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교적인 창세기?

안녕하세요. 요즘 <<계몽의 변증법>>을 정말 열심히 읽고 있습니다. 석사 논문 쓰면서 거의 외우다싶이 봤던 책인데 다시 읽을때마다 내용이 새로운게 정말 놀랍습니다.

오늘은 정말 짧은 구절에 대해서, 단편적인 지식을 묻고 싶어서 찾아왔습니다.

"영원하다는 것은 모든 상징의 수식어일 뿐만 아니라 그 본래적인 내용이다. 세계가 근원적인 모태, 또는 소나 알로부터 생겨났다고 창조 과정을 기술하는 것은 유대교적인 창세기와는 반대로 상징으로서 기능한다." (국문본 43쪽.)

아도르노가 말하는 "유대교적인 창세기"란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아시는 선생님 계실까요?

그리고 또 상징으로서 기능하는 원시 신앙?과 대비되는 유대교적인 창세기의 기능은 무엇일까요?

답변해주시는 분들 항상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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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그리스도교 성경의 창세기를 말하는 내용이에요. 유대-그리스도교는 소위 "무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nihilo)"를 주장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잖아요. 세계가 어떤 모태나 알에서 태어난 게 아니라, 정말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만들어졌다고 말한다는 거죠. 그리고 이 점에서, 세계의 근원적 모태 따위를 상정하는 입장과 유대-그리스도교의 창세기가 대비된다는 거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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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항상 답변 달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댓글 달아주시는 사이에 제가 본문 내용을 수정해버렸습니다.

세계의 근원적 모태 따위를 상정하는 입장과 유대-그리스도교의 창세기가 대비된다

라는 말씀은 곧.. 원시 신앙과 같은 형태에서는 모든 사건을 반복되는 과정으로 생각하지만, 유대-그리스도교에서의 사건이란 일회적이고... 절대적인 것?으로서 받아들여진다, 아도르노는 대충 이런 말이 하고 싶었던걸까요 ? 이러면서 일회성과 반복성, 개별성과 보편성, 특수성과 추상성 등등... 이런 이념들에 대해서 조금 말하고 싶었던 것 같기도 하고요. 질문인지 잡설인지 알 수 없는 댓글이 되어버렸네요 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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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아도르노를 잘 알지는 못하지만,

아마 위에서 쓰신 내용이 맞을 거예요. 이게 20세기 신학이나 종교학에서 이루어진 일반적인 분석이기도 하였거든요. '자연종교'와 '계시종교'를 엄격하게 구분하여서, 전자는 영원한 회귀를 강조하는 특징이 있다고 평가하고 후자는 역사의 일회적 성격을 강조하는 특징이 있다고 평가하는 것이 그 당시 학자들의 견해였거든요. (엘리아데가 이런 견해를 제시한 대표적인 인물이죠. 물론, 오늘날에는 이 구분이 다소 지나치게 도식화되어 있다는 비판도 자주 제기되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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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밀히 말하면 '창세기에 대한 교부시대부터의 그리스도교 신학적 해석'이 아닐까 싶습니다.. 잘 아시겠지만 "무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nihilo)"는 아우구스티누스가 헬라철학에 대응하여 정립한 교리로 알고 있거든요. 창세기 원문만으로는 "혼돈", "수면" 등 야훼의 천지창조 이전에도 이미 무언가 존재했음을 암시하는 내용으로 해석할 수도 있으니까요.

주제와는 별개로 저번에 추천해주신 장재호 교수님 영상과 책들 잘 보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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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아요. '무로부터의 창조'라는 테제가 창세기의 서사에 정확히 대입된다고 보기는 어려워요. 오히려 창세기는 '혼돈으로부터의 창조'를 표현하고 있으니까요. 이 테제는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해 후대에 만들어진 것이죠. 다만, 저는 이 테제에 대해 양가적인 입장을 취하는데, (a) 이 테제가 창세기의 서사에 그대로 들어맞지는 않는다고 해도, (b) 이 테제가 성서 전체의 '정신'이나 '취지'에는 정확히 일치한다고 생각해서요.

사실, 창세기의 창조 사화(史話: 역사 이야기, Sage)는 의도가 다분히 분명해요. 이 사화는 바빌론 포로기 이후 남유다 왕국의 멸망을 배경으로 하고 있거든요. 바빌론의 침략 때문에 모든 것이 다 무너져서 유대인들은 '혼돈과 공허' 상태에 남겨지게 되었지만, 그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조차 야훼가 자신들을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이 유대교의 신앙이었어요. 그 신앙의 표현이 바로 창세기 사화이고요.

'혼돈과 공허(תֹ֙הוּ֙ וָבֹ֔הוּ, 토후 바보후)'라는 표현이 바빌론 포로기의 멸망을 가리키는 문맥과 창세기 문맥에서 공통적으로 등장한다는 점이 이런 사실을 나타내는 문학적 장치에요. 가령, 세상의 창조 이전에 혼돈과 공허를 말하는 창세기 1:2의 구절과, 야훼의 진노로 바빌론에 멸망당한 예루살렘을 표현하는 예레미야 4:23의 구절에 '혼돈과 공허'라는 표현이 공통적으로 등장하죠.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תֹ֙הוּ֙ וָבֹ֔הוּ, 토후 바보후), 어둠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물 위에 움직이고 계셨다." (창세기 1:2)

"땅을 바라보니 온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다(תֹ֖הוּ וָבֹ֑הוּ, 토후 바보후). 하늘에도 빛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 옥토마다 황무지가 되고, 이 땅의 모든 성읍이 주님 앞에서, 주님의 진노 앞에서, 허물어졌다. 나 주가 말한다. 내가 온 땅을 황폐하게는 하여도 완전히 멸망시키지는 않겠다." (예레미야서 4:23-27)

실제로, 창세기의 최종 편집은 바빌론 포로기 이후라는 것이 구약학자들의 거의 합의된 견해에요. 그러니까, 창세기의 첫 장은 모든 것이 멸망하여 완전히 황폐하게 된 상황에서조차 야훼가 자신들을 새롭게 창조하실 능력이 있는 분이라는 믿음을 말하고 있는 책인 거죠. 야훼가 세상을 '혼돈과 공허'에서 창조해낸 분이라면, 포로기 이후 '혼돈과 공허'에서도 새창조를 행할 능력이 있는 분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무로부터의 창조'라는 핵심 사상은 성경 전체에 흐르고 있다고 봐요. 여기서 쟁점은, 창조 이전에 일종의 형이상학적 '원질료' 따위가 있었는지가 아니라, 모든 것이 완전히 끝난 절망의 상황에서도 야훼가 우리를 구원할 능력이 있는 분인지에 달려 있죠. 야훼의 구원에는 (더욱 성서적인 표현을 사용하자면, 야훼의 '새창조'에는) 아무런 '조건'이나 '제한' 따위가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 유대인들이 가졌던 믿음이에요. 적어도, '무로부터의 창조' 교리는 이 점만큼은 잘 포착하고 있다는 점에서, 저는 이 교리가 성서의 핵심에서 벗어나지 않았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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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군요..저도 몇몇 구절만으로 확대해석하는 걸 좋아하지 않고, 무로부터의 창조가 충분히 근거있고 공감할만한 주장이기에 지금까지 그리스도교의 보편적 교리로 남아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원질료를 상정하는 주장들이 그리스도교에도 일부 이단사설(?)로 존재할지 모르지만..

추가로 성서비평적 배경지식을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설명을 보니 바빌론 유수 이전에 유대교의 창조신화는 어땠을지 궁금해지네요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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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성서비평에 관심을 가져주시니, 댓글을 달지 않을 수가 없네요ㅠㅠ (사실, 저는 철학보다 이런 쪽을 더 좋아합니다.)

창세기 1-3장은 사제계 문서(약어: P 문서)와 야훼계 문서(약어: J 문서)가 결합된 텍스트입니다. 율리우스 벨하우젠(Julius Wellhausen)이라는 19세기의 성서학자가 이 점을 밝혔는데, 오늘날 다소 비판을 받고 있기는 해도 여전히 구약성서 연구에서 기본 중의 기본으로 평가받는 학설입니다. 흔히 '4문서 가설' 혹은 'JEDP 문서 가설'이라고 불려요. ('야훼계', '엘로힘계', '신명기계', '사제계' 문헌들의 결합이 구약성서의 모세오경을 이루고 있다는 주장입니다.)

가령, 창세기 1장은 하나님을 지칭할 때 '엘로힘'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만, 2-3장은 '야훼'라는 표현을 사용해요. 또 1장은 굉장히 체계적이고 도식적이고 추상적인 표현으로 창조를 기록하지만, 2장은 야훼를 의인화하는 등 다소 이야기적인 면모가 강하고요. 또 창조 순서도 서로 미묘하게 달라요. 1장에서는 인간이 가장 마지막에 창조되지만, 2-3장에서는 인간이 가장 먼저 창조되죠. 이런 점들로 인해 1장은 전문 제사장들이 기록한 문서로 보고, 2-3장은 하나님을 '야훼'라고 지칭하는 소위 '야훼스트'라는 집단이 기록한 문서라고 보죠.

기록 연대에서는 2-3장이 1장보다도 더욱 이른 시기에 쓰였을 것이라는 게 지배적인 의견이에요. 물론, 2-3장의 전승이 역사적으로 어디까지 거슬러 올라가는지에 대해서는 학자들마다 의견이 분분하지만, 2-3장의 의인화된 하나님의 창조 이야기가 먼저 기록되고, 이후에 1장의 아주 추상적인 하나님의 창조 이야기가 기록된 다음, 바빌론 포로기 이후에 그 두 이야기가 하나로 결합되어 오늘날 창세기의 모습으로 편집되었을 것이라는 게 구약을 연구하는 학자들의 일반적인 입장이죠.

그래서 만약 유대교 창조 사화의 좀 더 오래된 형태를 알고 싶으시다면, 2-3장에 주목하시는 것이 좋을 거예요. 물론, 사실 창조 이야기는 이사야서나 시편 등에서도 파편적으로 등장하긴 하는데, 경우에 따라서는 이런 이야기들을 종합해서 이해를 해야 할 때도 있고요. 고대근동신화와 창세기의 관계에 관한 아주 흥미로운 연구로는 마이클 하이저의 책들을 추천드립니다. '신화'라는 관점에서 창세기의 다양한 요소와 상징들을 분석하는데, 당대 유대인들의 세계관을 확인하기에 좋아요. 다만, 하이저는 약간 논쟁적인 학자이다 보니, 그의 해설들을 어디까지 받아들일 것인지는 고민해보아야 할 지점들이 있지만, (가령, 하이저는 이미 구약성서에서 '보이는 야훼와 보이지 않는 야훼'라는 일종의 삼위일체적 사고가 등장한다는 매우 흥미롭지만 논쟁적인 주장을 제시하거든요.) 하이저가 주장하는 전체적인 내용들은 오늘날 구약성서 연구와 구약신학 연구에서 꽤나 널리 통용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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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로부터의 창조'가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해 정립된 교리라면, <그리스도교적 창세기> 와 <소나 알로부터 생겨난 창조 과정> 을 대립시키지 않았을까요? 아니면 단순히 아도르노의 실수일까요?

본문 내용만 보면 '유대교적인 창세기' 라고 명칭하고 있으니까요. 아브라함계통의 창세기 였다면 나름 말이 될 수 있겠는데요.

YOUN 님께서 말씀하신 내용도 대부분 '그리스도교 학자'의 입장이 많이 반영 된 것 같아요.

관련해서 정보가 있을까 조금 찾아봤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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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려주신 영상은 미드라쉬 중 하나인 창세기 랍바를 소개하고 있네요. 사실 미드라쉬까지 들어가면 정말 전문적인 논의라, 저도 이런 문헌들에 대해서까지는 그다지 자세히 알지 못해요.

개략적으로만 말하자면, 유대교는 우리가 흔히 '구약성서'라고 부르는 텍스트 이외에도 여러 가지 전승, 논쟁, 신화, 주석이 담긴 책들을 권위 있는 텍스트로 받아들여요. 구약성서에 대해 구전으로 전해지는 해석을 정리한 '미쉬나'라는 텍스트와 그 미쉬나에 대한 랍비들의 추가적인 해석을 모은 '게마라'라는 텍스트가 거의 성서에 맞먹는 권위를 지니고 있거든요. (우리가 '탈무드'라고 알고 있는 텍스트가 바로 이 미쉬나와 게마라를 합한 텍스트인 거죠.) 그리고 미쉬나의 자매문서로 '토세프타'라는 또 다른 텍스트가 있기도 하고, 성경 각 권에 대한 랍비들의 주석서인 '미드라쉬'가 있기도 해요.

그러다 보니 이 텍스트들에는 구약성서만으로는 알 수 없는 유대인들의 전통이나 신화가 포함되어 있어요. 가령, 미드라쉬에는 하나님이 사탄을 6일째 되는 날에 창조했다는 이야기가 적혀 있기도 하죠. 그래서 성서 연구와는 별개로, 이 텍스트들도 유대교의 독특한 사고 방식을 보여주는 문헌으로 아주 중요한 연구의 대상이기도 해요. 유대교에서는 당연히 구약성서를 해석할 때 이 문서들을 중요한 참고자료로 사용하고요.

그런데 아도르노가 과연 『계몽의 변증법』 위 단락에서 랍비 문헌들만의 고유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인지는 다소 의문스러워요. 물론, 아도르노는 유대인이었으니 유대교 해석 전통에 당연히 친숙했겠지만, 적어도 저 단락에서는 구약성서를 넘어서는 주석 전통들까지 고려되면 강조점이 많이 어긋날 것 같아요. 몇 가지 이유를 꼽자면,

(1) 랍비 문헌들이 단일한 특징을 지니고 있을까?

미쉬나, 게마라, 토세프타, 미드라쉬 같은 주석 전통들은 너무나 다양한 기원을 가져요. 같은 창세기 해석에서도 입장들이 천차만별로 갈리는 거죠. 미쉬나만 하더라도 온갖 구전 전승들이 기원후 70-200년대 사이에 모여서 만들어진 집합체에요. 구전 전승의 기원은 아주 오래 전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그 완성물은 그리스도교의 신약성서보다도 늦게서야 나왔으니, 미쉬나 자체가 단일한 해석적 입장이 있다 하기 어려운 거죠. 더욱이 팔레스타인 유대교는 수많은 미드라쉬를 만들어 내었지만 바빌론 유대교는 그렇지 않았다는 지역적 차이도 있고요.

그래서 아도르노가 '유대교적 창세기'의 특징을 말하기 위해 랍비 문헌의 이런 복잡한 차이들까지 염두에 두었을 것 같지는 않아요. 만약 랍비 문헌을 염두에 두고 저 구절을 쓴 것이었다면, 아도르노가 (a) 다른 창세 신화와 유대교 창세기의 차이도 고려하고, (b) 유대교 창세기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해석과 랍비적 해석의 차이도 고려하고, (c) 랍비적 해석들 사이에 내재하는 차이도 고려하고, (d) 그럼에도 랍비적 해석에서 본질적 요소를 뽑아내어 다른 창세 신화와 대조하였다는 말이 되는데,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저 짧은 단락 안에 너무 많은 종교학적 의미를 부여하는 셈이 될 것 같아서요.

(2) 랍비 문헌이 과연 구약성경에 대한 주석으로서 얼마나 정당할까?

게다가 랍비 문헌이 반드시 구약성경을 본래 맥락대로 주석하고 있지는 않다는 점도 중요한 문제에요. 역사비평적 방법이 적용된 성경 해석은 19세기에나 등장하거든요. 그 이전까지 성경 해석은 (물론, 본문의 맥락이나 언어학적 요소 등을 어느 정도 정당하게 고려하면서 진행되었기는 하지만)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았을 때는 다소 비유적이거나 도덕적이거나 신화적인 요소가 많이 가미된 해석인 경우가 대부분이에요. 당장 미드라쉬의 창세기 랍바만 보더라도, 구약성경에서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 악마의 창조에 대한 신화가 랍비들이 악의 문제를 다루는 과정에서 등장하기도 하는 것처럼요. 또 (위의 영상에서도 나오지만) 왜 창세기 첫 글자가 히브리어 알파벳 '알레프'부터가 아니라 '베트'부터 시작되는지 같은 다소 맥락에서 어긋난 질문들이 제기되기도 하죠.

그래서 저는 구약성서에 대한 연구와 랍비 문헌에서 제시된 주석에 대한 연구는 다소 분리될 필요가 있다고 봐요. 물론, 랍비 문헌이 구약성서를 계승한 중요한 문헌인 것은 맞지만, 이 문헌이 반드시 구약성서의 적법한 계승자인지는 다소 의문스러운 거죠. (그리고 이 논의가 사실 그리스도교 신학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니긴 해요. 그리스도교 입장에서는 신약성서가 구약성서의 적법한 계승자라고 주장하니까요. 당장 예수는 마가복음 7:1-13에서 랍비들이 추앙하는 '미쉬나(장로들의 전통)'를 비판하기도 했죠.) 오히려 구약성서 자체에 대한 연구는 역사비평이 발달한 오늘날에 훨씬 더 정확한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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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글 답변 감사합니다.

저도 굳이 따지자면 '아브라함 계통 창세기' 를 잘못 표현한거라고 생각합니다.

이슬람 / 유대교 / 그리스도교적 창조설화를 얘기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본문을 다시 읽어보며 다시 느낀점이 있네요.

세계가 근원적인 모태 - 이 모태의 상징으로 가장 많이 쓰이는게 나무라서 나무위키의 힘 좀 빌려봤습니다.

  • 구세주
    신이 우주를 창조했고 역사를 다스리며 예언자와 천사 같은 전령을 보내며 영감을 받은 계시를 통해 신성한 의지를 드러낸다고 믿고 신에 대한 순종이 역사적으로 실현되어야 하며 언젠가는 최후의 심판에서 신이 일방적으로 인류 역사에 개입할 것이라고 단언한다. 기독교, 이슬람, 유대교는 다른 문화에서 볼 수 있는 정적인 관점이나 순환적인 관점과는 달리 역사에 대한 목적론적 관점을 가지고 있다.

  • 종말론적 세계관
    세상을 창조한 신이 종국에는 최후의 심판으로서 그 스스로 세상을 끝장내며 신을 따른자는 부활하여 신과 함께 영원히 산다고 믿는다.

영원은 순환적인 관점이고 그 상징물이 알인 이유도 이 순환때문에 그렇다고 Dirtytroll 님께서 잘 해석해주셨네요.

황소와 리라도 수메르 설화에서 되게 중요하다고 했는데, 이게 영원이라는 순환론 관련이 있는지는 조금 더 찾아봐야 겠습니다.

그러면 아도르노의 표현이 <순환적인 신화>와 <목적을 갖는 신화>를 대립시키고 싶은 것인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YOUN 님이 잘 표현해주셨듯, 창세기는 바벨론 포로기에 메시아 사상을 갈망하며 만들어진 설화임을 미루어 짐작해봤을 때, 창조에 목적을 갖고 있는 성향도 있구요.

즉, 순환적인 신화와 목적을 갖는 신화(혹은 시작과 끝이 분명한 직선형의 신화) 를 대립시키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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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아도르노의 표현이 <순환적인 신화>와 <목적을 갖는 신화>를 대립시키고 싶은 것인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아도르노에게는 신화는 정의상 자연을 포함해 세계를 같은 일이 언제나 되풀이해서 일어나는 곳으로 보는 세계관이 녹아 있는 스토리입니다. 일신교적 종교는 그런 세계관이 녹아 있는 스토리가 아니니 아도르노에게서 일신교적 종교는 신화가 아닙니다. (반면 불교는 신화적이라고 퇴자놓습니다. 지젝과의 흥미로운 일치점입니다.) 일반적으로도 신화와 종교는 구분됩니다. 신화는 종교의 전단계이거나 종교의 한 요소라고 하죠. 그런데 다른 한편 아도르노는 유대교를 반신화적이라고 되풀이해서 칭찬하기도 기독교가 유대교보다 진보적이라고 평가하기도 기독교를 비판하면서 니체가 "일신교 또는 그 변형태인 기독교가 신화임을 꿰뚫어 볼 수 있었다"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계몽이 결국 신화적인 것으로 판명났으니 계몽의 도정에서 생긴 모든 것이 정도를 불문하고 어느 정도는 신화적인 것이라는 생각을 아도르노는 하고 있습니다. 계몽이 전체이고 전체가 허위적이면 전혀 허위적이지 않은 일부는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반면 아도르노의 사유는 바로 그 있을 수 없음에 대한 / 그 전체에 대한 비판적 사유이기 때문에 전체에 동조하는 정도가 가장 적은 것일 수 있습니다. 아무튼 '아도르노 사상에서 신화와 종교' 내지는 '아도르노의 종교 비판'은 아주 흥미로운 논문 주제가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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