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저, 『헤겔』 - 1장

1장 문화적 맥락(43-58)

계몽의 황혼

계몽의 위기는 그 누구보다 헤겔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와 낭만주의 세대의 다른 사상가들을 분리하는 것은 다름 아닌 동시대인들의 비판에 대항해 계몽의 유산을 보존했다는 점이다. 그도 <현상학>에서 계몽을 거의 경멸적으로 다루며 비판적이지만, 그는 계몽의 유산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의 성취는 계몽을 낭만주의의 몇몇 흐름과 종합했다는 점이다.

계몽의 위기는 계몽 자신에서 기인했다. 계몽의 핵심 원리는 자기반성/비판이다. 만약 이성이 모든 믿음을 비판에 종속시켜야 했다면, 이성은 자기 자신도 법정에 세워야 했다. 이러한 이른바 포스트모던적 흐름은 이미 18세기 독일에서 나타났다. 해당 시기 계몽 비판자들은 계몽이 의심스러운 가정에 의존한다고 지적했다. 반토대주의, 범심론 논쟁, 허무주의, 역사주의의 부상, 이론-실천 논쟁이 바로 그것이다.

반토대주의

계몽의 신앙은 이성이 지식을 위한 확고한 기초를 제공해줄 수 있다는 가능성에 의존한다. 기초에 대한 탐색은 경험주의 전통과 합리주의 전통 모두에서 드러난다, 둘의 입장은 대립하나, 기초의 가능성과 사실상 필연성에 대한 믿음은 공유한다.

1790년대 초 예나에서 출발해 젊은 사상가들이 토대주의를 비판하기 시작했다. 특히, 칸트의 비판철학을 자명한 첫 번째 원리들 위에 토대 지우고자 하는 라인홀트와 피히테의 시도에 대해 비판하기 시작했다(이른바 근본 명제 비판). 그 결과 많은 이들이 좀 더 칸트적인 입장, 즉 첫 번째 원리들과 이성의 체계가 오직 규제적 이상으로서만 간주되어야 한다는 입장으로 되돌아오고자 했다.

헤겔은 1800년에 예나에 도착하여 근본 명제 비판에 영향을 받았고 또 그에 도전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제1철학이 단지 이상일 뿐이라는, 탐구의 무한한 노력의 목표일 뿐이라는 반토대주의의 기본적인 결론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범신론 논쟁

이성의 권위에 대한 계몽의 신앙에서 자연종교와 도덕에 대한 믿음은 결정적이었다. 계몽주의자들은 모든 도덕적, 종교적 믿음들이 오직 이성에 따라 확립된 것이므로 이성적 존재자 모두에게 타당한 것이며, 동시에 오로지 이성만이 그것들을 증명할 힘을 가졌다고 생각했다.

1780년대 불거진 야코비와 멘델스존 사이의 ‘범신론 논쟁’을 통해 자연종교와 도덕에 대한 계몽의 신앙이 비판받게 됐다. 야코비는 이성이 도덕과 종교를 뒷받침하지 않고 그 토대를 훼손한다고 주장했다. 그에게 이성주의는 과학적 자연주의(기계론적 패러다임)와 같은 것이었는데, 스피노자가 그것의 대표였다. 그가 보기에 스피노자는 목적인을 추방하고 자연의 모든 것이 기계적 법칙에 따라 발생한다고 설명한 인물이다. 그래서 스피노자주의를 따르면 무신론과 숙명론이 도출된다는 것이 야코비 주장의 핵심이다. 결국, 이성의 원리에 따라 무신론과 숙명론을 따를 것이냐 아니면 비이성적인 길을 택할 것이냐라는 기로에 놓이게 된 것이다. 우리에게 중요한 도덕적, 종교적 믿음에 대한 이성적 정당화라는 중간 길은 없어졌다.

헤겔은 야코비의 딜레마에서 빠져나와 중간 길을 발견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그는 이성주의를 다시 확립하여 도덕적, 종교적 믿음을 정당화하고 싶어 했다. 그는 스피노자의 자연주의, 칸트와 피히테의 관념론, 라이프니츠-볼프의 교조주의 같은 형태가 아닌 이성주의를 통해 그 작업을 수행하고자 했다.

허무주의의 탄생

1780년대 후반 칸트 철학을 논의하며, 오버라이트는 칸트 철학이 비판을 한계까지 끌고 갔기에 이성주의의 전형이라고 논의했다. 하지만 그것은 모든 지식을 실제로는 단지 우리 안의 표상에 불과한 현상에 제한했다. 그래서 오버라이트는 우리가 우리 의식을 넘어서서 아무것도 알 수 없기에, 우리의 궁극적 가치들과 믿음들은 아무런 이성적 토대도 지니지 않는다는 이른바 허무주의적 결론이 나온다고 지적했다.

누구보다 야코비가 허무주의를 이슈화했다. 그는 1790년대에 이르러 칸트와 피히테의 관념론이 이성주의가 완전한 에고이즘이나 허무주의로 끝날 것이라고 공격했다. 그가 ‘허무주의’라는 표현으로 지칭하고 싶었던 것은 모든 것(외부 세계, 다른 정신들, 신, 심지어 자기 자신의 자아)의 실존을 의심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둘의 관념론으로 인해 우리는 우리 자신의 활동 법칙들에 따라 창조·산출하는 것만을 알기에, 우리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알거나 아니면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이러한 허무주의 공박은 기독교 신앙의 결여라는 도덕적 위기뿐만 아니라 우리의 모든 믿음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라고 해석된다. 헤겔은 이 문제 해소 방안을 <현상학>의 <지배와 예속> 장에서 제시한다.

역사주의의 부상

이성의 보편성과 불편부당함에 대한 계몽의 신앙은 1770년 후반 이후 부상한 역사주의에 의해 흔들린다. 계몽주의자들은 이성의 원리를 보편적이고 불편부당한 것으로 여기며, 지적인 존재들로서의 모든 시공간의 사람들에게 타당한 것으로 간주한다. 역사주의자들은 이에 맞서 계몽주의는 맥락을 사상하고, 과거의 문화를 그 자신의 문화에 의거해 판단한다며 비판한다.

역사주의자들의 주장은 대략 다음과 같다. 첫째, 사회·정치적 세계의 모든 것은 역사를 지니며, 모든 법률·제도·믿음 등은 변화에 종속되어 있으며 각각은 특정 역사적 발전의 결과다. 둘째, 그렇기에 우리는 법률·제도·믿음 등을 구체적인 역사적 맥락에서 검토해야만 한다. 셋째, 사회는 정치·종교·도덕 등과 엮여 있는 일종의 개별적 전체인 유기체이고, 유기체인 한 그것은 탄생-어린 시절-성숙-퇴조를 지니며 발전 과정을 겪는다.

헤겔은 역사주의의 영향을 받으면서 또 그 도전에 부딪힌다. 헤겔에게는 종종 철학에 역사주의를 도입하고 그것을 인식론에 통합했다는 영예가 주어진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헤겔은 상대주의적 귀결을 받아들이길 거부했다는 점이다. 그의 정치철학의 주된 목표 중 하나는 역사주의를 정당하게 다루면서도 자연법 전통을 재확립하는 것이었다.

이론-실천 논쟁

많은 이들에게 프랑스 혁명은 계몽의 신격화였고, 그 영향 아래 계몽주의자들은 사회와 국가의 모든 것은 이성적 원리에 따라 재구성되어야 하며 모든 역사적 제도와 법률은 이성의 검증을 통과하지 못하면 일소되어야 했다. 그래서 그들은 이성을 따르기만 하면 지상에 천국이 있을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현실은 지옥이었다. 그래서 많은 비판이 제기됐는데, 그 비판 중 몇몇은 1790년대 독일에서 진행된 ‘이론-실천’ 논쟁에서 표현됐다. 해당 논쟁의 초점은 칸트의 도덕철학과 정치철학에 있었다. 둘은 프랑스 자코뱅당 정책의 설명 근거를 제공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칸트는 에서 이성이 우리 행위의 원리를 위한 충분한 정당화를 제공함, 도덕적 행위를 위한 충분한 자극/동기를 제공한다는 이유로 실천적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더해, 칸트는 이성이 국가의 특정한 원리들도 규정하는 힘을 지닌다고도 주장했다,

이러한 칸트의 주장에 맞서 다음의 세 가지가 주장됐다. 첫째, 이성이 우리의 도덕적 의무들을 위한 충분한 토대라 하더라도, 그것은 국가를 위한 기초를 제공할 수 없다. 도덕 원리는 너무 일반적이어서 온갖 종류의 상이한 사회·정치적 제도와 양립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국가의 특정 원리를 규정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 고유의 역사와 전통을 고찰하는 것이다. 둘째, 설령 이성이 국가의 특정 원리들을 제공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행위를 위한 충분한 자극/동기를 제공하지 않는다. 인간 행위를 위한 주된 동기는 이성이 아닌 전통, 상상 그리고 정열이었다. 셋째, 만일 한 정치가가 권력에 머물고 법률과 질서를 유지할 수 있으려면, 그는 이성의 원리에 따라 행동하기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그렇게 행동할 경우, 그는 양심적이지 않은 자들에게 취약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이성의 원리에 따른 질서를 유지하지 못한다.

한마디로 계몽주의자들은 정치에서 실천은 이론을 따라야 한다고, 비판자들은 이론은 실천을 따라야 한다며 우리의 축적된 경험을 참조해야 한다고 주장한 셈이다. 헤겔은 이 이론-실천 논쟁에서 중도를 걷고자 한다.


독일 철학 고수가 되는 날까지.. :rock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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