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무로서의 사랑: 키에르케고어의 사랑 개념

키에르케고어는 '참사랑'을 '의무가 됨으로써 영원의 변화를 겪은 사랑'으로 정의하네요. 그리고 이런 사랑은 선호나 조건에 휘둘리지 않기 때문에 '단순한 사랑'이라고 말하고요. 굉장히 칸트적인 아이디어인데, 키에르케고어가 『이것이냐 저것이냐』와 『공포와 전율』 등의 저서에서 칸트적 의무 개념을 비판하였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면 참 흥미로운 부분인 것 같습니다. 물론, 『이것이냐 저것이냐』에서 칸트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인물인 의무주의자 빌헬름 판사가 마냥 비판의 대상이기만 한 것은 아니지만요. '의무'에 대한 키에르케고어의 양가적 입장을 정리해 보는 것도 좋은 논문 주제가 될 것 같네요.

"참사랑, 즉 의무가 됨으로써 영원의 변화를 겪은 사랑은 절대로 변하지 않습니다. 참사랑은 단순합니다. 사랑하지만 증오하지 않습니다. 절대로 사랑하는 자를 증오하지 않습니다. 저 즉각적인 사랑은 더 강한 것처럼 보입니다. 사랑할 수도 있고 미워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두 가지를 모두 할 수 있기에 강해 보입니다. 이 사랑은 "당신이 나를 사랑하지 않으면, 나는 당신을 미워할 거야."라고 말합니다. 이때 이 사랑은 그 대상에게 완전히 다른 사랑의 힘을 가진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착각일 뿐입니다.

과연 변하는 것이 변하지 않는 것보다 더 강한 힘일까요? "당신이 나를 사랑하지 않으면, 나는 당신을 미워할 거야."라고 말하는 사람과 "당신이 나를 미워해도, 나는 당신을 계속 사랑할 거야."라고 말하는 사람 가운데 누가 더 강할까요? 사랑이 증오로 바뀌는 것은 분명 무섭고 끔찍한 일입니다. 하지만 과연 누구를 위하여 끔찍한 일일까요? 나는 그의 사랑이 증오로 바뀌는 일이 일어난 그 사람, 그에게 가장 끔찍한 일이라 여깁니다.

[…]

그러나 의무가 됨으로써 영원의 변화를 겪은 사랑은 질투를 알지 못합니다. 사랑하는 이를 사랑받는 대로만 사랑하지 않습니다. 한결같이 사랑합니다. 질투는 사랑받는 만큼만 사랑합니다. 질투는 사랑받고 있는 것인지에 대한 생각으로 불안하고 고통스럽습니다.

[…]

그렇다면 그 단순한 사랑은 어떻게 질투의 병에 대해 안전한가요? 이 사랑은 비교에 의해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 이것 때문에 안전한 것 아닌가요? 그것은 선호에 따라 즉각적인 사랑으로 시작하지 않습니다. 단순하게 사랑합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결코 비교하는 사랑으로 쓰라리게 사랑하는 지점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단순히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쇠렌 키르케고르, 『사랑의 실천: 강화 형태의 몇 가지 기독교 성찰』, 제I권, 최정인·윤덕영·이창우 옮김, 카리스아카데미, 2024, 96-98 pass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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