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트겐슈타인, 논리철학논고

안녕하세요.

이렇게 불쑥 찾아온건 다름이 아니라, 제가 뭘 잘못 이해하고 있나 궁금해져서 그렇습니다.

염치 불구하고.. 여쭙겠는데, 제가 이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논고의 거의 마지막 문장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건지, 그게 의문입니다.

뭐 디시인사이드 같은 곳 링크를 달아 올린건 죄스럽게 생각하지만.. 이걸 새로 쓰자니, 제가 지금 (이것 또 참 죄송하지만.. 이런걸 읽는 사람 보고 이해하라는 그런 것도 웃기죠) 글을 꼼꼼히 따져보며 다시 고쳐쓸 상황이 아니라, 이해해주십사.. 하고 올립니다.

제가 궁금한 건 이
"말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 우리는 침묵해야한다"
라는 문장을 제가 오독했는가의 여부입니다.
제가 요즘 수학공부와 성경읽기, 그리고 윤리적 문제 고민하기로 비트겐슈타인과 똑같은 삶을 따라하며, 이것들의 논리적 구성 가능성을 따지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에 따라서 저는 이 문장을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말할 수 없는 것들이라기 보단, 경험주의자들은 그것들을 말로 하느니 차라리 경험해서 직접 그 가치를 깨닫는게 나을거다, 그래서 [말하지 않는 게 낫다].
[말하지 않는 편이 낫다]. 라고 말한 것으로 알아들었습니다.

그런데 댓글들 반응이 가관입니다.

첫번째 반박 댓글 -> 이성적 비판을 하고 있질 않습니다. 제가 독자적 해석을 하고 있다는데, 도대체 무슨 독자적 해석인지 모르겠습니다.

두번째 반박 댓글 -> 제가 이미 파악하고 있는 그 당시의 분석철학계의 조류를 읊고 있습니다. 읽으면서 모든 문장에 동의했습니다. 그리고는 저보고 뭐라고 합니다. 이게 도대체 뭘까요? 제가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는 걸까요? 저는 도대체 무슨 속단을 한 걸까요?

진짜 모르겠습니다. "내가 정신병자인건가?"
고민해봤는데요, 오늘 하루 여러 사람이랑 말도 통하고, 기독교 신자 (이미 얼굴에 다 드러나더라고요. 딱 보니까 종교있는 사람이구나, 싶었는데 역시나. 종교적인 기반이 있는 사람들은 다 얼굴에 드러나죠.) 랑도 말이 통하고요. 제가 정신이 이상한 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제가 요즘 괴델의 저작물, 그리고 빈에서 연구하다가 조국으로 돌아가 그렇고 그런 최후를 맞이한 학자들을 보건데, 그 사람들의 논리적인 도구들은 비트겐슈타인에게 전해진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요즘 보고 있는 <신의 존재에 대한 괴델의 수학적 증명> 이라는 책에 나오는 괴델의 증명도, 괴델 자신이 소중히 가지고 있었을 뿐, 다른 이에게 공유된 적이 없는 듯 하거든요. (지금이야 뭐 공공연히 다 알게 되어버렸지만..)

저는 틀리게 사고하는게 싫습니다. 이게 뭐 잘못하는 생각입니까? 그런데 나한테 그게 왜 잘못된건지 가르쳐주지를 않네요. 이게 대체 뭐람? 생각하면 할수록 모르겠네요.

뮤니츠 책만 읽어봐서 그에 따라 제가 아는 걸 말씀드리자면......

  1. 수학적 플라톤주의는 수학적 대상이 어떤 형태로든 정말 존재한다는 의견으로 압니다. 현존하는 물질 세계 바깥에 수학이 펼쳐지는 신비한 세계가 따로 존재하겠지요. 작성자분의 의견이 그쪽이 아닌가 합니다.

  2. 그에 비해 러셀와 비트겐슈타인에게 수학은 일종의 논리적 연역입니다. 수학은 A=A를 복잡하게 전개한 것으로, 정보값이 없습니다.

<논고>에서 '말한다'는 것은 이미지로 표현할 수 있는 사실에 관한 명제를 말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논리학이나 윤리학의 명제는 이미지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사실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명제를 사실이나 거짓이라고 말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세계의 시공간을 메우고 있는 구체적인 사물과 관련이 있는 명제여야 합니다. 그게 말한다는 것의 의미가 됩니다.

  1. <논고>에서 수학은 논리학입니다. A=A같이 모든 명제가 따를 수 밖에 없는 기본적인 논리적 형식입니다. 그와 다른 것을 상상할 수 없는 세계의 한계이고, 그렇기에 신비합니다. 이것은 명제를 사용하여 말해질 수 없으며 명제를 통해 보여질 수만 있습니다. 여기서 보여진다는 것은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것을 말한다는 것은 형식적 개념을 변항들 중의 하나로 다루는 것인데, 그것이 모순을 불러오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종류의 진술들은 형식적 개념을 마치 손에 잡히고 상상에 따라 바뀔 수 있는 대상처럼 간주합니다. 그렇게 할 수 없다는 이야기 같습니다.

  2. 한편으로 (윤리적, 종교적, 형이상학적) 명제들이 있는데, 이것도 말해질 수 없고 보여질 수만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명제들의 경우 보여진다(Showing)는 것은 실천적 행위를 의미하는 것이고, 학문적 지식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뮤니츠는 상당히 키에르케고르적으로 해석합니다.

저도 비트겐슈타인이 두 가지 영역을 상당히 비슷한 방식으로 표현한 것 같긴 합니다. 다만 1)과 2)는 논리적 공간의 경계와 바깥이라는 점에서 상당히 다르며, 일단 구분을 두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작성자 분께서는 1)과 2)의 '말할 수 없음'과 '보여짐'을 같은 의미에서 읽으셨던 게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논고> 전체가 형식적 개념에 대한 책이기에 1)에서 나온 오류를 그대로 가지고 있는 책입니다. 수학과 마찬가지로 논리적 형식을 대상으로 다루고 있다는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에 따르면 <논고> 자체가 헛소리가 됩니다. 그러나 이것들은 헛소리지만 논리적 공간을 드러내준다는 점에서 유용한 헛소리입니다. 한편으로 윤리적 종교적 명제는 헛소리인데 우리의 삶에서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이 두 가지는 다른 의미에서 헛소리라고 읽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두 가지를 같은 의미에서 읽는 해석이 있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그렇다면 상당히 급진적인 해석이 될 것 같습니다. 저는 이렇게까지밖에 이해하지 못했는데, 다른 분이 더 정확하게 답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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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둘이 왜 합칠수가 없는지 요즘 이해가 안되기 시작해서..
항상 무언가 평행선을 달리는 논의들을 보자면 결국 똑같은 본질을 다른 형태로 얘기하고 있을 뿐이라고 여겨질 때가 있습니다.
가령 코페르니쿠스의 태양중심적 태양계 모형과, 동심원이 가미된 지구중심적 태양계 모델처럼요.
후대가 평가하기에 전자가 후자보다 낫다고 후자를 비웃지만 글쎄요, 둘 다 결국 지금에 와서는 어느정도 틀린 소리고 [후자가 압도적으로 틀려먹기는 했죠], 둘 다 고려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상은 '아무도 읽지 않은 책' 에 나오는 저자분의 탐구 결과를 적당히 제가 요약한 것입니다)
근데 그 뭐.. 생각하면 할수록 잘 모르겠네요. 공부를 더 해봐야 할 것 같아요.

제가 기억하기로 비트겐슈타인은 논리철학논고에 logical form (sense를 가진 명제들과 현실이 공유하는 form)에 관해서는 (어느 명제도 이것을 represent 할 수 없기 때문에) 말할 수 없고, 이것은 오직 보여질수 있다고 "분명히" 적었습니다.

님의 해석에 따르면 비트겐슈타인이 의도했던 바는 "logical form에 관해서 말할수 있지만 직접 경험하는게 낫다"인데... 굳이 비트겐슈타인의 말을 무시해가면서 이런 해석을 받아들일 이유가 있는지 의구심이 드네요.

아니.. 저도 이걸 구체적으로 다 보여준건 아닙니다
제가 거의 가리킬 수 있는 극한까지 가리키려고 시도해 본 거지
수학의 세계가 구체적으로 왜 아름다운지
신앙의 세계가 구체적으로 왜 아름다운지
윤리문제의 고민이 왜 아름다운지는 역시 다시금
본인이 직접 제가 제시한 바든, 아니면 개인의 판단에 의거해서든 '직접' 해봐야 아는겁니다

저희가 마치 청소기 조립 설명서를 구체적으로 모두 알고 있다고 해서, 그 청소기를 만져본 것도 아니거니와, 그 청소기를 사용하며 청소기의 유용성을 실제 세계에서 확인해보았다고 말하는 것도 말이 안 되는 게 아니겠습니까?
저는 이런 입장에서 비트겐슈타인의 입장을 적극 옹호하고 있습니다

<철학적 탐구> 쪽의 후기 비트겐슈타인에서 얻으실 게 많을 것 같습니다. <논고> 시기의 전기 비트겐슈타인은 사실상 러셀과 같은 과학적 실재론의 입장에 가깝습니다.

"말할 수 없는 것(What we cannot speak about)"을 "말하지 않는 편이 나은 것"으로 해석하는 것은 무리일 거예요. 전기 비트겐슈타인이 '윤리적', '종교적', '신비적'인 것들을 '말할 수는 있지만 말하려고 하면 어려운 것'이라고 생각하였다는 주장은 거의 지지받기 어렵다고 봅니다. 『논고』는 명제의 일반 형식을 "[p, ξ, N(ξ)]"로 정의하거든요. (바bar는 사이트에서 표기되지 않아서 생략하였습니다.) 즉, 요소명제들의 집합과 요소명제들에 연산 N을 반복 적용한 명제함수들의 집합 이외에는, 어떤 것도 전기 비트겐슈타인에게서는 유의미한 '언어'라고 인정받을 수 없어요. 윤리적, 종교적, 신비적인 것들은 명제의 일반 형식에 따라 표현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정말로 말할 수 없는 것들이죠. 단순히 말할 수는 있지만하기 어려운 것이 아니라, 명제함수의 원리상 요소명제들의 결합으로 표현 자체가 되지 않는다는 거예요.

물론, 비트겐슈타인의 저 마지막 구절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몇 가지 논쟁적인 지점들이 있긴 해요. 특별히, 2000년대 무렵에 비트겐슈타인 연구의 쟁점이었던 소위 피터 해커의 '전통적 독법(traditional reading)'과 코라 다이아몬드의 '단호한 독법(resolute reading)' 사이의 논쟁이 유명하고요. 하지만 이 독법들 중에서 어느 쪽을 선택하더라도, '말할 수 없는 것'은 정말 말 그대로 말할 수 없는 것으로 남아요. 두 진영은 (쟁점을 단순화하자면) '말할 수 없는 것'의 의의에 대해서 입장이 갈리는 것이지, 『논고』의 명제함수론으로 표현되지 않는 '말할 수 없는 것'들이 존재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모두 동의하거든요. 이 논쟁을 소개한 기사를 하나 첨부해 드립니다.

게다가 저는 작성자 님이 왜 '말할 수 없는 것'에 수학을 포함시켰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아요. 제가 『논고』의 수학철학을 아주 자세히 알지는 못하지만, 제 기억으로 『논고』는 수학을 일종의 '동어반복'에 근거하여 설명했던 것으로 알고 있거든요. 전기 비트겐슈타인은 윤리적-종교적-신비적인 명제들을 '무의미한(unsinn) 명제'라고 분류하지만, '동어반복'이나 '모순' 같은 명제들은 '의미를 결여한(sinnlos) 명제'라고 분류하다 보니, 그 두 가지는 서로 성격이 다른 명제로 다루어져야 할 거예요. 전자는 세계 '바깥'을 말하려고 하는 명제인 반면, 후자는 세계의 '한계' 혹은 '경계'에 대해 말하려는 명제거든요. (물론, 이런 저의 해석은 여러 가지 논쟁적인 주제들을 미리 전제한 채 제시된 것이다 보니, 모든 비트겐슈타인 연구자들이 일반적으로 동의하는 해석이라고 하기는 어려워요. 다만, 수학적인 명제가 윤리적-종교적-신비적인 명제와 같이 묶이기 어렵다는 점만큼은 연구자들이 대체로 동의하는 부분일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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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뭔가 뒤죽박죽이네요. 저도 도대체 갈피를 못잡겠습니다

아 이제야 제가 뭘 이상하게 논의했는지 이해가 될 듯도 합니다.
제가 솔직히 말씀드리면 온갖 철학책을 뒤죽박죽으로 읽는데, 뭐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같은, 여기에 '뉴튼의 허튼 소리'라고 지적되던 공리-정의-정리 같은 것들이 반복되는 그런 것들이 강단을 지배해서 수학적 진리의 아름다움이 훼손다거니, 이런 투의 이야기가 나오더라고요.
제가 처음에 읽고 넘어갈적엔 받아들이고 넘어갔는데, 생각해보니 이해가 안 되는 겁니다.
저는 프린키피아에 나오는 복잡한 도형과 작도만으로 유도하는 코사인미분, 사인미분 같은 것들이 어느정도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는 거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들이 왜 아름다운지 설명하겠다고 저 문장에서 표현하는 바라고 포함시켰는데, 말씀하신 논리철학논고의 문장을 생각할 때 이게 모순되네요.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전기 비트겐슈타인 (이라고 해도 될진 모르겠는데..) 이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선 침묵하는 편이 낫다], 라고 말한 그 대상들에, 제가 쇼펜하우어의 주장을 반박하겠다고, 비트겐슈타인은 동의하지 않았을 수학적 진리들의 말할 수 없는 것 같은 아름다움을 억지로 포함시킨거죠.

저는 이것들이 어느정도 다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자니 개인 취향을 주장하는 바가 되니 결국 의미가 없어지네요. 제가 개인적으로 해석학을 좋아해서 함수해석학 책까지 사다가 약간 공부했는데, 참 뭔가 있어야 할 것들이 딱딱 있다는 느낌이 들더라고요. 아무튼.

이렇게 논쟁적인 주제일 줄 알았으면 애초에 건드리지 말 걸 그랬습니다. 코라 다이아몬드 책도 원서로 사다가 좀 보다 말았는데, 말씀해주시니 떠오르네요. 나중에 좀 자세히 알아봐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강진호 교수는 예전 김영건 선생님이 열심히 연구하는 학자라며 칭찬을 하셨는데 이분이셨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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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찬해주시니 몸둘바를 모르겠는데
요즘 대체 이런 고민을 혼자 왜 하고 있는건지 근본적인 회의감이 들기 시작해서 잘 모르겠네요 이게 참
허공에다 의미던지기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고 해야하나
아무튼 감사합니다..

제 댓글을 전혀 이해못하신것 같네요... 제가 하고자 했던 말은: 비트겐슈타인은 논고에서 몇몇에 대해 (예: logical form) 말할수 없음을 분명하게 적어놓았는데, 무슨 근거로 그것들에 대해 말할 수 있다는 해석을 제시하느냐는거였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의 의견을 무시하고자 하는 말은 없습니다, 다만 최초의 뜻으로 보이는 논리적으로 구성하려는 의도를 최대한 유지하되, 뒤에서 '이것은 말할 수 없으니 침묵한다' 라고 넘어가려는 부분까지 말(=논리적 명제화)로 이어 나가려고 해보는 것이죠.
비트겐슈타인의 말을 무시해가면서 까지 이런 말을 받아들여야 하냐는 의구심은 개인 취향 문제입니다. 제가 이렇게 하는 것도 개인 취향 문제입니다. 의구심이 들면 그것은 개인의 취향이므로, 제가 반박할 사항이 아니며 또한 설득할 사항도 아닙니다. 따라서 이것이 싫으면 제 의견을 무시하면 됩니다.

그리고 저는 계산과학과 증명논리 따위를 좋아하기에, 말을 한다는 것과 어떠한 논리적 명제를 제시함은 거의 동일한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지금 하신 댓글도 어느정도 논리적 기호화 할 수 있을 겁니다. 뭐 받아들이고 말고 역시 '본인 취향' 문제입니다. 제가 뭘 강요할 수 있는게 아닙니다.

제 댓글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신 것 같네요
=> 나는 댓글을 작성했다
당신은 나의 댓글을 보았음이 분명하다
당신은 나의 댓글을 보았다면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나는 당신이 나의 댓글을 곡해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나는 당신이 나의 댓글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판단한다.

무슨 근거로 그것들에 대해 말할 수 있다는 해석을 제시할 수 있다는 해석을 제시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 당신은 어떤 이론을 제시하고 있으며 나는 그에 대한 해석의 제시를 요구한다
당신은 어떤 이론을 주장한다
어떤 이론은 우리가 논리적 형식에 대해 말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할 수 있느냐, 따위는 모두 양상논리에 포함될 것입니다. 즉, 믿음이 포함됩니다. 믿음까지 어떤 주장이 환원될경우 우리는 논리적 분석을 끝마쳐야 합니다. 위에 제시한 바의 논리명제화는 그 뭐.. 논리학 교과서 같은걸 보시면서 직접 한 번 해보시면 좋겠습니다.

글이 길어졌습니다. 당신이 또 화가 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다시 한 번 제가 [믿는] 바를 주장하겠습니다.

i) 비트겐슈타인이 처음에 주장한 바를 어디까지 밀고 나갈지 말지의 해석을 받아들이는 것은 순전히 [개인 취향] 문제이기에, 이것을 하고 있는 저의 주장의 정당성을 요구하거나, 아니면 제가 당신에게 저의 주장의 정당성을 요구하는 것 [모두] 그닥 유쾌하게 할만한 일이 아닙니다.
(+ 저는 당신의 주장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비유하자면 이것은 김이 낫냐, 다시마가 낫냐 정도의 의미없는 다툼입니더다. 둘 다 좋아하면 그만 아니겠습니까??)

ii) 저는 고급논리학을 모두 끌어올 경우 (양상논리, 초월논리학 따위들) 인간이 하는 모든 의미를 가리키는 말들을 논리적 명제화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역시 제 [믿음]이므로, 도대체 누가 그것은 받아들일 만 하다, 아니다 등으로 평가할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다시 말하지만 개인 [취향] 문제입니다.
제 취향을 존중해달라고 까지 바라지도 않겠습니다. 하지만 제 취향이 왜 정당한지 설명하라고 하시면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사람이 왜 그런것을 좋아하도록 태어났는지를 남에게 합당하게 납득시켜야만 하는걸까요? 저는 그냥 이런것을 좋아하니까 이렇게 하는 것일 뿐입니다.
저는 ii)에 근거해서 사람들이 말을 한다는 것은 그냥 그 자체로 logical form 이라는 것을 그냥 [말하고 다니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 이 정도면 충분히 모든 설명이 되었으리라 기대합니다.

  • 왜 이런 짓을 하는가 하면, 사람들의 모든 말을 logical form으로 분석하는 일이 가능해질 경우, 어떠한 신앙, 깨달음에 이르는 절차 따위를 완전히 자동화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굳이 어떤 형이상적인 어떤 것을 헤멜 필요가 없어집니다. 형이상적인 사고를 하지 않고 기계적 절차를 따르되, 그 끝에 형이상적인 깨달음을 얻게 되는 거죠. 예, 뭐 그렇습니다. 말도 안되는 일 같은데 제가 성경과 불경을 분석적으로 이해하고 있기에 이렇게 말씀드립니다.
  • 논고는 명제를 이상할만치 좁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모든 문장을 논리적 분석하는 것이 가능할 겅우,
    모든 문장은 명제입니다.

자꾸 싸움을 거는 것 같아서 미안한데요...
저는 그렇게 합리주의자는 아니지만 아무튼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니, 비트겐슈타인을 이렇게 이해해보려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 정도는 받아들여 주심이 어떤게..

저는 님의 해석이 논고 텍스트에 기반이 없는 해석이란걸 지적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님의 해석이 님의 개인취향에 바탕을 둔 걸 아신다면 님도 님의 해석이 (디시에서 지적되었듯) 독자적인 해석임을 잘 아시겠네요.

그런데 왜 원문에서 굳이 님의 해석이 틀렸는지, 독자적인 해석인지 물으셨는지 모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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