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저, 『헤겔』 - 4장

제 메인 공부 끝나고 남는 시간에 읽을 계획이었는데, 바이저 책이 생각보다 시간을 많이 잡아먹네요 :sweat_smile:

4장 유기체적 세계관(115-149)

유기체적 차원
헤겔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유기체적 세계관을 펼친다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 그는 유기체적 은유를 사용하고, 또 그의 모든 사유는 우주를 단일하고 광대한 살아 있는 유기체로 보는 관점에서 나온다. 헤겔의 체계가 유기체적 개념으로 둘러싸여 있는 것은 그의 자연주의(모든 것은 자연의 부분이고 자연은 유기체이기에, 모든 것이 자연이라는 유기체의 부분으로 제시되어야 한다)에서 유래한다. 그가 말하는 ‘절대자’와 모든 살아 있는 것은 발전되지 않은 초기의 통일에서 시작해 그 자신을 분리된 기능들로 분화시키며, 이 기능들을 단일한 전체로 다시 통합한다. 헤겔이 유기체적 세계관을 펼쳤으며 그것이 헤겔 체계 내에서 중요하다는 점은 이하의 사실들에서 확인된다.
첫째, 대립물들의 통일, 변증법, 구별 내의 동일성과 같은 헤겔의 중심 개념들은 유기체적 관점의 중요성을 드러낸다.
둘째, 헤겔의 어휘 자체에서도 그가 유기체적 세계관을 펼쳤음이 드러난다. 예컨대, ‘즉자적’은 ‘다른 사물에 대한 관계로부터 분리되어 그 자체로 있는 어떤 것’을 의미하면서도 ‘가능적이고 발전되지 않은 채 막 발전하기 시작하는 어떤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대자적’은 ‘자기 의식적인 어떤 것’을 의미하는데, 동시에 ‘목적들을 위해 행위하여 조직화되고 발전된 어떤 것’을 뜻하기도 한다.
셋째, 절대적 관념론의 기본적인 두 측면인 일원론과 관념론은 유기체론을 전제한다. 일원론은 정신적인 것과 물리적인 것 등이 다만 발전의 상이한 단계들이나 살아 있는 힘의 조직화의 정도일 뿐이라는 유기체론에 근거한다. 관념론은 자연과 역사 속의 모든 것이 목적이나 종말에 따른다는 유기체론에 근거한다.

헤겔은 자연에 대한 낡은 패러다임인 기계론적 세계관이 ①생명체의 자기-발생적이고 자기-조직적 측면과 ②생명체가 전체가 부분들에 선행하는 총체성이라는 특징을 지닌다는 점을 설명하지 못해, 생명을 이해할 수 없게 만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생명을 이해하는 사유 방식을 발전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논리학>을 서술했고, 기계론에 맞서 유기체론을 펼친다.

유기체론의 부상
헤겔의 유기체적 세계는 대단히 사변적이고 경험적 증거를 넘어서는 과감한 비유와 일반화를 시행한 결과로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일부 학자는 그의 유기체론을 던져버려야만 헤겔 철학의 가치를 현대에도 보존할 수 있을 것이라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비방은 헤겔의 시대를 파악하지 못한 탓에 발생한 시대착오적 오류일 뿐이다. 헤겔이 살던 18세기에는 철학과 과학이 날카롭게 구분되지 않았으며, 자연철학의 유기체적 자연 개념은 가장 훌륭한 과학적 세계관이자 사실들을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이론으로 여겨졌다. 앞서 말했듯이, 기계론적 세계관이 문제에 부딪혔기 때문이다. 기계론적 세계관이 봉착한 주요 문제들은 다음과 같다. ①기계론적 세계관은 원격 작용을 함축하는 듯한 중력의 인력을 설명하지 못한다. ②기계론은 중력의 인력을 설명할 수 없기에 전기와 자기도 설명할 수 없다. ③화학의 발전에 따라 물체는 전기력과 자기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으로 제시됐으나 기계론은 물체를 설명하지 못한다. ④기계론은 전성설과 결합했는데, 그에 반대하는 후성설이 부상했다. ⑤기계론은 인간 행동을 잘 설명할 수 없다.

유기체론은 기계론과 달리 생명과 정신에 대해 비-환원적이면서 자연주의적 설명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호소력을 갖췄다. 유기체론의 핵심은 라이프니츠 전통에 의존하여 물질의 본질을 그 자신을 운동으로서 표현하는 능력(힘)으로 설명한다는 점이다. 유기체론에 따르면 주관적인 것이나 정신적인 것은 단순히 활력의 조직화와 발전의 최상의 정도인 데 반해, 객관적인 것이나 물리적인 것은 단순히 조직화와 발전의 가장 낮은 단계일 뿐이다. 유기체론은 정신은 내면화된 활력으로, 물체는 외면화된 활력으로 설명했다.

고전적 기원과 기독교적 기원
헤겔의 유기체적 세계관은 플라톤의 <티마이오스>에서 영감을 얻은 것으로 보인다. 거기서 세계는 ‘단일한 가시적인 생명체’, ‘그 자신 안에 살아 있는 모든 것을 포함하는 하나의 생명체’로 그려진다. 이러한 묘사에 의하면 세계는 일종의 큰 인간이다. 이외에도 몇 가지 영감을 제공한 것들이 있으나, 그의 유기체적 개념의 직접적 기원은 사실 철학이 아닌 종교이다. 그는 <요한복음>이 ①삼위일체 개념(유기체의 부분들 그 자체가 유기체들인 것과 마찬가지로 삼위일체의 각각의 위격도 개별 인격이다)을 제공하며 ②개체와 자연 사이의 소외 극복을 제시하는 텍스트로 보았다. 이런 영향 아래에 그는 신비적 차원을 강조하며 <기독교의 정신>을 집필한다. 그는 무한한 유기체적 전체 개념 파악과 논증을 넘어선 것이라며, 그것은 논리적 술어로 표현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나아가 헤겔은 전체로서의 세계인 무한자가 신앙의 대상일 수밖에 없고, 철학의 유일한 역할은 신앙의 여지를 마련하기 위해 유한성의 형식을 비판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는 1800년 말에 이르러 개념적 논변의 한계를 지적하지 않고, 신앙의 대상이었던 무한자를 이성의 대상으로 여긴다. 특히 그의 <독일의 헌법> 서론의 초고였을 단편은 그의 유기체적 세계관이 신비주의보다는 형이상학에 더 잘 뒷받침된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는 형이상학이 현대 문화의 모든 대립을 극복하는 좀 더 전체론적인 삶을 명시적이고 자기 의식적으로 만드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구체적으로 헤겔은 체계로서의 형이상학이 ①삶의 오랜 형식들 각각에 대해 그것들을 전체에 필요한 부분들로 보존함으로써 그들의 마땅한 몫을 부여하고 ②그것들의 내적 모순을 드러냄으로써 잘못된 보편성 주장을 일소함으로써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고 믿었다,

스피노자의 유산
헤겔은 유기체적 세계관을 이성적으로 파악하는 형이상학을 펼치기 위해 스피노자주의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가 스피노자주의를 완전히 받아들이지는 않았고, 그것의 커다란 두 측면을 비판하기도 했다. 그는 스피노자주의의 기하학적 방법은 오랜 이성주의의 죽어버린 잔존물이라고 비난하고, 스피노자가 데카르트의 설명 방법과 물질 개념을 받아들였기에 그가 제시한 보편적 실체는 사실상 거대한 기계에 불과하다고 비판했다. 그래서 헤겔은 스피노자 철학을 받아들이면서도 자신이 비판한 지점을 극복해야만 했다. 즉, 결국 그는 자신의 유기체적 전망을 위한 새로운 토대를 발전시켜야만 했다. 무엇보다 그는 자신이 보기에 스피노자가 결국 해결하지 못한 문제, 즉 유한한 사물이 존재할 수 있는 이유를 잘 설명해야만 했다.

스피노자가 해결하지 못한 문제는 ‘무한자와 유한자는 통일되어야만 하지만 통일될 수 없다’라는 문장으로 정식화될 수 있다. 둘은 통일될 수 없는데, 둘은 대립하는 특성을 지니니 둘이 통일된 하나의 실체는 자기 모순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둘은 통일되어야만 하는데, 무한자가 유한자를 배제하게 되면 그것은 무한자가 아니게 되기 때문이다.
실은 이 딜레마는 헤겔뿐만 아니라 셸링도 예나 시기에 부딪혔던 문제이기도 했다. 그러나 헤겔이 보기에 셸링의 제시한 문제 해결책은 매우 엉망이었는데,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헤겔이 꺼내든 수단이 유기체적 세계관이다. 만약 절대자가 생명으로서 파악될 수 있다면, 그것은 유기체적 발전이 자기 분화에 존재한다는 단순한 이유에서 자기 내에 유한성과 차이를 포함한다. 생명은 통일성으로부터 차이로의, 차이로부터 차이 내의 통일성으로의 운동으로 설명될 수 있다. 이렇게 단일한 보편적 실체인 무한자를 유기체로 파악하게 되면, 그것은 정태적인 것이 아닌 영원히 운동하고 발전하는 것으로 이해되기에 헤겔 본인이 스피노자를 비판했던 지점을 극복할 수 있다.

칸트의 유산과 도전
헤겔의 유기체 개념은 칸트가 <판단력 비판>에서 개진한 ‘자연 목적’ 개념에 대한 분석에 빚지고 있다. 칸트에 따르면 자연 목적은 두 개의 규정적 특성을 견지한다.
첫째, 전체의 관념은 그것이 부분들 각각의 동일성을 규정한다는 의미에서 부분들 모두에 선행한다. 칸트에게 유기체적 전체는 단지 부분들 이상의 것이 아니라 부분들의 원천 혹은 기초이다. 이러한 점을 칸트는 ‘분석적 보편(합성체: 부분이 전체에 선행하고 그로부터 독립된 동일성을 지님)’와 ‘종합적 보편(전체: 전체가 부분에 선행하며 그것들 각각을 가능케 함)’으로 나누면서 구체화한다.
둘째, 부분들은 서로의 원인이자 결과이다. 이 덕분에 유기체는 자기-발생적이고 자기-조직적 특징을 지닌다고 논할 수 있다.

헤겔을 비롯한 낭만주의자들은 위 논의를 받아들여 유기체적 자연 개념에 관해 쓸 때 합성체가 아닌 전체를 염두에 두며, 유기체는 물질과 다른 무언가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개념 설명에도 불구하고, 칸트의 것은 유기체적 자연 개념을 설명하기에 불충분하다. 비록 자연 목적이 유기체의 구조를 규정한다고 해도, 세계 전체도 그러하다는 설명이 덧붙여져야 한다. 그래서 칸트는 각 유기체가 목적인을 가진다면 그것들은 더 광범위한 유기체의 부분이 되어 보편적 유기체 관념을 포함하는 목적들의 체계에 편입할 수 있다고, 우리가 유기체 관념이 전체로서의 자연에 적용되도록 그것을 일반화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칸트는 보편적 유기체 이념이 예지적인 것과 현상적인 것 사이의 대립에 다리를 놓을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 점에도 헤겔을 비롯한 낭만주의자들은 매혹됐다. 왜냐하면 그것은 목적(이념적 요소)은 물질(질료적 요소)에 외재적이지 않은 것이자 활동성의 원천으로 제시되기 때문이다.

나아가, 칸트는 <판단력 비판> 내내 유기체의 이념이 단지 규제적 지위만을 지닌다고 주장한다. 칸트의 주장은 다음 셋을 핵심으로 한다.
첫째, 우리는 자연의 대상들이 실제로 목적에 합치하는지를 알 수단이 없다. 우리는 오직 의지와 지성을 갖고 행위하는 존재들의 목적성을 알 수 있다.
둘째, 우리는 오직 우리가 스스로 그리고 우리 자신의 개념에 따라 만들 수 있는 것에 대해서만 완전한 통찰을 지니는데, 유기체들은 우리가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셋째, 생명은 내적 원리로부터 행위할 수 있는 실체의 능력인데, 물질은 그러한 것을 갖지 않고 외적 자극을 통해서만 변화를 일으키기에 물질은 본질적으로 무생명적이다.

그런데 이러한 칸트의 주장을 결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헤겔이 보기에 칸트의 자연 목적 나아가 유기체 이념은 규제적일 뿐 구성적이지 않기에 불충분했다.

칸트에 대한 대답
헤겔과 1790년대의 자연철학자는 칸트가 제시한 유기체적 자연 개념을 옹호하면서도 비판을 거쳐 규제적 수준이 아닌 구성적 수준으로 발전시켜야만 했다. 그의 칸트 비판 및 발전 논리의 핵심은 다음과 같다.
첫째, 자연의 목적이 외부에서 주어진 것이라는 기독교적인 외재적 목적론을 거부하고, 목적들을 자연 그 자체 안에서 관찰될 수 있는 것들에 한정하여 내재적 목적론을 펼친다. 내재적 목적론은 하나의 자연 대상이 목적에 이바지한다고 말할 때 그것의 창조 배후에 일정한 의도가 있다거나 대상 자체 내에 숨겨진 의도가 있다고 주장하지 않고, 단지 대상이 유기체의 구조 안에서 본질적 역할을 한다고 주장한다.
둘째, 물질 자체 안에 그것의 성장을 지도·조직하는 초자연적인 힘인 영혼/정신 따위가 있다는 물활론을 거부하는 동시에, 유기체들의 독특한 구조를 부정하며 지나친 환원주의를 펼치는 유물론을 거부한다. 그러나 칸트의 논증도 이러한 입장이기에 허수아비 때리기이거나 강한 반론이 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칸트와 달리 헤겔과 몇몇 자연철학자들은 그들의 목적론 주장을 경험적으로도 정당화할 수 있다고 여겼다는 점에서 차이를 지닌다. 그들은 18세기 후반 과학적 탐구의 결과로 유기체적 통일성과 자기-조직화에 대한 경험적 증거를 얻게 됐고, 이 증거가 자연에 목적성을 귀속시키기에 충분하다고 주장한다. 반면 칸트는 우리는 유기체적 자연 산물이 사실은 기계적 원인에 의해 작용하는지 아닌지 판단할 수 없다는 이유로 충분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자연철학을 옹호하여
헤겔과 자연철학자의 칸트 비판은 인식론의 영역에서 더 돋보인다. 헤겔의 생각에는 유기체적 개념만이 주관-객관 이원론을 펼치는 칸트(나아가 피히테)의 관념론을 극복할 수 있는 수단이다. 이를 <차이 논문>에서 다룬다. 물론 헤겔은 피히테가 칸트의 이원론을 어느 정도 극복했음을 인정한다. 피히테는 초월론적 자아가 경험의 내용을 창조한다는 주-객 동일성 원리를 펼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전히 주-객 동일성 원리는 자아가 무한한 노력의 과정에서 접근해야만 하는 규제적 이상으로 남겨져 있었고, 일상적 경험에서 뚜렷하게 보이는 주-객 이원론을 설명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였다.
헤겔은 유기체적 개념을 받아들일 경우, 주관적인 것과 객관적인 것을 단일한 생명력의 조직화의 발전의 상이한 수준(생명력의 발전 단계)으로 설명할 수 있기에 칸트-피히테가 마주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보았다.

자연철학에 관한 신화들
헤겔의 자연철학은 그의 형이상학의 가장 나쁜 측면으로 무시되어 왔다. 그는 관찰과 실험의 결과를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이 구상한 자연철학에 과학적 결과를 끼워 맞추는 자로 이해되곤 했다. 하지만 대체로 이러한 것들은 신화다. 그러한 신화들이 거짓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헤겔은 자연철학의 개념적 방법이 관찰과 실험의 대체물이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관찰과 실험의 결과물들을 전제하고 그것들을 조직화·체계화하는 방법으로 자연철학을 개진했다. 심지어 <논리학>에서 헤겔은 과학이 자기 주제의 내적인 논리에 따라 발전하며, 그 원리들이 오로지 그 내적 논리로부터만 도출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다른 분과 학문이 전제하는 원리를 다른 분과 학문에 외삽하는 것을 완고히 거부했다.
둘째, 헤겔이 자연철학이 관찰 및 실험과 구별된다고 주장했을지라도, 그는 철학적 교설이 경험에 충실해야 하고 나아가 경험으로부터 유래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헤겔의 자연철학이 형이상학의 선험적 관심사와 경험과학의 후험적 결과 사이의 구분을 무시하고, 다룰 수 없는 부분까지 손을 뻗쳤다고 비판한다. 하지만 헤겔은 애초에 선험적 판단을 형이상학과 연결하고 후험적 판단을 경험과학과 연결하는 칸트의 구별을 거부한다. 그는 선험/후험 구분이 판단의 종류에 대한 구별이 아니라 우리 지식의 상태에 관련된 구별이라고 보았다. 그러니 이와 같은 비판은 애초에 헤겔이 거부한 칸트의 구별을 참이라고 받아들이고 헤겔을 공박하는 셈이고, 결국 전제 미해결의 오류에 불과하다.
셋째, 헤겔이 고안한 형이상학을 참이라 전제하고 원자론, 기계론, 경험론 등에 반론을 펼쳤으니, 자연과학에 형이상학을 끌어들인다는 비판이 있다. 하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헤겔은 칸트의 구별을 거부하며 형이상학적 물음이 자연과학에서 불가피하다고 보았기에, 이번 비판도 전제 미해결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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