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편한 편의점(북리뷰)]왜 이 편의점은 불편한가

안녕하세요. 철학 관련 글은 아니지만 관심 가져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ㅎㅎ

소설상에서 이 편의점이 불편한 표면적이고 명목적인 이유는 편의점의 매출이 안 나와 물건이 많지 않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편의점을 폐점하지 않느냐고? 알바생들의 생계가 없어질 것은 우려한 사장님의 친절한 배려와 마음 씀씀이 때문이다. 일단 여기까지가 표면상의 이유이지만, 사실 이 편의점이 "진짜로" 불편한 까닭은 따로 있다.

좀 더 심층적으로 들어가봤을 때, 이 편의점이 불편한 까닭은 두 가지이다. 첫째는 이 편의점의 알바생이 중년의 남성인 데다 노숙자이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에서는 계층을 가르는 선이 분명하게 존재하는데, 사람들은 이 선을 넘는 것을 싫어한다. 즉 노숙자들과는 섞이기 싫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들과 다르다는 것을 분명하게 구분 짓고 싶어 한다.

<기생충>에서 박 사장이 자신이 고용한 기택이 선을 넘는 것을 싫어하는 것처럼 말이다. 박 사장은 기택을 볼 때마다 불편하다. 기택이 자꾸 선을 넘으려하기 때문이다. 박 사장이 영역과 기택의 영역은 마치 박 사장의 대저택과 기택의 반지하방의 차이처럼 명확하게 구획되어 있으며 수직적 질서 속에 명확하게 자리 잡고 있다. 기택은 이 선을 자꾸 넘으려고 한다. 박 사장이 기택의 냄새를 그렇게 싫어하는 것도 이 선을 넘어서 자꾸 자신의 영역을 침범하기 때문이다. 냄새는 그 속성상 선을 무시하며 박 사장이 그토록 싫어하는 빈민층의 냄새이다.

이 편의점에 방문하는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노숙자 사내와 마주해야 하는데, 자신들과 이 노숙자 사내를 경계 짓는 선이 교란될 때 불편함을 느낀다. 소설 속 등장인물인 알바생 시현이 그러하고, 오 여사가 그러하다. 자신들은 이 노숙자 사내와는 다르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같은 편의점 알바로 엮이는 데에 불편함을 느끼는 것이다.

사람들은 계층 사다리에서 올라가고 싶어 하고 계층 상승을 원하지만, 노숙자인 주인공 독고가 그들에게 상기시키는 것은 추락의 두려움이다. 정해진 궤도에서 이탈하지 않고 종착지까지 다다르고 싶어 하는 것이 사람들이 원하는 것인데, 불안정하고 경쟁이 치열한 한국 사회에서는 이마저도 어렵게 되었다. 정해진 궤도에 올라타는 것도 힘들고 그 궤도를 이탈하지 않는 것도 힘들다.

정해진 궤도에 올라타지 못해도 불행하고 설사 그 궤도에 올라탄다 해도 언제 어떻게 될지 몰라 불안하다. 비정규직인 알바로 살아가는 주요 등장인물들이 전자를 의미하고, 등장인물들과 얽혀있는 많은 인물들은 궤도에서 이탈한 사람들이다. 그리고 의사였다가 노숙자로 전락한 독고라는 인물이 가장 전형적이다. 이러한 노숙자 독고의 과거가 등장인물들에게, 그리고 독자들에게 암시하는 것은 한 때 잘나가던 사람도 궤도에서 이탈하는 것이 너무나 쉽다는 사실이다. 그들에게 독고의 존재가 상기시키는 것은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그리고 경쟁에서 져서 패배하는 일만은 없어야 한다는 두려움과 불안이다.

이 편의점이 불편한 두 번째 이유는 편의점이 익명의 공간이고 소통하지 않는 공간인데, 편의점의 이러한 특징이 계속해서 깨어지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편의점에서 자신이 살 물건만 편리하게 구입해서 나온다. 점원은 손님에게 아무런 관심도 가지지 않고, 가져온 물건만 계산해주는 배역을 수행하기 때문에 그 공간에서 손님의 프라이버시가 보호된다. 그야말로 소통불가의 공간이고 단절된 공간이다. 사람들은 상업적인 거래의 용도만으로 편의점을 생각하지, 아무도 그곳에서 소통과 대화를 기대하지 않는다. 이러한 상황에서 주인공 독고가 타인의 인생에 자꾸만 개입하고 참견하는 것은 그야말로 너무 불편하다.

사실 이러한 소통의 부재는 한국사회에서 편리함으로 작용할 때가 많았고 편리함으로 여겨졌다. 경제성장만을 내세우며, 상명하복을 강요하던 60년대, 70년대가 아니었던가. “아랫것”들의 의견은 묵살되기 마련이었고 우리는 성장과 효율의 논리로 침묵을 강요받았다. 요즘은 어떠한가. 윗세대가 자신의 인생에 개입하면, “꼰대”라고 취급하고 듣기 싫어하는 MZ세대가 아니던가.

이 편의점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한국 사회를 가로지르는 두 가지 문제에 직면해야 하는데, 하나는 계층 문제이고, 소통의 문제이다. 양극화와 소통 단절은 한국 사회의 큰 문제인 동시에, 해결이 요원해 사람들이 생각하기 싫어하는 문제이다. 그렇지만, 사실 이 두 가지는 분리된 것이 아니다. 계층의 분화는 소통의 단절을 더 심화시키며 소통이 단절되면서 계층 간의 분화가 더 심해진다. 독고가 지하철이라는 분리된 공간에서 살던 노숙자임에도 불구하고 편의점이라는 우리의 일상으로 침범해 들어와 우리에게 말을 거는 순간, 이 두 가지 문제도 우리의 뇌리에 침범해 들어온다. 독고의 존재는 우리에게 이 두 가지 문제가 명확히 구분된 것이 아니라 섞여있음을 분명히 하며, 불편함을 선사하며 하나의 ‘사건’이 된다. 일종의 불편함을 통한 충격요법인 셈이다.

소설은 이러한 문제들을 재미나게, 따듯한 시선으로 풀어낸다. 사실 이 편의점이 불편한 표면상의 이유와 본질적인 이유는 연결되어 있다. 과거 노숙자 신분이었던 독고의 생계가 없어질 것을 우려한 사장님이 편의점 매출이 나오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편의점을 없애지 못하는 것이다. 편의점에 물건이 없으니 그 빈자리를 말과 소통이 대신 채우게 된다. 노숙자(계층문제)를 계속 고용하려고 하다 보니 편의점을 없애지 못하고, 그러다 보니 편리한 물건들이 없는 것을 감수하면서도 편의점을 계속 유지해야 한다. 편리하지 않다 보니, 사람들은 그만큼 말을 더 해야 한다.(소통) 이는 불편하지만 우리 모두가 연결되어 있는 존재임과 동시에 상생하는 존재임을 깨닫게 하는 계기가 된다. 그러니까 결국에는 우리 사회가 더 나아지기 위해서 편리함만을 추구할 게 아니라, 어쩌면 불편함을 감수해야 하는 역설적인 상황에 맞닥뜨리게 되는 것이다.

작가는 이러한 문제를 편의점이라는 친숙한 소재를 통해 우리 삶의 영역에 들이민다. 그리고 코로나 시대가 도래 하면서 사람들이 이러한 이야기에 귀를 열기 시작했다. 마치 그 누구에게도 공평하지 않은 재난 속에서, 단절과 소외에 고통 받기 시작한 사람들이 말이다. 코로나로 단절과 소외를 일시적으로 경험한 사람들이 “ALWAYS”(편의점 이름) 소외되고 단절되어 온 사람들을 생각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도 같은 사람인데, 그들은 너무 오랫동안 단절되고 소외되어 왔었다.

우리 한국 사회가 더 나아지기 위해서, 그리고 다양한 사람들, 약자들까지 포용하며 조화롭게 공존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마치 “불편한 편의점”처럼 우리 모두가 조금씩 불편함을 감수해야 할 것이다. 그동안 사람들 간에 놓여 있던 단절의 벽을 허물고 사람들 간의 소통과 연결을 촉진시키는 방향으로 이 책이 역할을 다하기를 희망한다.

독자가 이 책을 읽으며 약간의 불편함을 감수해야 할 지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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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읽었습니다. 정말로 유의미한 활동을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불편함'을 감내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안락하고 안전한 자기 삶만을 지키려 하면, 다른 사람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까요. 그래서 의미 있는 일을 위해 돈과 시간을 적극적으로 소모해야겠다고 종종 다짐하곤 합니다. (그 다짐을 지키기는 참 어렵지만요.) 위의 리뷰와 약간 강조점이 다르긴 하지만, 제가 최근에 아주 인상적으로 읽었던 글을 여기도 올려봅니다.

목회자들은 이런 상투적 표현을 얼마나 많이 들어왔던가? "글쎄요, 나는 내가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만의 조용한 방법으로 좋은 일을 많이 하거든요. 나는 단지 교회 안에서 선행을 하지 않을 뿐이죠. 나는 나만의 방식으로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조용하게 타인을 돕고 다니는 익명의 독지가 이미지는 매력적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는 현실이라기보다는 몽상인 경우가 더 많다. 요즘 익명의 독지가를 찾기 힘든 주된 이유는, 필요한 선행이 대부분 공동의 공적인 선행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참으로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기 위해서는 위험 감수와 장기간의 개입, 대가가 요구된다. 익명성의 안전, 충동적이고 일시적인 자선 행위의 편의성, 그리고 초연한 기부의 비인격성이 론 레인저 시혜의 진짜 매력 배후에 있다. 점잖은 사람들은 대부분 궁핍한 사람이 자녀들을 위한 음식을 마련하도록 돕기 위해 돈 몇 푼을 기쁘게 내 줄 테지만, 우리는 '정부의 무료 지원'과 '복지 혼란'에 대해 불평을 늘어놓는다. 그런데 이런 정책은 (우리 납세자들의 돈을 계속 사용하겠다고 요청하는 다른 정책들과 견주어 볼 때) 상대적으로 적은 비용을 들여 저소득층 사람들에게 훨씬 장기적이고 협력적인 공동의 책임을 수행하려는 시도다. 가난한 소수 집단이 그들 자신의 거주지와 교회와 학교에 머무르는 한, 또한 참된 평등과 존엄을 바라는 그들의 요구에 정면으로 맞닥뜨려야 하는 상황에 몰리지 않는 한, 우리는 그들을 기쁘게 돕는다. (윌리엄 윌리몬, 『부족할 것이 없는 사람에게 왜 복음이 필요한가?』, 이철민 옮김, IVP, 2022,160-161쪽 인용자 강조.)

이 부분도 참 공감됩니다. 인간은 나약하고 욕심은 끝이 없기 때문에 개인의 실천과 선의에만 맡길 것이 아니라 공동체를 위한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 시스템(법이나 제도 또는 복지) 은 개인이나 소수 집단만이 아닌 공동체 전체를 위하는 것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를 위해서 사람들이 조금씩 불편함과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많은 합의와 고민과 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위선이라는 비난을 감수하더라도 어떻게 하면 다른 사람(최소의 범위에서 일단 주변 사람)을 위한 삶을 살 수 있을까 고민할 때가 있습니다. 또 배움과 가르침이 어떻게 하면 삶과 모순되지 않을까 항상 고민합니다. 그리고 제가 먼저 바뀌면 사람들도 조금씩 바뀔 거라고 생각하지만 항상 변하기가 쉽지 않네요.

아 그리고 제 글에 항상 관심 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 블로그에 방문했던 기억이 있는데 저랑 동년배셨던 걸로 기억합니다. 덧글 남겨주실 때마다 매번 반가운 기분이 드네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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