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저, 『헤겔』 - 2장

2장 초기 이상들(59-77)

낭만주의의 유산
헤겔 철학을 이해하려면 그의 논증뿐만 아니라, 그의 철학의 목표에 대해서도 알아야 한다. 그는 기본적으로 도덕적, 정치적, 종교적 목적에 이바지하기 위해 철학자가 됐다. 그의 초기 이상은 초기 독일 낭만주의에 기반한다. 카우프만과 루카치 등은 초기 헤겔을 낭만주의와 구별하려 했다. 실제로 후기 예나 헤겔은 낭만주의의 몇몇 관념에 반대하며 <현상학>을 서술했다. 초기 단편에서도 그러한 흔적을 찾을 수 있어서, 프랑크푸르트 시기의 헤겔을 단순한 낭만주의로 이해하는 것은 잘못됐다.
그러나 초기 헤겔뿐만 아니라 후기 헤겔은 낭만주의와 별개로 이해될 수 없다. 그의 절대적 관념론, 유기체적 자연 파악, 자유주의 비판, 공동체주의적 이상들, 스피노자주의 등은 모두 낭만주의의 유산이다.

최고선
헤겔의 근본적 가치들을 알기 위해서는 무엇이 최고선인가라는 고전적 윤리학 물음으로 돌아가야 한다.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한 최고선 논의는 홉스-로크를 거쳐 축소되었다가 18세기 중반 독일에서 고전 학문의 소생과 더불어 대두됐다. 그것은 특히 초기 낭만주의 세대의 눈길을 끌었다. 헤겔과 초기 낭만주의 세대는 최고선을 ‘삶의 통일’로 규정하고 이해했다. 그들에게 최고선, 즉 삶의 목적은 우리 존재의 모든 측면에서의 통일, 전체성 또는 조화 성취이다. 구체적으로 통일은 ‘자기 자신’, ‘타자들’, ‘자연’에서 유지된다. 그리고 이 통일에 대한 주된 위협으로 제시된 것이 ‘분열’과 ‘’소외‘다. 그래서 그들은 분열을 극복하고 통일을 성취하는 것이었다.

통일의 이상을 제공한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는 그것을 다음의 셋으로 설명한다. 첫째, 인간의 탁월함의 이상은 이성과 정열의 조화에서 이루어진다. 둘째, 폴리스가 전체가 각각의 부분을 돌보고 각각의 부분이 전체를 위해 산다. 셋째, 자연은 하나의 가시적인 살아 있는 것이다.

청년 헤겔과 낭만주의자들은 위와 같은 삶을 이상적 삶으로 보았다. 그래서 초기 헤겔의 이상을 알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과의 통일, 타자와의 통일, 자연과의 통일과 관련된 낭만주의적 윤리, 정치 및 종교를 파악해야 한다.

윤리적 이상들
낭만주의 윤리는 고전적 자기실현 혹은 탁월함의 이상에 원천을 둔다. 자기 자신과의 통일이라는 탁월함은 세 가지 구성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
첫째, 총체성: 한 사람은 그 자신의 모든 특징적인 인간적 힘들을 발전시켜야 한다. 총체성에 대한 요구는 일면성의 극복과 관련된다. 우리는 우리 존재의 어떤 측면도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둘째, 통일성: 그 힘들은 하나의 전체(통일체)로 형성돼야 한다. 낭만주의자들은 통일성에 대한 요구를 미학적 관점(삶의 소설화)으로 정식화했다. 나의 통일은 예술처럼 외부가 아닌 내부로부터 유래해야 한다는 말이다.
셋째, 개별성: 그 전체 혹은 통일은 개별적이거나 그 사람에게만 독특한 것이어야 한다. 각각의 예술 작품처럼 각 개인은 자신의 개별성을 갖춰야 한다는 말이다.

자기실현의 낭만주의적 윤리는 공리주의와 의무 윤리와 대비된다. 공리주의는 인간적 힘들의 능동적 발전을 무시하고, 의무 윤리는 인간을 이성과 감성의 측면으로 분할해 이해하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과의 통일의 성취를 위해 낭만주의자들은 사랑의 경험에 가장 큰 중요성을 부여했다. 사랑은 자기 이익으로부터 나온 것이지만, 자신의 이익을 타자로부터 분리하지 않을뿐더러 사랑을 통해 자아는 타자들에게서 자신을 발견하게 되기 때문이다. 초기 헤겔 또한 사랑이 윤리의 기본 원리여야 한다며, 사랑이 칸트 윤리학을 극복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두 측면에서 헤겔은 낭만주의와 갈라진다. 그는 개별성에 비교적 높은 가치를 부여하지 않게 됐고, 사랑의 윤리를 포기한다. 사랑이 도덕적·정치적 삶의 토대가 되기엔 충분히 보편적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의 생각은 사실 초기 프랑크푸르트 시기에 이뤄졌으나, 예나 시기에 이르러 <법철학>을 통해 완성된다.

정치적 이상
낭만주의의 정치적 이상은 타자들과의 통일이다. 낭만주의자들은 유기체적 국가 개념을 염두에 두고 있으며, 그리스·로마의 고대 공화국들을 모델로 삼는다. 그들은 계몽된 절대주의의 ’기계 국가‘에 반대한다. 그들이 보기에 기계 국가에서 모든 것이 시민들을 위해 행해졌다 한들, 민중에 의해 행해지지는 않았다. 그들은 계약된 개인 사이에서 이루어진 자유주의의 원자론적 국가에도 반대한다. 그런 국가에서는 누구도 법을 지키지 않을 것이기에 결국 전제정치로 귀결된다는 것이 낭만주의자들의 생각이다. 이에 맞서 낭만주의자들이 제시하는 낭만주의적 공화국의 핵심은 다음의 셋이다. ①공적 업무에 참여하고 통치자를 선출하며 공공 정책을 결정하는 권리 ②개인적 구성원들의 자유 ③시민 교육과 발전에 대한 국가의 책임.
사실 낭만주의자들이 고대 공화국을 모델로 삼았음에도, 개인의 자유를 강조했다는 점에서 애초부터 근대적이었다. 그들은 민주적 참여라는 고전적 자유뿐만 아니라 개인의 자유라는 근대적 자유도 함께 담고 싶어 했다. 즉, 고대의 공동체의 이상과 근대의 자유의 이상을 종합을 성취하려 한 셈이고, 헤겔도 이를 추구했다.

그러나 낭만주의자들은 프랑스 혁명 과정에서 발생한 무정부 상태와 만성적 불안정성을 보고 정치적 이상을 제한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역사적 연속성, 국가 내 독립된 집단들의 역할, 혼합 정체의 가치, 통치자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좀 더 역사적이고, 다원주의적이고, 중앙집권적으로 변화한 셈이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민주적 요소와 입헌주의 그리고 기본권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았다. 헤겔도 그러했다.

종교적 이상
낭만주의자들은 최고선이 피안의 세계가 아닌 현세에서 획득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런 점에서 그들은 고전적인 기독교적 파악에 반한다. 헤겔 또한 초기 베른에서부터 자기중심적인 관심을 지닌 구원의 윤리를 공격했다. 최고선의 내재적 이상에 충실하게 헤겔은 삶의 의미가 오로지 공동체 안에서만 성취될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한다고 믿었다. 그는 공동선에 기여하고 그 법률들의 창조를 도울 때 삶의 만족과 목적을 성취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런 헤겔의 관점에서 기독교의 개인 구원의 원리는 공동체 상실 이후 절망적 외침의 결과에 불과했다. 낭만주의자들과 헤겔은 전통적 형식의 기독교 신학에도 반대했다. 그들은 ①유신론을 앙시앵 레짐의 이데올로기의 부분이자 왕관과 제단의 오랜 동맹의 기둥이라며, 정치적 이유로 비판했으며 ②이신론이 자아를 자연으로부터 소외시킨다는 이유에서, 즉 문화적 이유로 비판했다.

그러나 헤겔과 낭만주의자들은 어느 정도 여전히 종교적이긴 했다. 그들은 오로지 신성에 대한 내재적 파악만이 자연으로부터의 소외를 극복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아가 단일한 무한 실체의 양태, 보편적 전체의 부분일 때에만 자연과 동일시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들은 스피노자의 철학에 눈길을 돌렸다. 그들이 보기에 자연의 무한성과 신을 동일시한 스피노자의 철학은 이성과 신앙 간의 갈등을 해결하는 철학이었기 때문이다. 한편, 그들은 정치적 이유로 스피노자 철학에 관심을 두기도 했다. 스피노자주의는 ①교회와 국가의 분리를 종교적 자유의 보장으로 보았으며 ②성서를 비판하여 문자에 대한 강조로부터 해방되고자 했으며 ③범신론을 주장했기에 모든 신자의 평등을 옹호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헤겔은 베른 시기에 초자연적인 신에 대한 믿음이 도덕적 근거에서 정당화된다는 칸트의 도덕적 신앙의 이념에 찬성했으나, 프랑크푸르트 시기에 해당 이념을 포기하며 스피노자주의를 옹호하기 시작한다.

분열의 도전
낭만주의가 외치는 통일의 이상은 아름다워 보이지만, 말 그대로 낭만적이다. 그들이 외치는 통일은 근대 사회에서 이룩될 수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낭만주의자들과 그들에게 일정 부분 동조한 헤겔에게는 점점 통일을 분열시키는 근대적 삶에 맞서는 것이 중요했다. 헤겔은 그래서 철학의 욕구는 분열에서 발생했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런 사회적 맥락에서 낭만주의자들과 헤겔에게 철학의 과제는 그들의 이상의 정당성을 보이고, 근대적 삶의 분열에도 불구하고 전체성의 가능성과 필연성을 확립하는 것이었다. 특히, 주체-객체, 정신-육체, 자기-타자 분열을 정당화하는 것처럼 보이는 데카르트, 칸트, 피히테에 맞서는 것이 중요했다. 구체적으로, 청년 헤겔은 이원론에 대항한 투쟁과 전체성의 가능성 제시가 철학의 특수 분야인 형이상학의 과제라고 믿었다. 그래서 헤겔 철학에서 형이상학은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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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된 게 아쉬운 좋은 책이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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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그래서 철학 책이 나오면 일단 사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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