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과 필연도 읽고 강의를 통해 크립키에 대해 배우다 보니 개인적인 직관과 크립키의 주장이 잘 맞지 않는 것 같다고 느끼고 있네요...ㅎㅎ
뭔가 크립키 주장의 난점들이랄까 반박할 거리들이 계속 생각나는데요
그래도 크립키의 주장들이 현대 분석철학자들 사이에서 꽤나 널리 받아들여지는 것들이 많다고 들었다 보니,
단지 제 크립키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서 그렇게 보이는 걸 수도 있겠다 싶구요,
아니면 정말 제가 지적하는 부분들이 유효한 반론이 될 수 있을지 궁금하네요.
크립키에 대해 저보다 나은 이해를 가지셨을 님들의 지혜를 빌리려 질문을 올려봅니다.
- 인과적 지시 이론에서 자연종 명사의 인과적 전수가 일어날 때, 종의 범위를 어떻게 확정할 수 있나요?
크립키와 퍼트넘은 어떤 자연종 명사가 어떤 대상들에 적용된다는 것은 iff 그 자연종 명사의 사용이 어떤 샘플에 대한 최초의 적용과 인과적으로 연결되어 있고, 그 대상이 그 최초의 샘플과 같은 종에 속한다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이런 명명이 인과적으로 전수될 때마다, 다음 사용자는 이전 사용자가 지시하려고 했던 자연종의 범위를 어떻게 알 수 있나요? 예컨대 A가 어떤 호랑이를 보고 이 종을 '호랑이'라고 명명했고, B가 A에게 어떠한 인과적 전수를 통해 '호랑이'라는 단어를 쓰려고 한다고 가정해 봅시다. B는 A가 과연 '호랑이'라는 자연종 명사로 '호랑이들'을 지시하려 했는지, '고양이과 동물들'을 지시하려 했는지, 아니면 '포유류 동물들'들 지시하려 했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호랑이'도, '고양이과'도, '포유류'도 모두 자연적으로 존재하는 생물학적 분류이므로 적법한 자연종 명사일 텐데요. 심지어는 A가 '생물들'을 지시하려 했다고 생각할 수도, '물리적 대상들'을 지시하려 했다고 생각했어도 무리가 없어보입니다.
이러한 문제는 자연종 명사의 모든 인과적 전수 과정에서 벌어질 것으로 보이는데, 제 생각에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자연종 명사의 기술이론적 내포 의미가 어느정도는 동반되어야만 하는 것 같습니다.
- 왜 자연종만이 필연적/본질적인 속성으로서의 특권적 지위를 갖나요?
물은 수많은 속성을 갖고 있죠. 예컨대 물은 H2O이며, 투명하고, 갈증을 해소시켜주며, 무색무취에, 화학적으로 중성이고, 0도에서 얼고 100도에서 끓는 속성을 가진 액체입니다. 그런데 왜 하필 물의 화학적 조성인 H2O만이 본질적 속성으로서 필연적이고, 다른 속성들은 그런 속성으로 간주될 수 없나요? 예컨대 '표준 대기압에서 0도에서 얼고 100도에서 끓음'이라는 속성 역시 '물임'의 필요충분조건이 될 수 있다고 하면, (물론 끓는점과 어는점은 ‘물임’의 필요충분조건으로 다소 부적절할 수 있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꼭 끓는점과 어는 점이 아니더라도 '물임'의 필요충분조건이 되는 ‘H2O임’이 아닌 물의 어떤 성질 x가 존재함은 충분히 가능해 보이기에 그런 성질의 예시로 끓는점과 어는점을 택해봤습니다. 혹시나 현실에서 그러한 단일 속성 x를 찾기 어렵더라도 물의 특정 속성들을 연언으로 연결하는 식으로 그러한 성질 x를 얼마든지 규정할 수도 있어 보입니다.) 그것 역시 자연 자체에 주어진 물의 속성이므로 화학적 조성과 마찬가지로 모든 가능세계에서 성립할 형이상학적 특권을 가져야 하는 것이 아닌가요?
한 가지 사례를 더 생각해 보았는데, 제 질문의 취지가 이해되셨다면 넘어가셔도 될 것 같습니다.
어떤 다른 가능세계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그 가능세계에서는 저명한 동물학자 철수가 살고 있다. 철수는 그의 연구실에 있던 강아지, 고양이, 개구리 등을 보고 그것들을 최초의 sample으로 ‘철수류’라는 종으로 명명하였다. 다른 동물학자들은 철수의 최초 사용의 지칭을 존중하여 인과적 연쇄를 통해 ‘철수류’라는 자연종 명사로 철수가 ‘철수류’로 지칭하려 했던 종을 지시한다. ‘철수류’의 내포적 의미에는 심장동물이라거나 콩팥동물이라는 것이 전혀 포함되어 있지 않지만, 철수와 동물학자들은 후험적 탐구를 통해 ‘철수류’에 속하는 동물들이라면 심장이 있고, 심장이 있는 오직 그 경우에 ‘철수류’에 속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심장동물임'은 자연 자체에 주어진 생물학적 종으로 '철수류'가 자연종으로서 적법한 명사임을 보여준다. 물론 이 가능세계에서도 심장동물의 외연은 콩팥동물의 외연과 같다. 그렇다면 ‘철수류’는 심장동물이라는 것은 필연적인가? 또한, ‘철수류’는 심장동물이면서 콩팥동물이라는 것은 필연적인가? 혹은, ‘철수류’는 콩팥동물이 아닌 것이 가능한가?
이 사례로 저는 어떤 한 속성만이 본질적이고 필연적인 형이상학적 지위를 가진다는 것이 충분히 자의적이고 인식의존적일 수 있다는 것을 보일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또, '철수류'라는 종 자체가 성립하는 것이 직관적으로 어려워 보인다면, 제가 첫번째 질문에서 제기했던 인과적 지시 이론의 난점도 보여줄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끓는 점과 어는 점이 아닌 다른 다소 현상적인 속성들도, 강한 과학적 실재론을 가정하지 않는 이상 물의 화학적 조성과 마찬가지의 형이상학적 지위를 누릴만 하다고 생각하기는 합니다만...
제 생각에 크립키 입장에서 할 만하다고 생각되는 반론은, 기원과 같은 속성들과 마찬가지로, 화학적 조성, 생물학적 종과 같은 속성들은 우리의 언어적 직관에 의해 얻어지는 본질이므로 다른 속성들과는 다른 형이상학적 지위를 갖는다고 말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런 입장을 취하게 된다면 형이상학적 본질과 필연성이 우리의 언어적 직관에 의존하게 되는 게 아닐까 싶네요. 크립키는 어떤 언어적 차원의 주장을 하려는 게 아니라 진정으로 형이상학적/존재론적 차원에서의 주장을 하려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말이죠...
쓰다 보니 길어졌네요. 부족한 제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하고, 지적과 반박도 감사합니다.