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트 질문

1 ) 7+5 = 12 가 왜 종합판단인지 이해가 잘 안 됩니다.

  1. (선험적) 분석판단의 예시 : 모든 삼각형은 세 각을 갖는다.

  2. 선험적 종합 판단의 예시 : 7 + 5 는 12 이다.

여기서, 1.의 명제가 분석판단인 이유는 ‘술어는 이미 주어 속에 함축되어 있기 때문에 술어는 주어에 관해 어떠한 새로운 지식도 제공해줄 수 없다.’ 고 말하는데

  1. 의 경우를 생각해보면, (7 + 5) 가 12라는 관념을 함축하지 않고 있나요 ?

7 + 5 자체의 관념에 대한 분석만으로 12를 이끌어낼 수 없다는게 칸트의 주장인데, 이게 명확히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안
됩니다. 7 + 5 라는 관념 안에 이미 12라는 관념이 들어가 있지 않나요 ?

이게 어떻게 ‘경험에 호소하지 않고도 지식을 획득할 수 있다는 증거’ 가 되는지 이해가 안됩니다.

종합판단이 아니라 분석판단이라고 생각됩니다.

’물질계의 질량은 보존된다‘ 라는 문장도 마찬가지 입니다.

물질계 라는 관념 안에 질량 보존 이라는 관념이 이미 포함되어 있는데 이게 어떻게 종합판단인가요 ?

  1.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에 대한 의문

’경험에 의존하지 않고도 새로운 지식을 추가할 수 있는가‘ 에 대한 칸트의 대답이 ’선험적 종합판단의 존재‘ 라고 하면, ‘정신이 대상에 순응한다.’ 라는 흄의 가정을 선험적 종합판단을 근거로 하여 철회할 수 있을거라 생각합니다.

여기서 칸트가 제안한 ‘대상이 정신의 작용에 순응한다는 가정을 내리는 것‘ 까지도 이해가 됩니다.

그런데 이 가정이 지식을 인식하는 바를 더 잘 설명해준다고 해서 이 가정이 맞다는 것은 아니지 않나요 ?

여기서 이 가정을 바탕으로 논리를 전개해가는게 비약이라고 느껴지는데 이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그냥 칸트는 이 가정이 ‘지식을 추가하는 과정’ 을 더 잘 설명해주기 때문에 그것을 받아들이기로 했다고 보면 될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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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여러 논란의 여지는 있습니다만, 칸트가 7+5=12가 종합판단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7+5에 12가 함유되어 있지 않다는 이유에서입니다. 이를 조금 더 분석해보면, 7은 .......이고 5는 .....입니다. 이때 칸트에 따르면 저 명제는 .......에 .....를 (선험적 형식인) 시간 표상에 따라 잇따라 종합한 결과물이 됩니다. 즉 + 자체가 지성의 작용을 의미합니다. ............(12)에 .......(7)가 함유되어 있지 않고, 5에도 똑같이 그러한 것처럼 저것은 분석판단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는 자연과학의 명제에서도 마찬가지가 됩니다. "모든 물체는 질랑을 가진다"에서 물체라는 단어를 아무리 분석해보아도 "질량" 개념은 나오지 않죠. 이것은 선험적 공간표상에 의한 종합판단으로 봐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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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만일 "인식이 대상을 따른다"고 가정해 봅시다. 이때 난점은 선험적 종합 판단(위에서 말한)을 어떻게 해명할 것인가가 문제가 됩니다. 만일 인식이 대상을 따른다면 선험적인 종합 판단은 불가능할 것이니 말입니다. 그러나 수학적 인식은 선험적 종합 판단의 예시를 잘 설명해주고 있고, 따라서 칸트는 코페르니쿠스적 입장을 채택하지 않았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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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위 글을 읽고 다시 생각해보았는데

‘모든 삼각형은 세 각을 갖는다.’ 를 판단하는 과정에서는 ‘7+5= 12’ 의 판단과 달리, 시간표상에 따라 잇따라 조합할 필요가 없다. 로 이해하면

후자의 판단에서는 어떤 것을 시간표상에 따라 잇따라 조합한 것인가요 ... ?

둘 다 이미 주어의 관념에 술어의 관념이 포함되었다고 생각이 되는데요 ..

답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궁금한 것은, 흄의 가정을 철회할 근거는 분명히 되어도, 코페르니쿠스적 입장을 ‘가정’할 근거 또한 되어도, ‘채택할 근거’는 안되지 않나 ? 입니다.

그 입장을 채택하고 그 입장을 바탕으로 논리를 전개해가는게 그 간극에서 비약이라고 느껴지는데 이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

칸트는 이렇게 말하고 있네요.

만약 어떤 가정을 받아들임으로써 이제까지의 전제들 아래서는 불가피하게 마주치는 이성의 자기 자신과의 상충이 제거된다면, 이성의 이 실험은 이 가정이 가可하다고 결정한 것이고, 그것은 이론으로 통용될 수 있다. 이 가설은 코페르니쿠스적 자유의 바탕 위에서 생겨난 것이며, 동시에 자유를 내용으로 갖는다. 즉 이 가설은 이제까지 지성이 대상의 확고부동한 "본질"을 획득하기 위해 애쓰도록 강요받은 것과는 반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지성을 "부동"인 것으로, 그리고 동시에 세계 조망을 위한 척도로 보고, 그 반면에 대상들은 지성을 중심에 두고 운동하는 것으로 받아들일 것을 제안한다. 이제까지의 전제들에서 불가피하게 나온 순수 이성의 오류추리들과 이율배반들의 훗날의 해결은 이 실험의 긍정적인 결말을 입증해줄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오류추리와 이율배반의 해결이란 비코페르니쿠스적 방식에서, 즉 인식이 대상을 따른다는 전제에서 생긴 불가피한 오류를 말합니다. 예컨대 정립: 세계는 시간상 시초를 가지며 유한하다. 반정립: 세계는 시초를 갖지 않으며 시공간적으로 무한하다. 에서 이 오류는 한계, 시간, 공간이라는 범주를 초월적인 것에 사용함으로써 범해진 이율배반입니다. 그렇다면 경험에 한계가 있게 되고 '경험 가능한 것'은 이성의 능력으로부터 나와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이성의 대상 구성적 기능입니다. 이런 부분에서 칸트는 코페르니쿠스적 인식(즉, 대상이 인식[인식방식]을 따른다는 것)을 정당화하고 있지 않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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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공은 둥글다" = 둥글지 않으면 공이 아니기 때문에 분석판단입니다.
"이 공은 금색이다" 공은 금색이지 않을 수 있기 때문에 공 외에 외적조건이 결합된 종합판단입니다.

7과 더하기와 5라는 개념을 아무리 분석해도 12에는 도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경험하지 않아도 7 더하기 5는 12입니다. 왜냐하면 7+5가 12가 아닌 경험세계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7, +, 5 라는 개념을 아무리 분석해도 12라는 개념은 도출되지 않으며, 12는 칸트에게 있어서 새로운 정보입니다. 종합판단은 새로운 정보를 동반합니다.

12외에 경험세계가 존재하지 않고, 새로운 정보를 동반하니 '선험적'이며 '종합적인' 판단이 되는 것 입니다.

칸트는 전문수학자가 아니기 때문에 틀렸을 수 있습니다. 저도 이 논증이 수학자들에게 어떻게 비춰질까 잘 모릅니다. 다만, 칸트의 접근 방식에 주목해볼 필요는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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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오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여기서 세창님은 분석/종합 구분을 필연/우연의 구분으로 이해하시는 것 같습니다. "S는 P다"라는 판단이 종합판단인 근거를 S가 P가 아닐 수도 있었다라는 것에 두시니깐요. 하지만 제가 이해하기로 칸트에게 있어 분석은 주어의 정의가 술어를 포함하는 것, 종합은 그렇지 않은 것입니다. 예를 들어, "모든 총각은 결혼하지 않았다" 는 분석적 판단이지요. 그리고 이 분석/종합 구분이 꼭 필연/우연으로 구분되진 않습니다. 일단 설명했다시피 구분의 의미도 다를 뿐더러, 종합 판단은 필연적일 수도, 우연적일 수도 있으니깐요. 대표적으로 이 포스팅에서도 언급됐던 "모든 물체는 질량이 있다"는, 칸트에 의하면, 종합적인 판단입니다. 그리고 이 판단은 칸트에게 있어 필연적인 것 같습니다 (틀렸다면 수정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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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필연/우연으로 분석과 종합을 구분한 것이 아닙니다.

이 공은 금색이다 라고 하면, 공이 금색이 아니어도 공으로서 존재하게 되고, 금색은 공이라고 하는 개념에 추가 개념임 언급한 것입니다. 종합이라는 것은 개념 + 개념이 합쳤다는 뜻이니까요.

"이 공은 금색이다" 같은 경우는 또 경험적 종합판단입니다. 그리고 칸트에게 있어 경험에서 기인한 요인은 우연임을 드러나게 되는 부분인거죠.

"공은 둥글다"는 선험적 분석판단입니다. 공이라는 개념 자체에 이미 둥글다를 내포하고 있으니까요.

선험적 종합판단이라는 것은 경험에서 기인하지 않음에도 새로운 정보가 (순수직관과 오성의 형식으로 인해) 종합되어지는 과정을 말하는 것입니다.

칸트에게 있어 선험은 필연적이고, 경험은 우연적입니다.

종합판단은 선험적일 경우 필연적이고, 경험적일 경우 우연적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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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장을 제가 잘못 이해한 것 같네요.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을 것 같은데, (1) 공은 금색이지 않을 수 있기 때문에 종합판단이다, 그리고 (2) 공은 금색이지 않을 수 있기 때문에 공 외의 외적 조건이 결합된다는 것을 보일 수 있고, 이런 외부 조건이 결합된다는 것은 종합판단이라는 것을 보일 수 있다. 전 (1)로 해석했는데, (2)를 의미하셨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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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초보인 저는

'5와 7의 합' 이라는 개념을 분석하면

'5, 7, 합' 이 나온다고 생각했습니다.

여기에 12라는 결과가 도출되는 것은

우리 직관이 5, 7, 합이라는 각각의 개념들을 직관을 통해 더한 것(?)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 5와 7을 합한다는 행위(?) 직관(?) 같은 것이 더해져야 12가 되지 않을까요...?

이게 칸트의 의도인지는 모르겠지만...

사실 수학알못이라 아 칸트는 그렇게 얘기했구나 정도로만 생각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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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이해하기 쉽게 하기위해서 '분석' 이라는 개념을 '사전적 정의'로 등치 시켜 보겠습니다.

4 어휘등급

  • 1.수사 사에 일을 더한 수. 아라비아 숫자로는 ‘5’, 로마 숫자로는 ‘Ⅴ’로 쓴다.
  • 2.관형사 그 수량이 다섯임을 나타내는 말.
  • 3.관형사 그 순서가 다섯 번째임을 나타내는 말.

1 어휘등급

  • 1.수사 육에 일을 더한 수. 아라비아 숫자로는 ‘7’, 로마 숫자로는 ‘Ⅶ’로 쓴다.
  • 2.관형사 그 수량이 일곱임을 나타내는 말.
  • 3.관형사 그 순서가 일곱 번째임을 나타내는 말.

덧-셈
수학 몇 개의 수나 식 따위를 합하여 계산함. 또는 그런 셈.

분모가 다른 분수의 덧셈과 뺄셈을 할 때에는 분모를 같게 한 다음에 계산한다.

이 세 개념을 분석했을 때 12를 지칭하는 것이 나오지 않습니다. (여기서 더하기 라는 개념의 수학자들의 논증까지 끌고 간다면 얘기는 달라지겠습니다...)

그러나 7+5 = 12 가 아닌 경험세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칸트에게 있어서 경험 = 우연 / 선험 = 필연 입니다. 7+5=12 는 분석으로 도출 되지 않았으니 종합판단이며 (1), 12가 아닌 경험은 존재하지 않으니 필연 즉 선험 (2)입니다.

칸트에게 있어서 '직관'은 '대상' 으로부터 주어지는 것 입니다.

7에 내재되어 있는 직관을 위에 언급한,

  • 1.수사 사에 일을 더한 수. 아라비아 숫자로는 ‘5’, 로마 숫자로는 ‘Ⅴ’로 쓴다.
  • 2.관형사 그 수량이 다섯임을 나타내는 말.
  • 3.관형사 그 순서가 다섯 번째임을 나타내는 말.

라고 합시다.

더하기와 5도 마찬가지 입니다.

주어진 직관은 저기 정보들이 끝입니다. 칸트의 생각에서 외부 직관으로 부터 들어온 직관의 합은 다음과 같습니다.

  • 1.수사 사에 일을 더한 수. 아라비아 숫자로는 ‘5’, 로마 숫자로는 ‘Ⅴ’로 쓴다.

  • 2.관형사 그 수량이 다섯임을 나타내는 말.

  • 3.관형사 그 순서가 다섯 번째임을 나타내는 말.

  • 1.수사 육에 일을 더한 수. 아라비아 숫자로는 ‘7’, 로마 숫자로는 ‘Ⅶ’로 쓴다.

  • 2.관형사 그 수량이 일곱임을 나타내는 말.

  • 3.관형사 그 순서가 일곱 번째임을 나타내는 말.

수학 몇 개의 수나 식 따위를 합하여 계산함. 또는 그런 셈.
분모가 다른 분수의 덧셈과 뺄셈을 할 때에는 분모를 같게 한 다음에 계산한다.

이 직관의 질료들로 12가 구상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칸트는 이것을 12로 만드는 요소가 외부적인 '직관'이 아니라, 인간 내부에 존재한다고 주장했던 것입니다.

즉 언급하신,

  • 5와 7을 합한다는 행위(?) 직관(?) 같은 것이 더해져야 12가 되지 않을까요...?

라는 발언은 칸트 입장에서 외부에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인간 내부에서 진행되는 과정이며, 모든 인간이 '보편적' 인 체계를 공유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런 체계를 갖고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존재가 됩니다. 즉 7+5=12 는 선험적인 과정이며 그렇기 때문에 필연으로 이어진다고 보는것이죠.

'오성은 자연의 입법자' 라는 맥락도 비슷한 것입니다. 세계가 인과성을 갖고 움직이는 이유는 인간이 인과성이라는 한계를 갖고 세계를 등치시키기 때문인 것처럼, 7+5=12 인 이유는 인간이라면 그렇게 볼 수 밖에 없는 선험적 조건에 갇혀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잘 기억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는데,

"직선은 두 점 사이의 최소거리다." 라는 명제가 선험적 종합판단인 이유는,

'거리' 라고 하는 '공간적인 개념'이 (경험적인) 직관 으로부터 주어지지 않았는데 도대체 어디서 뜬금없이 굴러들어왔는가? 라는 물음에 대하여,

"인간의 인식조건의 한계인 '시간과 공간' (이것을 순수직관의 형식이라고 합니다.) 에서 '공간' 이라는 것주어진 경험적인 직관을 패키징 한 것이구나! " 라고 이해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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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여기서 '직선'을 '선분'으로 고치셔야 됩니다. 직선은 '양쪽으로 끝이 없는 곧은 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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