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과 학부 진학 관련 고민

안녕하세요, 현재 철학과 전공을 목표로 하고 있는 고3입니다.
고2 때 심리학에 관심을 두었었는데, 당시 실존주의 심리치료라는 개념을 접하고 실존주의라는 이론 자체가 궁금해져 관심 범위를 확대해가다 자연스럽게 철학과 진학을 희망하게 되었습니다.
평소 불안이 지나칠 정도로 심한 편이었는데, 불안을 마냥 부정적으로 바라보지 않고 오히려 불안을 통해 진정한 삶을 살 수 있다고 말한 철학에 큰 감명을 받아 그 꿈은 더 확고해져 1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지속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당장 두 달 정도 뒤에 넣을 원서 때문인지 뒤늦게 제가 철학에 진짜로 맞는 사람일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독해 능력도, 추론 능력도 괜찮았지만 그것도 한계가 명확히 보였고 철학에 관심이 없는 주변인들 사이에서 그나마 제가 뛰어나 보였던 것 뿐이었으며, 나아가서는 제가 철학을 한답시고 하는 것이 새로운 걸 사고하고 진리를 향해 점진적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저 유명한 철학자들의 말을 앵무새처럼 따라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계속 들었습니다. 단순히 학자와 그의 이론을 좋아한 것인지 아니면 제가 진짜로 철학을 하고 싶은 건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삶을 대하는 태도도 미성숙하고, 사고 능력도 그저 그런 제가 정말로 철학을 해도 될지 계속 자격을 따지고 있었던 겁니다. 단순히 취미로 끝난다면 모를까, 저는 이 분야로 먹고 살고 싶어서 그런 고민들이 끝없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이것은 어느 분야나 마찬가지이겠지만, 그 분야에서 특출난 사람이 성공하는 건 당연하다는 것을 저 역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두려웠습니다. 제가 '특출난' 사람이 아닐까 봐, 그리고 그것을 대학에 진학해서야 깨달을까 봐, 그래서 원하는 것을 이루지 못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더군요. 이런 사람이 철학과에 진학을 해도 괜찮을까요? 진학한다면 박사까지 하고 싶다는 욕심이 있는데, 그 과정에서 생계는 어떻게 유지해야 할까요.(이건 고등학생 시점에서 너무 먼 고민이 아닌가 싶었는데 뗄레야 뗄 수 없는 생각이라 덧붙여봅니다..)

이런 고민을 친구에게도, 그렇다고 학교 선생님이나 부모님께도 말하기가 곤란해 여기에 짧게 남겨봅니다. 감사합니다.

3개의 좋아요

글쎄요. 고3인데도

을 넘어서

실 수 있다면, 철학과 전공을 목표로 하실 게 아니라, 박사나 교수직을 목표로 하셔야할 것 아닌가 싶네요. (아주) 많은 학부 졸업생들, 심지어는 흔히 좋다고 말하는 그런 철학 박사생중에서

도 제대로 못하는 사람을 본 적이 꽤 있습니다. 그래서 조금은 자신감을 가져도 될 것 같습니다.

의외로 철학 전공 후에 생계는 그렇게 팍팍하지 않습니다. 애초에 인문학 전공이시면 로스쿨로의 길도 있긴 하거든요. 제 친구 중에서도 한국 학부에서 영문학 전공을 하고 아이비리그 로스쿨을 간 경우도 봤고요. 그 경우에는 대다수의 이공계보다 금전적으로 딸릴 것 같진 않네요. 또, 의외로 철학이 이공계랑도 가깝기 때문에, 물리학이나 수학같은 것을 병행하고 이공계 대학원을 가는 경우도 많이 봤네요.

2개의 좋아요

공부를 해본적이 없으니 당연한겁니다. 근데, 학부4년 거치고 난 뒤에도 똑같은 생각드실거에요. 이건 장담할 수 있어요. 그리고 아마 석사 졸업 이후에도 똑같을 거에요. 박사 과정 중에도요.

5개의 좋아요

어디선가 헤겔이 칸트의 철학을 비판하는 글귀를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정확한 문구는 기억나지 않고, '지상에서 백날 천날 수영 자세를 연습해서는 쓸모가 없다, 직접 물에 빠져 들어보고 허우적 대봐야 수영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정도로 적당히 왜곡(?)해서 기억하고 있습니다. 진로를 정하는 것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직접 머리를 들이밀거나, 손가락으로 찍어서 맛을 보지 않는 한, 걱정은 초행길을 떠나기 직전 긴장이 아니라 섣부른 두려움으로, 자격 따지기는 자가 진단이 아니라 그저 주저함만으로 남게 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꼭 꼭 꼭 원서 넣어보세요. 아직 작성자님께서 대학에서 철학 공부를 시작하지 않았기 때문에, 더 구체적으로는 철학 공부를 마치 그 누구의 도움 없이 혼자서 해내야 한다는 두려움 속에 있기 때문에 고민하고 계신게 아닌가 싶습니다. 대학에 들어가면 경계해야 할 것은 자신의 재능이나 지능이 아니라 오히려 쉽게 만족하는 경향, 게으름 등입니다. (제가 그 경계를 못해서 머릿속에 아무 것도 남지 않게 되긴 했지만....)

철학이라는 학문도 다른 학문들처럼, 영감처럼 무언가 팍! 하고 찾아와서 득도하거나 예언자처럼 '내가 말하노니...' 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통찰을 얻기 위해선 이전 철학자들의 이론, 경향, 현재의 철학적 논의들에 관심을 많이 기울이고 그에 대해 많이 공부하는 게 필수적인 것 같아요. 또 상대방과 토론도 하고 논문도 쓰고 다투는 등 다양한 사회적 관계들을 오히려 더 요구하는 학문인 것 같습니다. 즉, 대화할 사람이 철학자들 말고도 교수, 동기, 다른 연구자들 등 수많은 사람들이라는 얘기입니다.

특출난 사람이 아니어도, 비록 내가 특출나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뒤늦게 깨닫는다 하더라도, 뭐 어때요? 해낼 때까지 꾸준히 성실히 열린 마음으로 남들과 자신을 열심히 속이면(!) 됩니다. 아직 나이도 젊으시고, 기회라는 것은 때때로 찾아오니 너무 큰 걱정 마시고 시원하게 질러보시기 바랍니다. 나중에 대학에서 전공 안 맞는 것 같다 싶으면, 타 학과 강의도 열심히 들어보고, 휴학도 해보고, 해보고 싶었던 공부 찾는 등 하나씩 처리하시면 됩니다.

오히려 삶의 태도가 미성숙하고 사고 능력도 그저 그런 사람이 철학을 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영혼의 치유와 자신을 다듬는 실천으로서 철학이라는 표상은 철학사에서도 많이 찾아볼 수 있습니다. 특히 고대철학에서 많이 강조되는 내용이기도 해요. 철학을 통해서 작성자 선생님의 태도와 사유를 다듬을 수 있다면, 오히려 저는 철학 공부가 선생님께 큰 이득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4개의 좋아요

이렇게 생각하시다니 너무 안타깝네요. 반드시 '특출난' 사람만이 학계에 필요한 사람인 것은 아닐 겁니다. 특출난 천재 한 사람은 어느 날 우연히 혼자서 생겨나지 않으니까요. 특출난 한 명의 연구자가 만들어지려면 그 사람을 가르치고, 인용하고, 지지하고, 비판하고, 홍보할 수 있는 수많은 평범한 연구자들이 필요합니다. 오히려 이런 집단적 연구 환경이 제대로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개인이 자신의 힘만으로 특출난 연구자가 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봐도 좋을 거예요. (가령, 무어나 러셀의 전폭적인 격려가 없었다면, 비트겐슈타인이 과연 오늘날 같은 위상을 지닌 철학자가 될 수 있었을까요?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을 계승한 앤스콤, 기치, 말콤, 폰 리히트 같은 제자들이 없었다면, 비트겐슈타인이 과연 오늘날 같은 위상을 지닌 철학자가 될 수 있었을까요?)

더군다나, 철학에서는 특정 기준이나 지표만으로 줄 세우기가 이루어지기 힘듭니다. 정말로 다양한 평가 기준과 지표가 있고, 그에 따라 각 연구자들의 강점이 부각되는 영역이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으니까요. '특출난' 소수만 인정받고 나머지는 모두 도태되는 식의 생존경쟁으로 철학의 영역을 바라보시는 것은 다소 과장입니다. 물론, 수상이나 임용처럼 제한된 지위를 놓고 여러 연구자들이 경쟁해야 할 때도 있지만, 그런 경쟁에서 승리하지 못했다고 단순히 무가치한 연구자로 평가받는 것은 아닙니다. (개인적으로, 제가 가장 존경하고 좋아하는 선생님들 중에서는 유학이나 임용 등 외적 지표로만 보았을 때는 성공하지 못한 분들도 많습니다.)

마지막으로, 철학으로 연구를 수행하고 논문을 쓰는 것은, 근본적으로 이 분야에서 무엇인가 말하고 싶은 것이 있기 때문이죠. 저는 이런 내적 동기를 단순히 외적 요인 때문에 포기하시지는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특별히, '나는 특출나게 내세울 것이 없다.'라는 자조 때문에 미리부터 체념하지는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본격적인 철학 공부는 대학 학부 이후부터가 시작입니다. 고등학생이 철학에 대해 내세울 것이 없는 게 당연하고, 내세울 것이 있는 게 특이한 일인 겁니다. 철학에 어느 정도 마음이 있으시고, 또 철학과 학부 진학이 경제적으로 크게 무리가 되지 않는다면, 한 번 대학에 들어와서 본인이 철학의 영역에서 말하고 싶은 내용들을 다듬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본격적으로 4년을 공부해 보면서, 자신이 생각했던 것과 실제 철학과에서의 공부가 얼마나 맞는지 비교해 본 다음에 결정을 내려도 크게 늦지는 않을 거예요.

4개의 좋아요

헤겔이 다른 곳에서도 이 비유를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헤겔의 『엔치클로페디』 제1부에서 이 내용을 읽었어요.

비판철학의 주된 관점은 신, 사물들의 본질 등등을 인식하는 데 나서기 전에 인식 능력이 과연 그러한 일을 수행할 수 있는지 먼저 그 인식 능력을 탐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 그러나 인식에 대한 탐구는 인식하면서가 아니고서는 이루어질 수 없다. 이 이른바 도구에서 그것을 탐구한다는 것은 그것을 인식한다는 것 이외에 다른 것을 뜻하지 않는다. 그러나 인식하기 전에 인식하고자 하는 것은 물속으로 뛰어들기 전에 수영을 배우려고 하는 저 스콜라학자의 현명한 기도만큼이나 불합리하다. (G. W. F. 헤겔, 『엔치클로페디: 제1부 논리의 학』, 이신철 옮김, 도서출판 b, 2024, §10)

1개의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