로 무신론적이며 따라서 우리에게 남은건 사랑의 심연 뿐이다.' ¹ 고 적었던 부분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론 '어? 그것이 신 아닌가? 지젝이 여러 저서에서 줄곧 성령을 이야기한건 바로 그 사랑의 심연 속에서 주체들이 '교회 공동체'로 변화한다고 말한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습니다. (아마 이 대목은 최근 올라온 헤겔의 성령론에 대한 글과 겹치는 것처럼 보이는데 제 착각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습니다. 착각이 아니라면, 이것도 지젝이 의도한걸까요?) 그 이후로 저는 어쩐지 기묘하게도 신앙심이 생겨서 요새는 신학과 성경에 대해 조금씩 그러나 꾸준하고 즐겁게 공부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약간 다르게 생각하는 것이 지젝이 말한 '무신론적 종교로서의 기독교'란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고 생각합니다.

  1. 기독교는 대타자를 거부(정확히는 '대타자의 결여'를 받아들임)하는 종교이기에 '대타자로서의 신이 없다'는 의미에서 무신론이다.
  2. 기독교인은 사랑을 실천할 윤리적 의무를 받아들인 자들이다. '무신론적 내기' ² 를 받아들여야 하므로 필연적으로 기독교는 무신론이다.

1번은 저도 받아들이는 입장인데다가 저는 신(하나님/하느님)은 피조세계를 권위적으로 휘두르는 가부장적 존재가 아니라고 생각해서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2번은 어떻습니까? 파스칼의 내기, '천국 가기 vs 아무곳도 못가기'에서 이를 뒤집은 무신론적 내기, '천국 못가기 vs 아무곳도 못가기'라니... 와...

지젝은 우리가 '무신론적 내기'를 받아들이고 신을 뒤로한 채 우리 스스로를 궁지에 몰아넣음으로써 보다 윤리적으로 행위할 수 있어야 한다고 호소하는 듯합니다. (사실 이는 '보증자/대타자 없는' 윤리라는 점에서 이는 1번의 의미를 포함하긴 합니다.)

저는 아직도 완벽히 이해하지 못했지만 여전히 엄청난 충격을 받고 있는데 그럼에도 여기서 무언가 크게 와닿는게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 기독교인들이 신(하나님/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럼에도 신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리라는 전망 속에서 믿는다는건데, 이 전망을 이제 우리 스스로 짊어짐으로써 그리스도가 갔던 길을 가라는 것처럼 들리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노고의 보상을 의도적으로 거부하면서까지요! 더하여 이러한 내기는 어떤 쪽에 떨어져도 본전조차 없는데다가 심지어는 파멸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이를 수용하는 것은 '내가 파멸할 수도 있다고? 그래서 어쨌다는 건가? 나는 그저 그것이 옳다고 생각하기에 한다!'는 경악할만한 생각 아닙니까?

물론 그렇다고 해서 윤리적으로 사는 것이 곧장 그리스도처럼 엄청난 핍박과 고난을 받게되는 것은 아니겠으나, 의도적으로 매우 어려운 길을 고르기를 강요한다는 점(그리고 그것이 윤리적으로 더 철저한 태도라는 점)에서 참으로 무시무시합니다. 그러나 지젝이 끊임없이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해야한다고 (대타자에 대한 거부) 말했던 것을 보면 이러한 '무신론'은 단순히 어떤 것에 대한 이론적인 접근일 뿐만 아니라 윤리적인 태도로도 읽힐 수도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과 믿음이 생겼고, 그래서 정말로 두려웠습니다.

그러나 그렇기에 동시에 매우 기뻤습니다. '이것이 괴물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지젝은 저를 보면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으나 저는 분명히 구원받았습니다. 저도 이제 사랑으로 살아가고 싶습니다. 사랑의 냉혹한 열정의 세계 ³ 속 한 마리 괴물로서, 매일 그리스도 안에서 죽는 한 명의 인간 ⁴ 으로서, 곧 '그리스도인'으로서 말입니다...

    1. (...) 바디우가 명쾌하게 지적하듯이 사랑은 개념 자체에서부터 무신론적이며, 신이 없는 것은 이 때문이다. (...) 그리스도는 십자가 위에서 죽은 후 현혹당해 있는 추종자들에게 그들 사이에 살아있을 것이라 말하는데, 이는 그리스도–사랑이 사랑의 관계에서 제3항, 즉 사랑의 보증자와 토대라는 것으로 읽혀서는 안 되며, 오히려 그와 반대로 신의 죽음을 선포하는 또 다른 방법으로 읽혀야 한다. 즉 우리의 운명을 보장해주는 큰 타자는 없다. 우리가 가진 것이라곤 자신에 근거한 우리 사랑의 심연이 전부이다. – 『Less than nothing: Hegel and the Shadow of Dialectical Materialism』, 슬라보예 지젝 작, 조형준 역, 분권 중 1권 '헤겔 레스토랑', 216p
    1. (...) 이 모든 것의 밑바탕에는 신앙은 결심 문제라는 입장의 기본적 입장이 깔려 있다. 무엇을 믿는 것 또는 믿지 않는 것은 통찰이 아니라 결심 문제라는 입장이 그것이다. (...) 아마 만약 믿는 것처럼 행동하면 신앙이 생겨날 것이라는 이러한 신뢰 자체가 내기일 것이다. 당신은 신앙에 이르기를 바라지만 방법을 모른다. (...) 아마 이러한 막다른 상태로부터의 유일한 출구는 디드로가 미간행 비밀 원고들에서 '유물론자의 신조'라는 제목 아래 정교화하고 있는 것일 것이다. 「원수元帥 부인과 한 철학자의 만남」에서 그는 이렇게 결론을 내리고 있다. "Après tout, le plus court est de se conduire comme si le vieillard existait ⋯⋯ même quand on n'y croit Pas(결국, 가장 간단한 방법은 그 늙은이가 존재하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다. ⋯⋯ 비록 믿지는 않지만 말이다)." 이것은 아마 의식들에 대한 파스칼의 내기와 동일한 것에 해당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즉 비록 믿지는 않지만 의식들을 믿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다. 하지만 디드로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정확히 그와 정반대이다. 즉 진정 도덕적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신의 존재와 상관없이 도덕적으로 행위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디드로는 파스칼의 내기(신의 존재 쪽에 내기를 걸라는 조언)를 직접 뒤집는다. "En un mot que la pulpart ont tout à perdre à gagner et rien un Dieu rénumérateur et vengaeu (한 마디로 말해 보상해주거나 복수하는 신을 부정하는 사람의 대다수는 모든 것을 잃고 아무 것도 얻지 못할 것이다)." 무신론자보상하고 복수하는 신을 부정하는 가운데 모든 것을 잃거나(만약 그가 틀린다면 영원히 저주받을 것이다) 아니면 아무것도 얻지 못하거나(그가 맞는다면 신은 없을 것이며,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둘 중 하나일 것이다. 바로 그러한 태도가 자신의 신앙에 대한 진정한 믿음을 표현하고, 신의 보상과 상관없이 또는 '그 늙은이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 물론 이 늙은이는 신-아버지[성부]로, '아버지냐 아니면 더 나쁜 것이냐le père ou pire라는 라캉의 공식을 떠올리게 한다 ㅡ 선행을 할 수 있도록 해준다. 바로 이 수준에서 파스칼과 디드로를 대립시켜야 한다. 즉 파스칼이 신-아버지(성부) 쪽에 내기를 거는 반면 디드로는 parier sur le pire(더 나쁜 것 쪽에 내기를 걸라고) 명한다. 진정한 윤리에서 우리는 큰 타자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입장[위치]에서 행위하며, 어떠한 보장 또는 토대도 박탈당한 행위의 심연을 받아들여야 한다. – 같은 책, 226~228p
    1. (...) 이것이 나의 입장이며, 나는 이런 태도를 취하고 싶다. 다시 말해, 감정이입 없는 윤리적 괴물맹목적 자발성과 성찰적 거리의 기묘한 일치 속에서 해야 할 것을 수행하며, 구역질나는 근접성을 피하면서도 타자를 돕는다. 이런 사람이 더 많아진다면, 세계감상이 아니라 냉정하고 잔혹한 열정이 지배하는 즐거운 공간이 될 것이다. –『예수는 괴물이다The monstrosity of christ』, 슬라보예 지젝·존 밀뱅크 작, 배성민·박치현 역, 465p
    1. 고린도전서 1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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