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셸 푸코, 『주체의 해석학』 요약

대학교 문화철학 과목에 기말 레포트로 제출한 글입니다.

1. 서론
푸코는 『주체의 해석학』의 마지막 강의의 전반부에서 자신이 이번 학기의 강의에서 ‘기예(τέχνη)가 시련으로 점차 변화되고 재구축되는 과정’(478)에 대해서 설명하려고 했다고 이야기한다. 이를 ‘하이데거에게 대상 인식은 서구 기예의 기반 위에서 존재 망각에 도장을 찍었다. 이제 질문의 방향을 바꾸어, 어떤 기예의 기반 위에서 서구적 주체가 구성되었으며, 주체를 규정하는 진실 · 오류 · 자유 · 예속의 놀이가 시작되었는지 물어볼 필요가 있다’는, 1980년 9월에 푸코가 쓴 노트와 겹쳐 읽는다면, 푸코가 수행하고자 한 작업은 자기인식(γνῶθι σεαυτόν) 배후에 있는 자기 배려(επιμελεια εαυτου)가 망각되고 ‘자기 인식만을 그 자체로 고찰할 때에 창시되는 날조된 철학사’와 대결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고전기 그리스부터 ‘데카르트의 순간’ 이전까지, 주체가 진실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주체의 내적 변형이 필요하다고 여겨졌으며, 따라서 자기 인식은 자기 배려의 기예들이 필요하였기 때문이다.

푸코는 자기 배려의 역사를 조망하며 이중의 운동을 발견한다. 첫째로는 생(βίος)이 기예의 상관물이기를 멈추고, 단련(epreuve), 즉 경험과 수련의 상관물이 되는 운동이고, 둘째로는 세계가 경험과 수련의 장이 되기 위하여 ‘기예에 힘입어 인식되고, 측정되고, 제어되기 위해서 그 자체로 사유되기를 멈추는’(513) 운동이다. 푸코는 전자를 서구 사유에 고유한 주체성의 형식을, 후자를 서구 사유에 고유한 객관성의 형식을 구축한 운동으로 본다.

필자는 푸코가 3월 24일 강의에서 고찰한 내용을 기반으로 하여, 『주체의 해석학』의 내용 전체를 ‘이중의 운동’ 위에서 재구성하고자 한다. 첫째로 플라톤의 상기 모델과 헬레니즘 모델, 그리고 알키비아데스와 세네카의 자기 배려의 차이점을 중점적으로 고찰함으로써 생이 기예의 상관물에서 단련의 형식으로 이행하는 과정을 살펴 보고, 그 이후 스토아주의자들의 수양(μάθησις)와 수련(ἄσκησις) 개념에 대한 푸코의 해석을 살펴보며 세계가 어떻게 ‘인식의 대상으로 부여되고, 주체가 자기 자신으로 드러나는 장소’가 되는지에 대하여 논의하고자 한다.

2. 자기 배려의 변화
델포이 신전에는 신탁을 들으러 온 사람을 향한 격언이 세 개 적혀 있었다. ‘너 자신을 알라’(γνῶθι σεαυτόν), ‘도를 넘어서지 말라’(μηδὲν ἄγαν), ‘약속은 불행을 가져온다’(Ἐγγύα πάρα δ' Ἄτα)가 그것인데, 이는 도덕률로 해석되어서는 안 되며, 신과의 상담 행위, 혹은 진실로의 접근에 있어서 지켜야 할 규칙과 권고에 가깝다. 따라서, ‘너 자신을 알라’는 것은 자기 인식(connaissance de soi)에 대한 격률이 아니라, 우리의 유한성을 상기하고 신의 힘과 대적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푸코는 γνῶθι σεαυτόν이 출현할 때 ‘아주 의미심장한 방식으로 이 격언이 자기 배려와 연결되고 접합된다’(44)고 이야기한다. 즉, 자기 인식은 ‘자신을 망각하지 말고 돌보며 배려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자기 배려의 한 양태이다.

푸코는 자기 배려에 세 가지 양태가 있다고 이야기한다. 첫째로 ‘자기 자신과 타인 그리고 세계에 대한 태도’(53), 둘째로 ‘시선을 외부에서부터 자기 자신으로 돌리는 것’(53), 그리고 셋째로 ‘자기 자신을 정화하고 변형하고 변명하는 행위’(54)가 그것이다. 주체는 자기 배려를 통하여 진실에 접근할 수 있는 형태로 스스로를 정화하고 변형시키며, 또한 이렇게 얻은 진실은 다시 스스로를 변형시키는 원환의 형태로 주체의 운동은 완결된다.

『알키비아데스』에서 알키비아데스는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바 이상의 것’, 즉 아테네를 통치하지 못할 바에는 차라리 오늘 죽겠다고 이야기한다. 알키비아데스는 ‘시민들과의 화합이 지배적일 때 국가는 잘 통치된다’고 이야기하지만, 정작 화합이 무엇인지 대답하지 못하는 자기 자신을 보며 절망에 빠진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수치스러운 무지 속에 있다는 것과,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는 사실을 50세에 깨달았다면 그것을 치유하기는 매우 어려울 것이지만, 알키비아데스는 자기 배려를 깨달을 적정한 나이에 있다’고 위로한다.

독자는 『알키비아데스』를 분석함으로써 소크라테스 시기의 자기 배려 모델의 특징들을 얻어낼 수 있다. 첫째로, 자기 배려는 소수의 특권층, 예를 들어서 부유한 가문의 자제인 알키비아데스 등의 전유물이다. 이는 토지를 경작하는 일을 노예들에게 맡기고, 스스로를 돌보는 일에 몰두하는 스파르타인들에서도 관찰할 수 있다. 둘째로, 자기 배려는 통치의 대상을 자신에서 타인으로 전환하는 데에 필요하다. 타인에 대한 통치는 자기에 대한 통치를 전제하기 때문이다. 셋째로, 자기 배려는 배워야 할 결정적인 시기를 가진다. 자기 배려는 정치에 대한 교육이 가장 필요한 동시에, 연인들에게 버림받을 나이인 청년기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한편으로 헬레니즘 시대에 자기 배려는 크게 바뀌게 된다. 첫째로, 자기 배려는 특권층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으로 필요한 것이 된다. 예를 들어서, 스토아 철학자 중 에픽테토스는 노예였으며, 세네카는 황제의 스승이었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로마 제국의 황제였다. 둘째로, 자기 배려의 궁극적인 목적은 자기 자신이 된다. 셋째로, 자기 배려는 ‘평생을 걸쳐 자기 자신을 목적으로 행해지는 생활의 기술(l'art de vivre)’(118)이 된다. ‘자기 배려는 인생 전반에 걸쳐 실천되어야 하는 원리’(124)이므로, 세네카는 ‘자기 배려의 최고 도달 지점이자 보상의 순간은 노년’이라고 이야기한다.

3. 첫 번째 운동: 생의 변화
푸코는 소크라테스의 시대에 기예의 대상이었던 생이 헬레니즘 시대에는 시련의 계기가 되었다고 이야기한다. 필자는 이를 2절에서 논의하지 않은 소크라테스 시기와 헬레니즘 시대의 자기 배려 개념이 맞이한 또 다른 변화, 즉 ‘자기 배려가 자기 인식이라는 유일한 형식 내에서 결정될 수 없게 된’(119) 사실에 비추어 독해하고자 한다. 소크라테스 시기를 대표하는 플라톤의 상기설은 자기 배려와 자기 인식이 맞닿아 있는 부분에 위치하지만, 헬레니즘 시대에 이르면 자기 배려는 구원, 선택, 심지어 좋은 삶(εὐδαιμονία)와도 관련되기 때문이다.

플라톤과 헬레니즘 시대의 생의 양태의 변화를 살펴보기 위해서, 우선 전향(conversion) 개념의 형태가 어떻게 변화하였는지에 대해서 관찰할 필요가 있다. 플라톤에게서 전향 개념은 되돌아옴(ἐπιστροφή)의 형태를 띠었다. 되돌아옴이란 첫째로 가시계를 우회하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서, 『국가』에서 스승이 역할이란 ‘앎이 없는 혼에 앎을 넣어주는 것’이 아니라, ‘혼에 내재하는 능력과 지적인 기관 또한 실재와 실재 중에서도 가장 밝은 것[좋음의 이데아]을 관조하며 이를 견뎌낼 수 있을 때까지 생성의 세계에서 실재의 세계로 [강제로] 전향시키는 것’으로 정의된다. 둘째로, 되돌아옴은 알키비아데스처럼 자신의 무지를 깨닫고 스스로를 돌보기로 결심하여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는 것을 의미한다.

이 되돌아옴을 완수하고 실현하는 궁극적인 운동은 상기이다. 상기는 세 계기를 통하여 전개된다. 처음으로, 스스로를 돌보아야 한다는 것을 깨닫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이 무지하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알키비아데스』에서 알키비아데스는 화합이 무엇인지 설명하지 못하는 자기 자신에 실망하고 스스로를 돌보겠다고 마음먹는다. 소크라테스는 첫 번째 계기를 촉발하기 위하여 문답법(ἐλέγχως)을 활용한다. 『메논』에서 메논은 소크라테스의 문답법이 전기가오리 같다고 불평하는데, 왜냐하면 접촉하는 것을 항상 마비시키는 전기가오리처럼 소크라테스의 논변도 자신의 영혼과 입을 다 마비시키며,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모르게 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해를 입히는 일은 아닌데, 왜냐하면 문답 이전에는 알지 못하는 어떤 것을 안다고 생각했고, 그랬기에 대담하게 대답하며 난관에 빠져 있다는 것을 알지도 못하였으나, 이제는 난관에 빠져 있다고 믿으며 알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듯이 알지 못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 계기는 무지를 발견함으로써 스스로를 돌볼 필요를 느끼게 되고, 따라서 자기 자신을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영혼은 인식의 거울 속에서 자기 자신을 응시해야 한다. 세 번째 계기는 자기 배려와 자기 인식의 접점에 위치한다. 영혼은 자신이 전생에 저승(ᾍδης)에서 보았던 ‘있는 것들’(τα ἐόντα)을 다시 인식한다. 이 운동 속에서 자기 인식 · 자기 배려 · 진실 인식 · 존재로의 회귀가 한데 모이게 된다(287).

한편으로 헬레니즘 시대에서 전향은 플라톤의 되돌아옴과 크게 세 가지 차이점을 갖는다. 첫째로, 전향은 이승과 저승, 실재와 생성, 가시계와 가지계의 구도 속에서 전개되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내재성 속에서 행해진다. 플라톤의 되돌아옴이 우리를 가시계에서 가지계로 인도하는 것에 반해, 헬레니즘 시대의 전향은 우리를 우리의 소관이 아닌 바에서 우리의 소관인 바로 인도한다. 둘째로, 플라톤의 되돌아옴이 『파이돈』에서 보이듯이 영혼의 감옥인 육체로부터 육체의 완전한 해방인 것에 반해, 헬레니즘 시대에는 영혼과 육체의 적절한 관계 설정이 목표가 된다. 셋째로, 헬레니즘 시대에 인식은 결정적인 계기의 역할을 수행하지 않는다. 전향에서 근본적인 요소는 자기 인식이 아니라 수련이 되기 때문이다.

플라톤에 의하면, 영혼은 불멸할 뿐 아니라 여러 번 태어나고 여기 지상뿐 아니라 하데스에 있는 이 모든 것들을 보았으므로 배우지 않은 것은 없으며, 자연은 같은 혈통이고 영혼은 모든 것들을 배웠기 때문에 단 하나를 상기한 사람이 나머지 모든 것들을 스스로 발견하지 못할 이유는 전혀 없다고 이야기한다. 스승은 제자가 자신을 배려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자인데, 그것은 상기의 첫 번째 계기, 즉 문답을 통하여 자신의 무지를 발견하게 함으로써 자기 자신의 인식을 촉발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스승에 의해 자기 배려를 하게 된 제자는 정화의 의식, 영혼의 집중, 은둔, 인고의 실천 등의 자기 배려의 기예들을 사용하여 자신이 전생에서 배운 앎들을 다시 습득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의 궁극적인 목표는 상기를 통하여 앎을 되찾아 국가를 통치하기에 적합한 철인이 되는 것이다. 이때 생은 자기 배려의 기예의 대상이다. 문제시되는 것은 오직 주체가 앎을 상기하는 것이며, 상기하기에 적합한 영혼의 상태를 만들기 위해서는 일련의 기예들을 사용하여 주체를 변형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파이돈』에서 철학자라면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히려 반겨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생은 그 자체로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기예를 통하여 진정한 앎을 상기하려고 할 때에 행복해지며 의미를 갖는다.

한편으로 헬레니즘 시대에 생은 하나의 예술 작품이 되며, 자기 배려의 궁극적인 목적은 잘 사는 것, 즉 생 자체가 된다. 그러므로 자기 배려는 앎과 멀어지고, 생활의 기술에 가까워진다. 요컨대, 스토바이오스는 ‘그들[스토아주의자들]은 행복한 것이, 그것을 위해서 모든 것이 행해지는 목적이라고 이야기한다’고 논평한다. 이는 두 가지 현상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첫째로, 자기 배려의 비판적 기능이 강조되며 교육적인 요소가 비판의 실천과 연관된다. 세네카는 ‘자기 실천을 통해 우리 내부에 있는 악을 추방하고, 정화하고, 지배하고 또 악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도록 정진해야 한다’(132)고 썼다. 악은 교육이 아니라 수정되어야 하는 것이고, 이는 ‘유모의 일차적 교육, 가정에서 전승하는 모든 가치, 그리고 수사학 선생들’을 정화해야 함을 의미한다(134). 둘째로, 자기 실천은 의학의 모델과 가까워진다. 사람들은 아플 때 의사를 부르는 것처럼 철학자를 부르며, 에피쿠로스주의자들과 스토아주의자들이 사용하는 단어인 파토스(πάθος)는 정념이자 병이라는 뜻을 동시에 가진다.

푸코는 소크라테스의 시대에서 초기 제정 시대로 넘어가며 생의 기술과 자기 배려 사이에서 일종의 ‘역전과 비틀림’이 나타난다고 이야기한다. 자기 배려는 상기를 통하여 앎을 얻는 삶의 기술, 혹은 철인이 되어 아테네를 통치하기 위한 수단이 되기를 멈추고, ‘삶의 기술 전반을 처음부터 끝까지 관통하고 지배하며 지탱할 뿐 아니라, 삶의 기술(τέχνη του βίου)이 이미 독자화된 자기 배려의 범위 내로 완전히 들어오게 된다’(475). 인간은 타인을 지배하기 위해서, 혹은 잘 살기 위해서 자기를 배려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 적절한 관계를 맺기 위해서 자기를 배려하는 것이며,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이다. 즉, 생은 다른 목적을 위하여 조작되거나 변형되는 기예의 대상이기를 멈추고, 그 자체를 위해, 그리고 자기 자신과 적절한 관계를 맺기 위해 수련하고 사는 목적이 된다.

4. 두 번째 운동: 세계의 변화
첫 번째 운동에서 기예의 상관물이었던 생이 그 자체로 사유가 되기 시작하였다면, 두 번째 운동은 정반대의 운동, 즉 그 자체로 사유가 되던 세계가 기예의 상관물로써 사유가 되기 시작하는 운동이다. 세계는 생에 있어서 단련의 장으로 주어지는데, 이는 두 가지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 첫째는 경험이라는 의미에서의 단련, 즉 우리 자신을 우리에게 드러내는 장으로서 세계가 주어짐을 의미한다. 둘째는 수련이라는 의미에서의 단련, 즉 우리 자신이 스스로를 형성하고 변형시키며 완성하는 쪽으로 나아가는 장으로서 세계가 주어짐을 의미한다.

세네카는 『자연의 의문들』에서 자기에 대한 예속을 우리가 지양하고 맞서 싸워야 할 바로 제시한다. 우리는 우리에 대한 예속과 맞서 싸우기 위해 두 가지 전략을 수립할 수 있다. 첫째로, 자기 자신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는 것을 멈추는 것이다. ‘자기 자신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는 것’이란, 여러 가지 외적 이익이 되는 일을 하느라 스스로를 혹사하는 것을 의미한다. 둘째로, 한 일에 대한 보상을 바라지 않는 것이다. 자기 자신에 대한 예속성은 책무-채무의 논리와 결부되어 있으므로, 세네카는 자기 자신을 이윤에 결부시키는 행위를 멈추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전략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어떤 활동을 해야 하는가? 세네카는 자연에 대한 연구를 통해 우리가 책무-채무의 체계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304).

세네카는 철학을 두 가지로 구분한다. 첫째로는 인간과 관련되며 인간을 돌보는 철학이고, 둘째로는 신들을 응시하며 하늘에서 일어나는 바를 논하는 철학이다. 세네카는 루킬리우스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우선 자기 자신을 성찰하고, 세계를 성찰하라고 한다. 인간에 대한 성찰은 하늘에서 일어나는 바를 성찰함으로써 완결되기 때문이다.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인간을 성찰하는 철학의 물음은 인생의 길을 밝히는 빛을 우리에게 가져다 주지만, 우리는 이 빛을 인생의 길을 밝히는 데에 사용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그 빛의 발원지로 우리 자신을 인도한다. 이로써 우리는 신의 이성의 형식에 도달하며 신과 속성을 공유하게 된다. 이 운동은 상기를 통하여 이승 세계를 벗어나는 데에 목적을 두는 플라톤주의 모델과는 달리, 우리 세계로부터 눈길을 떼지 않으며 상승함으로써 우리가 사는 세계를 관조한다.

그렇지만 역설적으로 우리가 자연의 비밀을 파악하는 바로 그 순간, 우리는 인간의 사소함도 파악하게 된다. 우리가 소중하다고 여기던 것들이 얼마나 사소한 것인지 깨닫게 되며, ‘인간이 개조한 가식적인 화려함’을 경멸하게 된다(308). 세계를 굽어보는 우리의 시선을 통하여, 세계 속에서 우리의 본래적 실존의 양태가 우리에게 현시된다.

한편으로 세계는 우리가 끊임없이 수련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고대 그리스 시대의 시련은 인간과 신의 대결에서 나타나는 ‘불행의 총체’였다. 이 때에 인간은 신과 화해함으로써 위대해진다. 푸코가 분석의 대상으로 삼는 두 텍스트는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와 『오이디푸스 왕』이다. 오이디푸스는 신에게 끊임없는 시련을 겪은 뒤에, 결국에는 패배한 후 신과 화해하게 된다.

그렇지만 스토아주의자들, 특히나 세네카와 에픽테토스에게 시련은 신이 인간에게 내리는 불행이 아니다. 오히려, 신은 자신의 자비심에 따라 시련과 불행을 배열한다. 신은 선한 사람들 주변에 시련을 놓음으로써 자기 자신을 위해 그들을 준비하게 만든다. 세네카에게 ‘인생은 준비다’라는 것은 중요한 테마이지만, 무엇을 위한 준비인지는 명확하게 제시되지 않는다. 시련은 또한 식별의 과정이기도 하다. 시련에 대비하기 위해 스스로를 배려할 수 있는 사람은 소수이다. 에픽테토스는 ‘소크라테스에게 온 사람들 중, 자기 배려를 하게 된 사람은 천 명 중에 한 명도 안 된다’고 썼다. 즉, 자기 배려와 시련은 ‘자기의 능력을 갖춘 자와 그렇지 않은 자의 실행적 분할’을 통하여 탁월한 자와 그렇지 않은 자를 구별해내는 분할이다(156). 요컨대 세계 자체가 신이 준비시킬 가치가 있는 자들을 선별하는 동시에, 그런 자들 주변에 시련을 놓아서 준비하게 만드는 장이다.

그렇다면 자기 배려와 시련은 정확히 어떤 방식으로 관련되는가? 헬레니즘 시대 자기 배려의 양태인 수련은 장비(παρασκευή)를 그 임무, 전술, 도구로 삼는다(348). 장비의 정의 중 푸코가 인용하는 것은 세네카가 인용하는 견유주의자 데메트리우스의 것이다. 훌륭한 운동선수가 하는 훈련은 가능한 모든 동작을 연습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마주칠 수 있는 것에 대해서 대비하는 것이다. 따라서 훌륭한 운동선수의 훈련은 기초적이되, 가능한 모든 상황에 필요한 것이어야 한다. 이와 유사하게,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생활의 기술은 춤보다는 격투기와 비슷한데’, 왜냐하면 ‘항시 경계 태세를 할 필요가 있고, 갑작스럽게 엄습할 수 있는 타격들에 대해 평형을 유지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349). 이때 장비는 담론(λόγοι)으로 구성된다. 충분한 장비를 갖추고 준비된 운동선수는 단순히 지침을 아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각인하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λόγοι는 단순히 명제들로 이루어진 장비가 아니라 물질적으로 실존하는 언표이며, 담론을 소유한 사람이 자발적으로 행위를 하게끔 하는 도식이다.

장비를 갖추기 위한 수련은 크게 사유 상의 훈련인 명상(μελετᾶν)과 실제적인 시련인 훈련(γυμνάζειν)으로 구분된다.

명상이란 사유를 자기화하기 위한 훈련이다. 그것은 단순히 텍스트를 이해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사유를 자기화하여 깊게 확신하고 필요할 때 언제든지 회상할 수 있는 형식으로, 즉 자신의 수중에 지닐 수 있도록 진실을 정신에 새기는 활동이다. 명상의 또 다른 양태는 사유 자체가 아니라, 사유가 되는 사물이 문제가 되는 훈련이다. 이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죽음에 대한 명상(μελετη θανατου)이다. 스토아주의자들에게 있어서 죽음에 대한 명상의 특권적 형식은 praemeditatio malorum, 즉 우리가 생의 마지막 날을 살아간다고 생각하는 훈련이다. 이 훈련에서 중요한 점은 단순히 ‘오늘 내가 죽을 수도 있겠구나’라는 가능성을 상상하는 것이 아닌, 하루하루가 실존의 마지막 순간인 것처럼 하루를 체험하는 것이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이는 첫째로, 현재에 대한 굽어보는 시선을 가질 수 있게 해 주며, 둘째로 매 순간 죽기 위해 최선의 상태를 유지해야 함으로써 ‘모든 경박성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 준다’고 쓴다(505).

한편으로 훈련이란 실제 상황과 대면하는 것이다. 푸코는 훈련을 두 가지, 즉 금욕 체제와 시련의 수행으로 구분하고자 하는데, 그는 이 두 개가 임의적이고 배타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푸코는 금욕 모델을 설명하기 위하여 무소니우스 루푸스의 『자기 수련에 관하여』를 참조한다. 그는 덕이 능동적으로 되려면 신체를 거쳐 가야 한다고 이야기하면서, 자기 신체를 돌보아야 하는 필요성을 강조한 후 세 가지 시련을 제시한다. 신체의 수련, 영혼의 수련, 그리고 신체와 영혼의 수련 중 푸코가 주목하는 것은 신체와 영혼의 수련인데, 이는 용기(ἀνδρεία)와 절제(σωφροσύνη)를 기르는 것을 목표로 한다. 용기는 우리에게 외부 세계로부터 오는 것을 견딜 수 있게 해 주며, 절제는 우리 자신의 동요를 제어할 수 있게 해 주는 것이다.

시련의 수행은 금욕과 세 가지 점에서 구분된다. 첫째로, 시련은 자기 자신에 대한 점검을 수반한다. 둘째로, 시련은 고의적인 결핍인 절제와 달리 자기 자신이 하는 바와 자기에 대해 양식 있고 의식적인 일정한 태도를 취하는 것이다. 셋째로, 절제는 생활 속에 국한된 것이고, 시련은 현실에 직면한 일반적인 태도이다. 즉, 생애 절반이 시련이 되어야 한다(457 – 458). 푸코는 시련의 예시로 분노와 싸우기 위하여 화를 내지 않는 기간을 하루씩 늘려가는 에픽테토스와 플루타르코스의 수행이나, 젊고 아름다운 여자를 보았을 때 행동하지 않는 것은 물론, 부정한 생각 자체를 하지 않는 것을 예시로 든다.

세계는 그 자체로 사유가 되기를 멈추고, 우리가 굽어봄으로써 우리 자신을 다시 발견할 수 있는 경험의 장이나, 우리를 끊임없이 단련시키고 수련시키는 시험의 장소가 된다. 세계가 우리에게 주는 시련은 더 이상 신과 우리의 대결의 산물이 아니라, 신이 우리에게 더 좋은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해서 준비시키는 것이 되며, 이떄 세계는 우리를 교양시키는 시련의 장, 혹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교양하기 위하여 ‘상당수 기재와 목표들에 힘입어 인식되고, 측정되고, 제어되기 위해’ 고찰되고 조작되는 것이다(514).

5. 결론: 푸코 대 철학사
그렇다면 푸코가 고전기 그리스 시대에 일어난 두 가지 운동 – 생과 세계의 운동 –을 분석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수행하고자 하는 작업은 무엇일까? 푸코는 3월 24일 강의의 전반부에서 자기 배려가 망각되고 자기 인식이 특권화된 날조된 철학사가 유포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자기 배려를 배제하고 자기 인식만을 고찰한다면, 우리는 한편으로 플라톤에서 데카르트를 거쳐 후설에 이르는 자기 인식의 연속적인 발전을 그리는 전통적인 – 날조된 – 철학사를 얻을 수밖에 없다. 푸코가 『주체의 해석학』에서 행하고자 하였던 작업은 자기 배려의 토대에 자기 인식을 위치시키고, 자기 배려가 늘 자기 인식의 원칙을 수반하였음을 보이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전략 속에서 푸코가 추출한 것은 이중의 운동, 즉 생과 세계의 운동이었다. 푸코에게 있어서 서구 사유에 고유한 주체성의 역사는 생의 운동을 고찰하지 않고는, 그리고 서구 사유에 고유한 객관성의 역사는 세계의 운동을 고찰하지 않고는 제대로 사유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즉, 그동안의 서양 철학사는 ‘자기 배려 망각’의 서양 철학사이고, 푸코는 자기 배려를 복권해, 본래적인 철학사를 그리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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