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저, 『헤겔』 - 3장

3장 절대적 관념론(81-113)

형이상학의 문제
헤겔은 형이상학이 철학의 기초 분과라는 전통적 설명을 따랐기에, 헤겔에 대한 해석은 그의 형이상학에 대한 해석에서 시작해야 한다. 그런데 헤겔 연구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도 헤겔 형이상학의 지위이다.

전통적인 해석은 헤겔에 대한 형이상학적 해석을 내놓으며, 거기서 종교가 담당하는 중심적 역할을 강조한다. 최근 헤겔에 대한 비-형이상학적 해석이 제기되곤 했다. 그에 따르면, 칸트 등이 파산했다고 선언한 형이상학을 헤겔이 이어갔을 리가 없다. 이 문제의 중심에는 ‘순수 이성을 통해 무제약자에 대한 지식을 획득하는 시도’라는 칸트가 정의하고 또 파산 선언한 ‘형이상학’이 있다.
형이상학적 해석을 지지하는 근거는 다음과 같다. 헤겔은 철학은 이성을 통해 신을 알고자 한다고 생각하고 또 신을 무제약자라고 이해하기에, 그의 철학은 사실상 칸트적 의미에서 형이상학이라고 결론지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헤겔이 정확히 칸트가 배척한 형이상학을 이어받았다고 주장하는 것엔 오류가 있다. 칸트가 말하는 형이상학이란 ‘초월적 존재자들에 관한 사변’인데, 헤겔은 그러한 초월적이고 순수하게 예지적이거나 초자연적인 것의 실존을 부정했기 때문이다. 헤겔이 ‘무제약자’를 논할 때, 그것은 초월적이지 않고 내재적인 무엇이다.
비-형이상학적 해석은 헤겔이 전통 형이상학을 거부했다는 점에 기초한다. 그러나 헤겔이 초월적인 것을 다루는 형이상학을 포기했다고 하더라도, 그는 여전히 형이상학을 내재적인 것의 학문으로서 추구했기에 형이상학자이다. 헤겔이 형이상학을 비판하는 이유는 그것이 무한자를 일상적 경험의 유한한 세계를 초월하는 어떤 것으로 잘못 해석했기 때문이므로, 그가 다른 의미에서 형이상학을 추구했다면 틀린 설명은 아닌 셈이다. 결국에 비-형이상학적 헤겔은 마치 헤겔이 교조주의자거나 전혀 형이상학자가 아니라는 식의 거짓 딜레마를 제공한 셈인데, 오히려 헤겔은 이 딜레마를 해소하고 싶어 했으며 이를 위해 변증법을 사용했다.

요약하자면, 형이상학적 해석과 비-형이상학적 해석 모두 일부는 맞지만 그대로 수용할 수 없는 난점이 있다. 전자는 헤겔을 형이상학자로 팽창시켜 마치 추상적 존재의 실존을 믿는 플라톤주의자로 만들고, 후자는 헤겔을 수축시켜 마치 보편적인 모든 것을 특수자로 축소하는 유명론자로 만들어버렸다는 문제를 지닌다.
두 해석이 모두 틀렸다는 점은 헤겔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설명을 따라 보편자와 특수자를 이해한 방식에서 드러난다. 헤겔에 따르면 보편자는 설명의 질서에서 앞서며, 특수자는 실존의 질서에서 앞선다고 말한다. 이를 풀어 쓰자면 다음과 같다: ‘보편자가 특수자에 앞선다’라고 할 때 전자는 후자의 ‘원인’이 아닌 ‘이유 혹은 목적’이고, 이러한 이유나 목적은 사물에 ‘앞서’ 실존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의 완전하고 충분한 발전을 통해 그 자신을 구현함으로써 오로지 그 사물을 통해’서만 실존하게 된다. 쉽게 말해, 보편자들의 의미는 오로지 사물들로 환원되지 않으나, 보편자들은 오직 사물들 속에서만 실존한다는 게 헤겔 생각이다.
이렇게 헤겔이 ‘설명의 질서에서 앞서는 것’과 ‘존재의 질서에서 앞서는 것’을 구분했다는 점은 두 해석이 틀린 지점을 명확히 짚어준다. 형이상학적-팽창적 해석은 ‘논리적 선행성’에 ‘존재론적 선행성’이 포함된다고 생각하여 관념이 역사적 세계에서의 구현에 앞서 그 자체로 실존한다고 여기는데, 이는 헤겔이 거부하는 바이다. 비-형이상학적-수축적 해석은 관념은 그 자신이 속해 있는 특수한 사물들의 총계에 불과하다는 듯이 여기는데, 이 또한 헤겔이 거부하는 바이다.

절대자란 무엇인가?
셸링은 자신과 헤겔이 공동 저술한 작품에서 ‘절대적 관념론’이라는 용어를 사용했고, 그와 헤겔은 1800년대 초에 그것을 옹호하며 다시 사용했다. 헤겔은 나아가 강의와 출간된 저작에서 자신 철학을 지칭하기 위해 때때로 ‘관념론’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절대적 관념론이 절대자에 대한 관념론이라고 한다면, 여기서 ‘절대자’가 의미하는 바를 파악해야 한다. 절대자는 철학의 주제에 대한 헤겔의 기술적 용어다. 헤겔은 <차이 논문>에서 철학의 과제는 절대자를 인식하는 것이라 선언한다. 그런데 정작 절대자의 의미에 대해서는 상세히 설명하지 않는다. 그래도 헤겔 이전 그리고 동시대 철학자가 사용한 의미를 염두에 두면, 그가 무엇을 해당 용어로 지칭하려는 지 짐작할 수 있다.
칸트에 따르면, ‘절대적’이라는 용어는 ①‘자기 안에서(내적으로) 고찰되어 다른 사물과의 관계로부터 분리되어 고찰된 한 사물에 대해 타당한 것’ ②‘모든 측면이나 관계에서 한 사물에 대해 참인 것’을 의미한다. 헤겔의 용법은 둘을 결합한 것으로 ‘자기 안에서나 내적으로 완전하게 고찰될 때 그의 절대자는 그 자신 내에 모든 관계를 포함한다’를 의미한다.
셸링이 또 다른 힌트를 제공하는데, 그에 따르면 절대자는 ①‘자기 안에서 그리고 자기를 통해 존재하는 것’ 또는 ②‘그 실존이 어떤 다른 것을 통해 규정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스피노자의 실체 정의를 떠올리게 하는데, 실제로 예나 시기 스피노자의 영향을 받았기에 이는 우연이 아니다. 헤겔은 스피노자를 이어받은 셸링의 절대자 정의를 공유한다. 그리고 스피노자가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전통을 따른다고 한다면, 셸링과 헤겔 모두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전통 위에 서 있다.

한편, 헤겔은 절대자(혹은 신)가 철학의 목표이자 주제라고 말하면서도 철학이 그것의 실존을 증명함으로써 시작해야 한다거나 그 실존을 전제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가 보기에 절대자는 철학의 출발점이 아니라 결과여야 한다. 철학(자)이 그 대상이 처음부터 내내 절대자(혹은 신)였다는 점을 이해하는 것은 철학적 탐구 이후일 뿐이다. 이 점에서 헤겔의 형이상학은 전통적 신학과 매우 다르다. 실제로 그는 위 목표를 수행하기 위해 <현상학>과 <논리학>에서 ‘실재 그 자체는 무엇인가’ 혹은 ‘다른 사물들에 대한 관계에서 따로 떨어진 사물 그 자체는 무엇인가?’라는 아주 기본적인 형이상학적 질문에서 시작한다. <현상학>은 의식이 스스로 그 대상 또는 대상 자체가 무엇인지 물으며 시작되며 의식 발전의 모든 단계는 이 물음에 대한 대답으로 이해될 수 있다. <논리학>은 실제 또는 실재 그 자체를 다른 방식으로 정식화한 ‘순수 존재’ 개념에서 시작한다.

주-객 동일성
‘절대적’이라는 용어가 의미하는 바를 알아보았으나, 여전히 ‘절대적 관념론’에 대한 그림은 희미하다. 셸링이 헤겔과 협업하는 사이 그에 대한 정의를 정의한 바 있기에, 그것을 볼 필요가 있다. 셸링에 따르면 절대적 관념론은 ‘이념적인 것과 실재적인 것, 주관적인 것과 객관적인 것이 절대자에서 하나이자 동일하다’라는 교설이다. 달리 말해, 절대적 관념론은 절대자가 주-객 동일성에 존재한다는 교설이다. 그러나 헤겔은 <차이 논문>에서 셸링과 다른 견해를 밝히고 있다. 그에 따르면 절대자는 단순한 주-객 동일성이 아니라, ‘주-객 동일성과 주-객 비동일성의 동일성’이다. 견해를 달리한다고 해서 셸링의 정의를 무시할 수는 없는 게, 헤겔이 셸링이 말하는 주-객 동일성을 절대자의 한 계기라는 점에는 동의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주-객 동일성은 도대체 무엇인가?

헤겔은 칸트가 범주들의 초월적 영역에서 주-객 동일성 원리를 불완전하게 이해하고 표현했다고 말한다. 그는 칸트의 통각의 통일 원리가 형식적이고 주관적이라는 이유로 비판한다. 형식적인 이유는 그것이 표상들 자체의 내용과는 관계없이 표상들의 단순한 자기의식일 뿐이며, 주관적인 이유는 동일성이 단지 주관의 자기의식에 이르는 가운데 주관 속에서만 발생하기 때문이다. 헤겔이 보기에 칸트가 말하는 이성은 주관의 활동에 의해 세계에 부과되는 어떤 것이므로, 그러한 활동에 선행하는 세계는 인식 불가능한 사물 자체라고 간주하는 주관적 개념인 셈이다. 쉽게 말해, 칸트의 초월론적 주관은 그 자신의 의식 권역 내부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이 헤겔의 칸트 비판의 핵심이다.

그렇다면 헤겔의 주-객 동일성 원리에 대한 긍정적 정의는 도대체 무엇인가? 헤겔의 주-객 동일성 원리는 스피노자의 것에서 유래한다. 즉, 주관적인 것과 객관적인 것, 지성적인 것과 경험적인 것 이념적인 것과 실재적인 것이 구별되는 실체들이 아니라 하나이자 동일한 실체의 상이한 측면들, 성질들, 속성들이라는 스피노자주의에 기반한다. 이렇게 모든 형식의 이원론에 대항하는 스피노자주의에 따라 헤겔이 주-객 동일성을 이해하고 있다고 한들, 방금 논한 스피노자의 교설 자체가 이해하기 무척 까다롭기에 여전히 주-객 동일성이 무엇인지 알기 힘들다.

그래도 헤겔은 <차이 논문>에서 자신이 찬동하는 스피노자주의의 의의를 밝힌다. 그는 주관이 객관으로부터 구별되는 무시할 수 없는 일상적 경험의 사실을 간단히 가상으로 여겨선 안 된다며, 주관적인 것과 객관적인 것의 차이가 관념적일 뿐만 아니라 실재적이기도 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이 점에서 절대자가 주-객 동일성이라는 셸링의 것과 동일성과 비동일성의 동일성이라는 헤겔의 것이 달라진다. 헤겔이 보기엔 주관과 객관이 대립하는 일상적 경험을 설명해야만 하므로, 둘이 그 속에서는 동일한 보편적 실체가 어떻게 자기 자신을 나누어 주관과 객관의 구별을 산출하는지를 보여야만 한다. 한마디로 헤겔은 주-객 이원론의 필연성을 설명하면서도 그것을 극복해야만 한다.

‘관념론’의 의미
지금까지 살펴본 바에 의하면 헤겔의 절대적 관념론은 기본적으로 일원론적 교설이다. 구체적으로 말해, 절대적 관념론은 주관적인 것과 객관적인 것, 이념적인 것과 실재적인 것, 정신적인 것과 물리적인 것 사이의 실체적 구별을 부정하고 그것들이 하나의 동일한 실체의 구별되는 속성이라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반-이원론이다. 이에 더해, 절대적 관념론은 여러 실체가 있지 않고 오로지 하나의 실체만이 있다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반-다원론적이다.

이러한 일원론적 교설은 어떤 점에서 관념론과 결합되는가? 헤겔에 따르면 절대적 관념론이란 ‘사물들이 보편적인 신적 이념의 현상’이라는 교설이다. 이는 외관상 모든 것이 단일한 보편적 이념의 현상이라고 주장하는 플라톤의 관념론과 유사하나, 둘은 다르다. 헤겔은 ‘이념’을 플라톤이 아닌 아리스토텔레스 전통에서 사용한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목적인’ 논의를 따라 ①보편자들은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특수한 사물들 속에 실존하며 ②사물들은 자신 속에 내재한 이념이라는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애쓴다고 주장한다. 이 점에서 헤겔의 관념론은 주관적 관념론과 구분된다. 주관적 관념론은 세계의 이성성이 주관에 의해 세계에 부과된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이는 헤겔의 입장과 다르다. 이렇게 이념을 주관성의 영역에 한정하지 않는 헤겔의 관념론은 실재론(객체는 나의 의식에서 독립해 실존한다)과 자연주의(자연의 모든 것은 법칙에 따라 발생한다)와 양립할 수 있다.

헤겔의 절대적 관념론에 따르면 절대 이념은 주관적인 것도 객관적인 것도 아니기에 유물론과 관념론 간의 논쟁은 거짓 논쟁이다. 주관적인 것과 객관적인 것은 똑같이 실재적이며, 둘 사이의 대립은 일상적 경험 수준에서 명백하다. 오히려 헤겔의 생각에 의하면 둘이 분할되어 대립하는 것은 절대자의 자기실현의 필연적 계기다. 그럼에도, 헤겔의 절대적 관념론은 어떤 면에서는 객관성보다 주관성에 우위를 부여하기도 한다. 그의 교설 내에서 절대자는 주관성 없이 자기의 본성을 완전하게 실현하거나 발전시킬 수 없으며, 절대자는 역사를 거쳐 현현하는데 이 현현과 발전이 바로 절대자의 주관성이기 때문이다.
헤겔이 주관성에 중요한 역할을 부여했다는 사실과 관련하여 그의 관념론에 관한 미신들이 생겨났다. 마치 그의 절대적 관념론이 우주적 주관주의 혹은 초주관주의라는 미신 말이다. 그것에 따르면, 헤겔의 관념론에서 절대자는 정신, 신적인 보편적 주체이고, 이 무한한 주체가 세계 전체를 창조한다.
그러나 미신은 세 가지 이유에서 거짓이다. 첫째, 헤겔이 초월론적 주체에서 제한들을 제거한다고 한들, 사유의 형식들은 세계 자체가 아니라 주체에 대해서만 참이기에 우리는 여전히 주관적 관념(론)을 지니고 있다. 둘째, 헤겔은 주관적인 것과 객관적인 것이 대립이 절대적 이념에서는 무의미하다고 생각하기에, 그것은 주관적인 것도 아니고 객관적인 것도 아니다. 셋째, 헤겔은 절대자의 주관성이 절대자의 최종 발전 단계라고 생각하지, 그것을 시작점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헤겔에게 있어 시작점에 있는 절대자는 주체가 아닌 실체일 뿐이다.

관념론과 실재론, 자유와 필연성의 종합
헤겔은 피히테로 대표되는 관념론과 스피노자로 대표되는 자연주의의 교착 상태를 넘어서고자 했다. 그의 절대적 관념론은 두 입장의 장점은 취하되 결점은 부정하고자 했다. 피히테의 관념론은 자기를 정립하는 자아 개념을 내세운다. 스피노자의 자연주의는 신적인 것을 내재적인 것으로 보았다. 각각이 두 입장의 장점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두 입장이 너무 달라서 둘을 취합하는 것이 불가능해 보인다는 점이다.

피히테의 개념 정의에 따르면 자유는 자기 자신을 선택한 무언가로 형성하는 자아의 능력에 놓여있으므로, 자아는 선행하는 원인으로부터 독립적인 힘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스피노자는 결정론을 펼치기에 자아의 행위는 원인에서 독립적일 수 없고(필연적이고), 자연주의를 펼치기에 자아의 자유로운 행위는 완전한 사물들을 파괴하는 것일 뿐이다. 이렇게 자유에 관한 상극의 입장을 펼치는 두 철학 입장은 종합되기 쉽지 않아 보인다.
두 입장을 종합하고자 하는 시도의 어려움은 헤겔의 피히테 비판에서 더욱 잘 드러난다. 헤겔은 여타 낭만주의들과 마찬가지로 피히테의 이원론을 비판했다. 그의 이원론에 따르면 자유는 전적으로 자연의 권역 바깥에서 취해져 한낱 지성적 영역에서만 가능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스피노자의 일원론적이고 자연주의적인 세계에서 자유는 어떻게 가능한지 헤겔은 설명해야만 한다.

헤겔의 절대적 관념론이 주관성을 자연의 목적으로 회복시킨바, 헤겔은 피히테의 관념론을 일정 부분 받아들인 셈이다. 물론 피히테와 달리 그는 자연을 최종 원인으로 내세우지는 않았다. 한편, 헤겔에게 있어 신적인 것이 실현하는 것은 오직 인간의 활동과 자기 인식을 통해서이기에, 그는 스피노자보다 인간의 행위에 대해 더 큰 역할을 부여하게 된다. 그러나 이렇게 자아가 창조의 정점이고 자아의 행위가 신적인 본성을 실현한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신적인 것이 오로지 자신의 자연 본성의 필연성으로부터만 행위하며 그에 따라 자아의 모든 행위들 역시 필연적이라는 주장은 논파되지 않는다. 이 점에서 헤겔은 스피노자를 받아들여 자유 개념을 재해석한다.
피히테와 달리 헤겔은 자유가 필연성을 포함한다고 생각하며, ‘오직 자신의 본성의 필연성에 의해서만 존재하며, 자기 자신에 따라서만 행동하게끔 결정되는 것은 자유롭다’라는 스피노자의 입장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여기서 말해지는 ‘자기-결정’은 ①내가 특정한 본질이나 자연 본성을 지니며 ②그것이 실현되는 것은 자연스럽고 필연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스피노자의 자유·자기-결정 개념을 받아들이면, 나는 내가 실제로 전체 우주와 동일한 한에서 자유롭다는 결론이 나온다. 나는 철학을 통해 그 동일성을 인식하게 되면 자유를 실현하게 된다.

범논리주의의 신화?
헤겔의 절대적 관념론 속 우연성의 지위에 관한 두 가지 입장이 있다. 하나는 범논리주의로, 그에 따르면 헤겔은 모든 것이 이성에 따라 필연적으로 발생한다는 교설을 지지했다는 쪽이다. 다른 하나는 이에 맞서 헤겔은 우연성의 실재성을 전적으로 인정한 사람이라며 범논리주의적 해석은 쓰레기라고 주장한다. 각각의 입장은 모두 정당성을 지닌다.
범논리주의자들은 반박될 수 없는 두 전제를 내세우는데, ①헤겔에게 있어 절대자는 오로지 그 자신의 본성의 필연성으로부터만 실존하는 자기원인이다 ②헤겔에게 있어 절대자는 자기 외부에 자신을 한계지우는 것을 아무것도 지니지 않는 실재성 전체이다가 그것이다. 두 전제에 따르면 ‘모든 것이 신적 본성의 필연성에 의해 실존한다는 결론이 나오기에, 헤겔에게 우연성의 실재성(필연성)은 도입될 수 없고 그는 범논리주의자라는 것이다.
이에 반박하는 자들은 헤겔은 우연성을 주된 특징으로 하는 유한 세계를 설명하는 것을 철학의 목표로 제시했다는 점에 기반해 주장을 펼친다. 그들이 보기에 우연성을 주관적 의미에서의 현상으로 한정한다면 헤겔은 이를 절대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고, 헤겔은 우연성이 객관적 현상이라고 바라봤다. 헤겔 철학에서 우연성은 객관적인 이념의 현현으로 제시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헤겔이 정말 강력한 객관적인 의미에서의 우연성의 실재성을 설명할 수 있냐는 것은 여전히 문제가 되고 있다. 우연성은 체계 내부에 있거나 외부에 있어야 하는데, 내부에 있다면 우연성은 다만 주관적 지위만 지니게 되므로 실재적 우연성에 대한 설명은 불가능하다. 만일 외부에 있다면 우연성은 객관적 지위를 지니게 되지만, 그것은 절대자를 한계 짓는다는 점에서 헤겔이 거부할 이원론을 끌어들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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