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모르는 것일 수도 있지만, 하이데거 철학의 고유한 개념어 중에 임재라 불리는 것은 딱히 없는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한국 하이데거 학회에서 정한 번역어가 거진다 고유어로 되어있기도 하고요. 피투 기투 같은 것이 쓰이는 옛 번역본이라면 모를까, 저자가 굳이 임재 같은 한자어로 번역어를 고를 것 같지는 않네요.)
그래서 전체 맥락을 보고 추측해보면, 실제로 그 신학적 뉘앙스로 임재를 쓰신 것 같습니다. (전체 문장을 보면 철학을 "예술이나 종교와 같이" 라면서 철학을 종교와 동일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특히 그렇습니다.)
다만 여기서는 어떠한 신학이나 기독교적 맥락이라기보단, 기독교에서 (어마어마하고 중요하고 대체 불가능한) 신이 임재하듯, (하이데거) 철학에서는 (마찬가지로중요하고 대체 불가능한) 전체로서의 존재가 임재하는 것이겠죠.
'임재(臨在)'라는 용어가 하이데거 연구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용어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임재'는 영어로는 'presence'이고 독일어로는 'Präsenz'이니, 하이데거가 이런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하이데거의 맥락에서 'Präsenz'는 우리말로 '현전(現在)'이라고 번역됩니다. '현전의 형이상학(Metaphysik der Präsenz)'이라는 표현에서처럼 말이에요.
저 글의 맥락에서 '임재'는 (굳이 하이데거 용어를 사용하자면) 존재가 '탈은폐'되는 사건이나 '개시'되는 사건 정도의 의미로 이해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더 일상적인 표현으로는, (댓글에서 이미 언급하신 것처럼) 존재의 '드러남'도 나쁘지 않을 거예요.
그런데 저는 '임재'가 기독교인들이 주로 사용하는 용어인 줄은 처음 알았네요. 제가 기독교인이다 보니 워낙 저 용어를 익숙하게 써서 다른 사람들도 일반적으로 쓰는 말인 줄 알았습니다;; 하긴, 생각해 보면, 저 용어가 히브리어로 '쉐키나(שכינה)'라고 하는 다소 특수한 상태를 나타내기 위해 사용되는 것이긴 하네요. 언약궤나 예루살렘 성전 위에 나타나는 야훼의 '거주함' 혹은 '머무름' 혹은 '함께 함'의 상태가 '쉐키나'이고, 그게 한국어로는 '임재'라고 번역되는 거라서요.
하이데거가 신학에도 눈이 밝아 본인의 존재론이 신학의 임재 개념과 오해될 수 있어 구별했던 기억입니다.
박찬국 교수님의 저 파트는 '개시' 를 말하고 싶어하는 것 같은데, 하이데거의 후기철학은 '존재의 임재'가 느낌적으로 더 와닿기는 합니다.
<자크 데리다를 읽는 시간>의 나카마사 마사키의 말을 빌려 '존재의 임재'가 와닿는 이유를 대체해보고자 합니다.
하이데거의 경우 '사유'가 묻는 것은 '존재 그 자체' 인데, '존재 그 자체'는 파악하지 못하니까, 사유하는자 ≒ 철학자는 겸허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 시기의 하이데거는 일반적으로 '사유(사고)의 경건함'을 중시하게 된 것 같습니다. 형이상학적 전제에 얽매이지 않고, 소박하게 '사고하는'것을 통해서 '존재'에 대해 겸허해지며, '존재'가 보내온 메시지를 솔직하게 받아들이는 자세입니다. 독일어로 '사고하다'는 'denken', '감사하다'는 'danken' 인데, 하이데거는 이 두 가지 뜻을 모두 전하는 "사고한다는 것은 감사한다는 것이다" 라는 문구를 사용합니다. 이것은 하이데거가 처음 말한 것이 아니라, 프로테스탄트 경건파에서 사용했던 문구 같습니다. 그런 '사고의 경건'에 대한 헌신이 본질적으로 '정신'의 해방이라든가 부활에 관련된 문제라고 한다면, 여기에서도 얘기가 크게 달라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